[Opinion] 인간과 비인간, 소외된 것들을 가시화하기 [미술/전시]

글 입력 2021.10.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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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부터 두 달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재난과 치유展>이 열렸다. 전시는 다섯 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소주제는 바이러스와 인간의 공존, 재난의 불평등, 지구를 함께 공유하는 인간 이외 생명종에 대한 성찰적 시선을 내포하고 있었다. 모두 35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해 감염병 발생과 확산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과 개인의 변화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것이 본 전시의 목적이었다.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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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사각 死角>, 2020

 

 

이진주의 <사각 死角>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사각지대’에 위치한 비가시적 풍경에 관심을 둔다. 작금의 재난 상황은 그동안 가시화되지 못했던 문제들을 드러냈다. 폐쇄병동에 입원해있던 정신 장애인들은 인권을 박탈당한 채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역사에 머무는 홈리스들은 ‘거리두기’를 할 집이 없음에도 코로나로 인해 이들의 유일한 쉴 곳을 철거당했다. 빈곤계층의 아이들은 쉽게 학습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돌봄노동의 의무는 여성에게만 가중하게 지워진다. 이진주의 <사각 死角>을 감상하며 나는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사유하였다.

 

작품의 전체 둘레는 14m로 거대하다. 관람객은 한눈에 작품 전체를 볼 수 없다. 한눈에 볼 수 있는 건 작품의 불완전한 일부뿐이다. 곳곳에 놓인 외래종 식물들, 바닥에 떨어진 종교적 도상, 발끝으로 디디고 서서 벽에 난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곤충 표본, 죽은 비둘기들의 다양한 오브제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하나를 보면 마땅히 하나를 잃어야 하는 것은 사회 존속의 숙명적 진실일까.

 

작품은 그 자체로 사각지대를 안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각지대가 형성된다. 사각지대에는 숨어 있는 존재들이 있다. 한눈에 작품 <사각 死角> 전체를 감상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사각지대 안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라진 '손(노동)'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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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민, <미궁과 크로마키>, 2013

 

 

차재민의 <미궁과 크로마키(2013)>는 15분 분량의 영상으로 두 가지 화면을 겹쳐 보여준다. 첫 번째 화면에서는 카메라가 아직 연결되지 않은 TV 케이블 선을 늘어놓고 있다. 두 번째 화면은 초록색 화면 위 아무 대상 없이 그저 '손-노동'을 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노동'을 흉내 내는 퍼포먼스의 일종으로서 손을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무언가가 만들어지거나 변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상 속 손은 멈출 생각 없이 계속해서 노동을 수행한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케이블 노동자들의 ‘노동 행위’를 모른다. 유리 세공업자, 승강기 수리공의 손놀림을 본 적이 없다. 육체노동자들의 노동은 가시화되지 않고, 점점 추상화된다. 노동의 근원적 목표인 생산을 지우자 그제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코로나19 속에서는 취약한 노동 환경의 실태가 드러났다. 보건의료 종사자들은 코로나19 속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곧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콜센터 근로자들도 감염위험에 노출된 채로 노동해야 했다. ‘필수노동자’인 택배와 배달 노동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음식, 생필품의 온라인 주문 수요가 폭증하며 과로를 감당하지 못해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재난 상황은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그들이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를, 그들의 노동하는 손, 손을 잊었다. <미궁과 크로마키> 속 유사노동은 역설적으로 감춰져 있던 ‘노동’을 드러나게 했다. 추상화된 노동의 과정을 벗겨 내려는 시도일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손-노동'을 하지 않는 임금노동자는 없지만 ‘손’은 점점 가려진다. 자본의 밀실 안에서 노동자들은 실체 없는 존재로 사라진다.

 

차재민 작가는 2년간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손(노동)’을 영상과 텍스트로 제작했다고 한다. 그가 관객에게 바란 것은 노동 문제에 대한 단순한 비평이나 동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관객이 노동자들의 손을 봐주기를, 노동자들의 본질적 문제에 스스로 다가가도록 요청했다.

 

 

 

코로나시대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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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관리본부 아프지마TV,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의 노래’<너와 나 우리 모두>

 

 

최근 접한 코로나19 관련 몇 가지 문화콘텐츠들이 있다. 섣불리 시청자를 위로하려고 하거나, 그 안에 불행 이미지가 범람해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질병관리본부 유튜브 채널 ‘질병관리본부 아프지마TV’에 게재된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의 노래’ <너와 나 우리 모두>라는 제목의 영상에서는 쉽게 위로 정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상 속에는 코로나19 이전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이 담겼다. 학교, 지하철, 병원에서 하나같이 밝은 표정을 짓던 이들이 마스크 착용과 함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한다. 슬프고, 아픈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는 이 영상은 그 취지는 좋지만 작은 의문을 남겼다. 과연 재난 이전의 우리의 삶은 아름다웠나. 이전의 사회를 그리워하는 태도는 개인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위로’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자신이 재난 상황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고, 이외의 문제에 둔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코로나19 시대 문화콘텐츠들은 ‘행복한 이전의 일상’을 부르짖을 게 아니라 그 행복한 일상이 누구의 것이었으며 그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삶은 어땠는지 치열하게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반면, 재난 상황의 고통이 국민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문화콘텐츠들도 생산되고 있다. 유튜브 채널 ‘씨리얼’에서는 코로나 상황 속 소외된 이웃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영상을 제작해 왔다. 코로나19 초기 폐쇄병동에 입원해있던 정신 장애인에 대한 영상 <폐쇄병동의 사망자들>, 대구 의료진에 대한 영상 <우리들의 너덜너덜해진 영웅>, 코로나로 인한 청년 해고 문제,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 불평등 문제에 대한 영상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영상은 위로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내세우는 콘텐츠들에 비하면 개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동정과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다. 슬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앞선 위로 콘텐츠들처럼 개인의 무력함을 강조할 뿐이고, 심각한 경우 사람들은 재난을 애도하거나 논하는 것을 지겨워하게 된다. 재난 속 타자를 혐오하는 감정을 느끼고, 비난의 언어를 밖으로 표출하는 행동 또한 이러한 심리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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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저서 『사진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재난적 사건들을 담아낸 사진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그녀는 “고통을 받는다는 것과 고통의 이미지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그런 이미지를 본다고 해서 “양심이나 인정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망가져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불행 이미지가 범람하며 사람들은 잔혹함에 익숙해지고, 그런 재난적 사건은 충격 대신 일상적인 것이 된다. 혹은 재난의 책임자를 ‘적’으로 상정하는 일에 과열된다. 혐오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위로’ 콘텐츠,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콘텐츠, 불행 이미지가 범람하는 콘텐츠 등은 혐오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고, 심지어는 혐오 감정의 원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문화콘텐츠를 제작하고, 향유해야 하는 것일까.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와 연민, 혐오의 감정을 넘어서 성찰과 연대로 나아가게 하는 문화콘텐츠는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이번 <재난과 치유展>에서 그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다.

 

 

 

혐오를 넘어 성찰과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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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 <빙하가 녹고 있다>, 2021

 

 

<빙하가 녹고 있다>는 코로나19 앞에서 인간이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려는 마음을 잠시 멈추기를 제안한다. 고통을 겪은 인간을 넘어,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 환경으로 고통을 겪는 비인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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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지혜, <검은 태양>, 2019

    

 

특히 염지혜 작가의 <검은 태양>이라는 비디오 아트 작품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촬영한 영상이 주요 푸티지로 사용되었고, 오로지 과학적 활동만 할 수 있는 남극이 사실상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정치적인 공간임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13분 분량의 이 영상에는 여러 이미지가 겹쳐졌는데 이 이미지들은 완벽한 균형이 불가능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프랑스 이민자의 한국어와 프랑스어 사이의 공백, 극지와 또 다른 형태의 극지,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처음부터 분열되지 않았던 것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영상의 막바지에는 나지막한 내래이션이 흘러나왔다.

 

자아를 억제하면 자아 분열이 생기듯, 환경을 억압하면 인재가 생기듯, 상대를 통제하면 상대가 떠나듯. 균형의 실패가 정상상태일지 모른다. 통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플라스틱이 몸에 박힌 채 죽은 물고기, 과하게 좁은 면적의 빙하 위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북극곰의 이미지, 해수면이 상승하여 집이 물에 잠겨 버린 베트남 남부 지역의 처참한 풍경은 영상 내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파란 하늘에 뿌옇게 잠긴 해, 고요히 왕복운동을 하는 바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모를 거대한 빙하를 오랫동안 가만히 비춰준다. 그리고 점멸하는 모닥불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마지막 내래이션이 흘러나온다.

 

내가 너와 진정으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염지혜 작가의 <검은 태양>은 나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지구에는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인간은 얼마나 많은 비인간을 자원화해왔느냐고, 코로나19 재난의 시작에는 인간의 육식자본주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아하고, 다정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가장 쉬운 방식은 불행 이미지인지 모른다. 그녀는 쉬운 방식을 거부하고, 관객에게 새로운 심미적 경험을 전달했다. 관객 스스로 성찰하게 하였다. 인간, 비인간, 모든 지구 생명체와 연대하고, 공동체 감각을 회복하겠다 다짐하게 했다. 전시를 관람한 8월부터 현재 10월까지 나는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하는 등 공동체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나가고 있다. 이는 문화예술이 공감과 연대라는 실천의 길을 모색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재난과 치유展>의 다양한 작품들은 긴 끈처럼 이어져 나의 사고 흐름을 이끌었다. 억지로 주입받은 감정이 아닌 스스로 찾아낸 감정을 곱씹을 수 있었다.

 

바야흐로 문화콘텐츠 범람의 시대다. 생산자들에게 할 수 있는 요구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문화콘텐츠를 접할지는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같은 콘텐츠를 접하더라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연대하고, 공동체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혐오를 조장하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한다.

 
 
[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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