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체어'를 보며 아는 척 넘어갔던 장면들 [드라마/예능]

글 입력 2021.08.28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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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영문학과를 맡은 최초의 여성 학과장


 

<그레이 아나토미>, <킬링 이브>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산드라 오가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로 돌아왔다. 한 대학의 영문학과에 최초의 여성 학과장으로 부임한 김지윤이 망해가는 과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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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배경이 대학교의 영문학과인 만큼 인물들의 대사에 시, 소설, 에세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낯선 이름과 제목들에 맥락을 눈치껏 유추하고 넘어가야 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중에 특히, 보는 이도 당연히 알 것처럼 작품이 소개된 두 장면이 있었는데, 오늘은 해당 장면에 등장한 작품의 작가가 누구이며, 어떤 맥락에서 드라마에 소개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영어 실력도 준수하지 못해서 깊은 맥락을 전달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으나, 해당 작품들을 여러분과 함께 짚어보고 감상해보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드라마를 먼저 본 후에 아랫글을 읽길 권한다.

  

 

*

아래부터는 드라마 <더 체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Do I dare to eat a peach?”


 

영문학과의 학생인 다프나는 교수인 빌 돕슨에게 “Do I dare to eat a peach? (감히 내가 복숭아를 먹어도 될까?)”라고 쓴 쪽지와 함께 복숭아 파이를 전한다. 돕슨 교수는 교수진 파티로 급하게 출발하다가 문 앞에서 파이를 발견한 후 그대로 파티에 가지고 간다. 동료 교수 라슨은 이 카드를 발견하자마자, “프루프록이라니… 좀 뻔한데?”라고 말하고, 빌은 난처한 기색으로 답한다. “I did not dare to eat it. (저는 감히 먹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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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나가 카드에 쓴 문장은 T.S.엘리엇이 1915년에 발표한 시 <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의 한 구절이다.

  

 

...

나는 늙어간다… 늙어간다…

바짓자락을 접어 입을까.


머리 가르마를 타볼까? 내가 감히 복숭아를 먹어볼까?

하얀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을까.

인어들이 한 명 한 명, 노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


….

I grow old ... I grow old ...

I shall wear the bottoms of my trousers rolled.*


Shall I part my hair behind?   Do I dare to eat a peach?

I shall wear white flannel trousers, and walk upon the beach.

I have heard the mermaids singing, each to each.


I do not think that they will sing to me.

  

*밑줄 친 행은 돕슨 교수와 다프나가 처음 만났을 때 한 구절씩 주고받은 부분이기도 하다.

 

 

<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의 화자는 프루프록이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으로, 외로움과 삶에 대한 지겨움이 가득한 인물이다. 자신의 삶에서결핍을 느끼고 이를 견딜 수 없어 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원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해볼까?”라고 묻기만 할 뿐,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Do I dare to eat a peach?”라는 문장에서 “peach”란, 지금까지 한 번도 벗어나지 않은 삶에서 벗어나야만 가 닿을 수 있는 새롭고, 탐스러운 영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복숭아는 먹을 때 얼굴과 손에 과즙을 흥건히 묻혀야 하므로 자신의 손이 더러워질 것을 감수하고 먹어야 하는 과일이다. 그런 복숭아를 먹는 것은 현 상태에서 벗어나 감히, 위험을 감수하려는 선택인 것이다.

 

다프나는 이 카드를 쓸 때 돕슨 교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프나의 비유에서 ‘복숭아’란 돕슨 교수, 혹은 그와의 관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슨 교수는 이 문장만으로도 돕슨에게 파이를 건넨 사람이 돕슨에게 호감을 표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고, 돕슨 역시 그가 알아차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부적절한 관계도 맺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I did not dare to eat it. (저는 감히 먹지 않았습니다)“ 라고 답한 것이다.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지윤은 수업 시간에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라는 오드리 로드의 문장을 소개한다. 오드리 로드는 미국의 시인이며, 동시에 흑인이자 커밍아웃을 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지윤이 소개한 문장은 그가 1979년에 한 학술대회에서 페미니즘에 관해 발표한 글의 제목인데, 앞뒤 맥락을 떼고 문장만 보면 다소 난해해서 해석을 찾아보았다.


오드리 로드의 페미니즘 연구에 관한 한 논문에 따르면 이 문장에서 “주인의 집”이란 차이를 지닌 존재를 배제하는 것에 그 기반을 세운 사회구조를, “주인의 도구”는 그런 사회의 지배 논리를 뜻한다.*  오드리 로드는 여성 내에서도 인종, 부, 성 지향성 등의 차이를 근거로 다시 위계를 만들고, 또 다른 소수자를 만드는 이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그는 소수인종이거나, 가난하거나, 성 소수자인 여성을 배제하는 페미니즘을 탈피해야 한다고 꼬집으며, 이러한 의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장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냐는 지윤의 질문에 한 학생은 “교내에서 일부 여성들이 여성의 편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학과나 강의에 흑인 여성 몇 명 끼워 넣고 잘한다고 추켜세우고 그걸로 끝이죠. 소수 인종 몇으로 구색 맞추는 걸로는 부족해요.”라고 답한다. 겉으로는 여성을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 인종이라는 차이를 근거로 차별을 반복하는, 결국은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이들과 같은 도구를 써서 "주인의 집"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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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가득 담긴 드라마


 

이 외에도 <더 체어>에는 에밀리 디킨슨, 하먼 멜빌 등 많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해당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감상해도 드라마의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은 분명 나름의 재미를 더해줄 것이다. 한 이야기 안에 적절히 자리잡은 다양한 문장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문학이 듬뿍 담긴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참고문헌: 박미선. (2018). 미국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의 교차성 이론과 감정 연구. 미국학, 41(1), 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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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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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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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유한리더
    • 와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주시면서 저 시에 대해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진짜 궁금했는데 너무 멋있는 해석..고맙습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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