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깊고 담담한, 지구 끝의 온실

글 입력 2021.09.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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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분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의 소설로 한국 SF 소설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김초엽 작가의 신간, <지구 끝의 온실>이 출간되었다. 김초엽 작가는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성으로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관을 치밀히 구축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이번 소설에서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꽤 기대되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21세기 중반에 더스트(미세 먼지와 비슷한 형태로 공기를 부유하며, 인간의 호흡기에 침투할 시 치명적인 내상을 입힌다.)라는 물질이 대기에 퍼진 가상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디스토피아적 SF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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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대재앙을 몰고 온 더스트로 인해 멸망의 위기를 거친 이들은 거대한 돔을 설치하여 생존을 꾀하고, 돔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각자도생하며 가까스로 연명한다. 서로를 향한 의심과 배신을 거듭하는 멸망의 시대를 지나, 22세기에 들어서야 인류는 더스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위험 물질을 제거한 후 삶의 터전을 재건한다.


사회적 통념이 무너지고 도덕성이 빛을 잃은 사회에서 물질적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힘을 얻고 버려진 이들이 모여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플롯은 익숙하다. 생존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는 등장인물 간의 계급을 나눔으로써 독자에게 갈등, 또는 화합의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초엽 작가도 멸망의 위기를 견뎌내는 지구의 모습과 함께, 재건을 이룩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기존 장르문학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소설적 장치를 비슷하게 사용하였다.

 

<지구 끝의 온실>의 중심 화자는 세계가 재건된 후의 더스트생태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 아영이다. 그는 어느 날 ‘모스바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덩굴식물을 접한다. 언뜻 보면 유해 잡초처럼 보이는 모스바나는 누군가 임의로 조작한 것처럼 강원도 일대에 속수무책으로 퍼져나갔고, 이에 관심을 가진 아영은 비밀에 둘러싸인 식물의 정체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22세기를 살아가는 아영의 서사와 더불어, 더스트로 인해 황폐해진 21세기를 살아내며 고군분투하는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의 이야기가 함께 그려진다. ‘프림 빌리지’라는 마을을 만들어 생존자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레이첼과 지수의 관계성도 돋보인다. 이렇듯 시공간을 넘나들며 역순행적 구조와 순행적 구조를 동시에 취하는 이 소설은, 독자를 향해 복잡한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조금씩 던진다.

 

무엇보다 <지구 끝의 온실>은 작가가 힘주어 집필한 장편소설인 만큼 가상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설정과 인물 간의 섬세한 관계가 돋보인다. 게다가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갖춘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인 만큼, SF라는 핑계로 허투루 넘어가는 설정이 없다.

 

마치 실재하는 시공간을 관찰하여 집필한 듯 자세히 쓰인 학문적 설명은 쉽게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간혹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설명은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SF 소설로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마땅하다 생각되었다. 이렇듯 작가가 공고히 구축한 세계를 기반으로 독자는 마치 추리 소설을 읽듯이 복잡한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조금씩 얻어가며 몰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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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은 새롭지 않다. 갈등의 끝을 향해 달려간 후 마주하는 결말에서도 다소 맥이 빠진다. 하지만 소설 속의 주요 무대를 대한민국과 말레이시아로 설정한 점, 등장인물의 대다수를 여성으로 설정한 점, 여기에 ‘더스트’와 ‘식물’이라는 특별한 장치를 추가하여 환경 이슈를 탁월하게 녹여낸 점에서 신선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보통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수직적 관계를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지구 끝의 온실>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수평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고 의견을 개진한다. 이는 무척 인상적인 설정이었다.

 

기성 소설에서 많이 쓰인, 위계를 앞세워 폭력을 일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 소위 말하는 ‘아랫것들’이 힘을 모아 고난을 타파한다는 설정은 읽기에도 재밌으며 이해하기에도 쉽다. 물론 쓰기에도 쉽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 구도는 으레 먹히는 자극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 끝의 온실>은 ‘생존’이 아닌 ‘공존’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소설이다. 따라서 작가가 선택한 안온한 설정은 말초적인 자극을 유발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자연에 둘러싸인 인류의 모습을 세밀히 마주하기에 적합하다. 독자들은 한낱 인간의 감정으로만은 덮을 수 없는 거대한 세계를 부유하며, 기존의 소설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었던 깊고 담담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인물과 인물 간의 갈등이 적은 소설이기에, 작가는 여기에 ‘더스트’라는 특별한 장치를 추가하여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더스트에 내성이 없는 인간은 쉽게 약해지며, 도태될 수 있다는 설정이다. 그렇기에 더스트 내성을 가진 ‘내성종’은 또 다른 의미의 권력자가 되어 갈등의 불씨를 지핀다.

 

즉, 내성종과 내성종이 아닌 이들의 관계는 새로운 권력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가 이 권력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자, 결국에는 권력을 전복시킨 영웅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소설이 전개됨에 따라 더욱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다. 급진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몸부림친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소설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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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나는 작가가 지닌 진보적 가치를 더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했으면 좋겠다. 생태 피라미드에서 상위권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만했던 인류가 대자연에 굴복당해 분투하다 결국에는 공존할 방법을 모색한다는 내용의 큰 줄기는 마음에 든다. 그러나 곁가지, 세부 플롯에서는 조금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초엽 작가는 전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성평등을 기반으로 인물 관계를 구축했기에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나 또한 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모든 여성 인물이 비슷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아쉬웠다.

 

예컨대 소설 속에서 비폭력을 지향하는 공동체로 나타나는 ‘프림 빌리지’는 대다수가 여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부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주요 인물도 모두 여성이다. 이 설정이 매력적으로 와닿으려면 그만큼 다양한 인물의 매력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마치 한 명의 훌륭한 위인, 또는 선각자의 이미지를 거듭 활용한 듯한 여성들의 모습만 등장하여 이는 작가의 방대한 세계관을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느껴졌다.

 

물론 인간의 심리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을 등장인물에 활용하여 이야기의 범주를 넓힌 것은 훌륭했다. 고난을 거치며 서로 다른 인물이 돈독한 관계성을 맺는다는 설정은 모두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받을 만한 여성이 아닌 이외의 캐릭터는 너무 보편적인 모습으로, 구색을 갖추기 위해 넣은 듯 잠깐 활용되었다가 소비되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아쉬운 지점도 존재했으나, 전체적인 감상은 만족스럽다. 김초엽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쓰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그만의 세계는 점점 더 쌓이고 보태져 결국에는 하나의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 기성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코로나 팬데믹에 맞서는 인류에게 생각할 거리를 넉넉히 던져주었다. 언젠가 더욱 단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올 김초엽 작가에게 가슴 벅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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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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