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폭탄으로 불꽃축제 [공연]

당신은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글 입력 2021.10.01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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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박열>이 막을 내렸다. 박열이라는 인물은 2017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로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았던 터라, 2021년 뮤지컬을 통해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폭탄으로 불꽃축제를 벌이려던 사람들이구나.”

 

공연을 보고 든 생각이다. 폭탄과 불꽃, 그리고 축제. 참 이질적이면서도 오묘하게 잘 어울리는 이 단어들이 박열과 후미코를 이야기한다. 나는 무대 위 올려진 그들의 삶이, 몸을 내던지는 죽음으로 자신들의 축제를 벌이고, 다른 사람들의 축제를 소원하던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질적인 조화 속에서 조금은 무모한 일들을 하는 인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 글은 박열, 그리고 후미코의 불꽃같던 인생을 다룬다. 박열과 후미코가 누구인지, 그리고 뮤지컬 <박열>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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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아나키스트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활발히 활동했고 흑우회, 불령사 등에 몸담은 바 있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으나, 폭탄 암살 계획을 세워 폭탄을 구매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에 약간의 과장이 더해져 박열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탓을 돌리기 위한 배후로 지목되었고 결과적으로 긴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를 빼놓고 박열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가네코 후미코다. 그녀는 무적자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글을 쓰고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 후미코의 옥중 수기인 ‘나는 나’를 통해 알 수 있다.) 후미코는 박열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였고 19살에 박열을 만나 함께하게 된다. 단순 연인, 아내를 넘어서 후미코와 박열은 서로에게 좋은 동료였다.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흑우회, 불령사에서 활동했으며 박열과 동일한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결국 옥중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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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서 나는 류지가 옥중 박열과 후미코에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죽으려 하는 것이냐”던 물음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 나도 보면서 계속 이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일 테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살아가지 도대체 왜 나라, 국가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것일까.

 

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찬찬히 돌아보니 안일한 생각이었다. 나는 두 가지 점을 간과했다.

 

먼저 나는 그들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에 그들이 한 선택을 죽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결코 그 시대를 이해할 자신이 없다. 내가 속한 ‘나라’가 없고, 나를 지켜줄 ‘국가’가 없고,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가 없는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이해한다는 건 웃긴 일이다.

 

둘째, 박열과 후미코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동지였고 ‘자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두 인물은 행보는 함께 하지만 각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은 아마 자신을 포함한 사회의 개인들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길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을까? 내가 생각한 답은 간단하다. 박열과 후미코는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잘살기를 바란다. 조금 더 나은,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한다. 지금 당장 5분 더 잘까 하는 작은 고민부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실질적인 고민,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고민 끝에 우리는 선택을 한다. 박열과 후미코도 그런 게 아닐까. 단지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고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나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자유의 삶이었다.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는 억압, 통제가 없어져야 했고 그 대상은 당시 일본이었다. 독립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궁극적인 자유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

 

이때 선택의 중심에 ‘소속’이 아닌 ‘개인’이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열의 삶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과 애국심이라는 개념을 분리해 바라볼 수 있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애국심, 국가를 위한 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 시대 다양한 지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뚜렷한 애국심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열이 보여주듯 말이다. 후미코만 보아도 그녀는 조선인이 아니지 않은가. 매체에서 묘사되는 일제강점기는 굉장히 평면적이다. 애국자와 매국노, 이분법적으로 묘사되기 일수다. 그럴 때마다 너무 아쉽다. 시대가 시대라 할지라도 사회는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복잡한 사회가 무 자르듯 두 편으로만 나뉠 리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점에서 <박열>이 기존의 인식과는 결이 다른,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된 콘텐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두 사람의 삶이 인상적이다. 정말 그 시대의 한 개인을 전하는 것 같아 좋았다.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은 특히 현대사회의 흐름과도 걸맞는 부분이 있다. 오늘도 그때도, 우리는 모두 같은 하나의 ‘개인’이며 어쩌면 그 어느 시대보다 나 자신, 개인에 대한 관심이 큰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박열과 후미코의 삶이 더 가까이 와 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재가 될 때까지 나는 타오를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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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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