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년필에 대한 고찰 [문화 전반]

글을 쓰는 행위의 숭고미
글 입력 2021.08.2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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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서 가장 큰 지출이라고 하면 태블릿일 것이다. COVID-19이 장기화 되면서 대학교의 수업 환경도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는데, 데스크탑과 노트북으로는 수업을 듣기 불편했다. 처음엔 교수님의 말씀을 타이핑으로 정리했는데 생각없 이 말 그대로 교수님의 말씀을 속기하고 있었다. 시험기간에 내가 쓴 파일들을 열어보면 교수님이 올려주신 수업자료랑 다를게 없었다. 공부를 한다기 보단 요약본을 열심히 만든 셈이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을 적에는 꼭 노트에다가 볼펜으로 필기를 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바, 나는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손을 움직여 받아 적지 않으면 수업내용을 귀담아듣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이핑이면 충분할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열심히 손가락으로 타자를 두드리는데 수업 내용은 뒷전으로 하고 그냥 손가락 운동만 열심히 했다.

 

그래서 태블릿을 구매했다. 펜으로 끄적이고 디지털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유용한 기기, 테블릿. 쪽 화면엔 강의를 띄우고 필기앱에 열심히 적는다. 덕분에 수업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적고 보니 장황하게 나의 소비를 합리화한 것 같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적는다’는 행위는 타이핑 보다는 역시 직접 손으로 펜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야 완성되는 것 같다. 100만 원이 넘는 기기를 사서 노트 대용으로 쓰는 건 사치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만년필 시험


 

대학교에 입학해 처음들은 전공 수업의 담당교 수님은 학계에서 잔뼈가 굵으신 노교수님이셨다. 완고하시고. 학문에 자부심이 높으신 분이셨는데, 선배들에게 요상한 소리를 들었다. 만년필로 시험 답안을 작성하면 A+을 주신다는 얘기를 말이다. 아니 누가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쓴단 말인가. 거기다가 학생 신분에서 만년필은 꽤 비싼 문구품이다. ‘그냥 좀 특이하신 분 이가보다’하고 넘겼는데, 시험 당일 만년필을 사 온 동기가 한 두명 보였다.

 

만년필을 들고 온 동기가 몇 학점을 받았는지는 잘 모른다. 쓰는 법을 잘 몰라서 버벅거리고, 잉크가 안 나온다고 짜증 내던 모습은 기억한다. 나도 만년필을 쥐어 본 적이 없어서 동기걸 빌려서 써본 적이 있는데 여간 불편 한게 아니었다. 팁을 고정된 방향으로 두지 않으면 잉크가 나오질 않았다. 나온다 해도 뚝뚝 끊기기 마련이었다. 가뜩이나 악필인 내가 쓰기엔 최악의 문구였다.

 

그 후로는 만년필은 그냥 ‘학문에 조예가 깊은’, 혹은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쓰는 사치품으로 여겼다. 아니면 진짜 ‘글자’나 ‘무언가를 그리는’ 직업을 하시는 분들이 쓰는 도구 정도. 내가 저명한 사람이 돼서 사인을 하거나 멋진 수트를 입고 계약서에 서명할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평생 만년필을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지금도 만년필은 안 쓰고 있고.

   

 

 

몽블랑 만년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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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B No.80, Montblanc]

 

 

매거진B(Magazine B)는 브랜드의 성공비결, 브랜드를 애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잡지다. 매 호마다 한 브랜드에 집중하여 회사의 가치와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가치를 어필하는 방법, 소비자들이 해당 브랜드를 구매하는 이유 등 다채로운 내용들을 담는다. 나도 여유가 생기면 한 부씩 사서 읽는데, 일부러 명품 브랜드는 피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 쳐다도 안 본다는 심보 때문이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야 사는 잡지인데, 굳이 명품 브랜드의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았다.

 

몽블랑(Montblanc) 편은 생일날 선물을 받아서 읽었다. 대학생들에게 몽블랑은 지갑으로 더 유명하다. 적당한 가격에 명품 축에 속하고, 튀지 않으면서 단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지갑으론 몽블랑이 더할 나위 없다. 다른 명품 브랜드에 비해 심심할지는 몰라도 어느 것에나 어울린다. 물론 지갑으로라도 몽블랑을 써 본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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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이 본래 만년필 회사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만년필은 내 소비 리스트에 들 턱이 없는 사치품이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만년필 사진이 가득했다. ‘음, 명품 사치품이군.’ 사진을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다. 아무리 명품이라지만, 만년필을 살 돈으로 평생 입을 옷 한 벌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초반부엔 만년필을 만드는 회사를 취재한 내용이 나온다. 몽블랑의 만년필은 제작 전반적인 과정에 사람의 손길이 필수적이다. 시계만큼이나 섬세한 부품이 들어가는 제품이기 때문에 장인의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만년필의 닙을 만드는 과정은 정교한 기계가 한다 해도, 닙의 팁은 사람이 손수 만든다. 용접부터 음각, 검수, 세공까지, 숙련된 전문가들이 관리한다. 여러모로 만년필은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도구다.

 

 

 

필기와 도구 그리고 만년필



몽블랑이란 브랜드의 뿌리는 만년필이다. 가죽, 벨트, 가방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지만 그들의 시작은 만년필에 있다. 타이핑하거나, 태블릿으로 글자를 만들 수 있음에도 그들이 만년필을 생산하는 이유는 납득이 된다. 몽블랑의 정체성 그 자체니까. 그런데도 소비자 입장에선 ‘굳이’ 만년필을 써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Director of Category Management with Writing Culture’라는 특이한 직함을 가진 몽블랑 관계자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쓰기’가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로도 만년필을 쓸 때는 명상하는 기분이에요(...) 만년필은 필기를 존중하게 만들죠. 쓰기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 요즘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에 메모해도 뭔가 남지 않잖아요. 다 인스턴트예요. 반면 시간을 들여 손으로 글씨를 쓰면 사라지지 않는게 남습니다.’ - Alessandra Elia
 

 

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공들여 글을 쓰고 싶을 땐 꼭 종이에 펜으로 차분히 떠 오른 것들을 정리한다. 머릿 속에 있는 생각을 구현화 하는 건 타자 위로 움직이는 내 손가락 끝이 아니라 손에 쥔 도구의 끝이었다. 쓰는 것에 익숙했었는데, 도구를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그 일련의 과정을 조금 귀찮게 여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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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썼던 일제샤프. 손 때를 타서 칠이 다 벗겨졌다]

 

 

고3 때 산 필통엔 필기구들이 가득하다. 때가 타고 칠이 벗겨진 일제 샤프도 그 중 하나인데, 무언가를 써야 할 땐 굳이 그걸 꺼내서 쓴다. 글씨가 예쁘게 써지는 것도 아닌데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 그때 치열하게 무언가를 적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도 그 샤프를 들고 가서 힘든 이야기들을 조그마한 다이어리에 적곤 했다.

 

태블릿 펜도 좋은 도구다. 하지만 애착이 가질 않는다. 누군가도 이걸 쓸 거라는 생각이 들면 별로 특별한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필기김과 안전성’은 디지털 도구의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디지털 도구들은 주인의 습관 때문에 변형이 생기는 필기 도구에 비하면 친밀감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년필은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년필은 오직 무언가를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대 도구들이 갖추지 못한 쓰기의 정수, 아날로그 향수가 집약되어있다. 쓰는 것도 영 불편하고 막 들고 다니기 망설여지는 비싼 물건이지만, 무언가를 쓰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최고의 도구다. 과거에도 만년필로 무언가를 적는 다는 행위는 꽤 정성을 들인 일로 여겨졌는데, 스마트폰으로 쉽게 활자를 전송하는 요즘 시대에는 그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질 것이 아닌가?

 

 

 

만년필 하나 있는가?



노교수님의 ‘만년필 시험’ 에피소드는 사실여 부를 알 수 없지만, 교수님께서 ‘만년필 하나 있는가’ 라고 여쭤보신 적이 있다. 없다고 말씀드리자 불같이 화를 내셨었는데, 그때는 ‘역시 특이하신 분’ 하고 넘겼다.

 

‘만년필 하나 있는가’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교수님께선 문장력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본인께서 쓰신 교재를 읽어보면 내용이 장황하더라도 쉽게 읽혔다. 교수이기 전에 문장가셨다. 아마 본인께선, 깊게 생각하고, 자신의 사색을 글로 새긴 적이 있는지, 여쭤보신 게 아닐까. 사라지지 않을 활자로 치열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고.

 

 
[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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