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섬세한 붓터치 끝에 서린 빛 -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전시]

빛이 머무는 자리에 살포시 앉아보았다
글 입력 2021.08.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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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부서지는 바다 물결

푸르른 녹음이 진 나무

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는 커튼까지

아, 여름이다.

 

 
전시 포스터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멍하니 바라만 봐도 청량해지고 편안해지는 그림을 보고 싶었고, 그중 앨리스 달튼 브라운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온라인상으로 전시 포스터를 봤을 때는 어느 풍경 좋은 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전시 설명문을 보고 나서 알았다. 사진이 아닌 실제로 그린 그림이었음을.
 
*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영어로는, Alice Dalton Brown- When the Light Breathes

 

지난 50여 년간 빛을 주제로 섬세한 붓 터치를 선보인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약 90일간 작가 인생 최초로 회고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이아트뮤지엄 커미션으로 제작한 신작 3점을 포함해 2-3미터 크기의 대형 유화 및 파스텔화 등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80여 점이 소개된다.

 

제목만으로도 ‘빛’을 주제로 한 전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에서 쓰인 단어가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머문다’와 ‘숨 쉰다’. 전자가 주는 느낌은 정적이고 차분하다. 반면, 후자는 ‘머문다’는 단어보다 역동적이고 생생하고 활기차게 느껴진다.

 

단어의 의미 차이는 직접 작품을 보고 느낀 관람객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머문다’라는 표현이 직관적으로 와닿을 수도, 아니면 ‘숨 쉰다’라는 표현이 더 은유적으로 더 와닿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빛이 숨 쉴 때’라는 영어 제목이 작품에 숨을 불어 넣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실제로 작가의 한 작품을 오래 가까이서 보았다 한 발짝 멀리서 보았다를 반복하면 여러 시선으로부터 바라본 빛이 생생히 살아나는데, 이때 ‘빛이 숨 쉬고 있는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전시는 빛을 차분함과 생생함, 이 두 가지 이미지를 담아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전시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전시는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화풍을 키워드로 나누어 전개한다.

 

1부. 빛과 그림자

2부. 집으로의 초대

3부. 여름 바람

4부. 이탈리아의 정취

 

 

성인이 되어서야 돌이켜보니 이타카는 도시 자체로서 의미가 있었다.

이타카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항상 흐리다.

그래서 이따금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이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다.

이타카의 태양은 구름 사이로 오후에야 가장 밝게 빛나는데,

그 금빛 햇살로 긴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

 


구름이 많이 끼는 이타카의 느지막이 뜨는 햇빛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그림자는 작가의 큰 예술적 영감이 되었다. 1970년에는 당시 예술계를 평정하던 뉴욕 중심부로 이사하면서 소호의 여러 갤러리에 전시된 포토리얼리즘 작품을 접했고 지금의 극사실주의 화풍을 확립하였다.

 

1부 ‘빛과 그림자’에서는 1960년~78년 초기작을 선보인다. 대개 건물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농장과 헛간을 정밀한 기법으로 작업하였고 이 시기에 건물 외벽에 묘사된 빛의 흐름을 쫓았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같은 공간에 있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도 대상의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밖의 풍경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도 각기 다른 모양새로 그려냈고, 그림자의 흔적을 통해 어느 쪽에서 빛이 비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한 땀 한 땀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붓 터치를 괜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됐다.


2부 ‘집으로의 초대’에서는 1979~90년대 후반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건물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탐구하던 앨리스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서양식 현관인 ‘포치 porch’와 대문, 창문 등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장면을 그렸다. 이중 붉은 벽을 배경으로 한 집에서의 색의 대비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3) 어룽거리는 분홍빛, My Dappled Pink.jpg

어룽거리는 분홍빛, My Dappled Pink

©Alice Dalton Brown

 

 

마음에 들었던 작품 중 하나다. 캔버스의 반은 주택의 분홍빛 벽이고, 나머지 반은 여러 모양을 띄는 풀들이 가득하다. 이것이야말로 인공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가 반반 한데 공존하는 모습으로 묘한 조화로움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품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어룽거리다’라는 표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룽거리다: 뚜렷하지 아니하고 흐리게 어른거리다.’ 분홍빛이 어룽거린다니. 빛과 그림자의 흔적을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다. 작품의 제목에 쓰인 단어 덕분인지 분홍 벽에 서린 빛의 어룽거림이 제법 생생히 살아났다.

 

한편, 작품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다른 곳은 반질반질하지만 유독 입사귀가 모인 곳들은 유화 자국이 조금씩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짝씩 뭉친 부분에서 붓 터치를 몇 번이나 덧대어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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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휴식처

©Alice Dalton Brown

(*Press의 권한으로 사진 촬영 허락을 받은 사진입니다.)

 

 

흰 벽과 기둥 사이로 스며든 빛. 우거진 숲을 통과한 빛은 다양한 색을 그려낸다. 푸르른 빛과 따뜻한 주황빛 핑크빛. 특히 지붕에는 건물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가 지붕까지 뻗어낸 자리 곳곳에는 핑크빛이 감돈다. 빛을 포근히 감싸 안은 듯 현관에는 따스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흰색 건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아마 빛을 가득 머금었을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껏 다채로운 빛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기둥의 모서리에 꺾이는 부분은 굴절되어 그림자의 채도와 명암이 조금씩 다른데, 여기서 진하고 옅은 정도에 따라 빛의 강세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새삼 집의 구조가 이렇게나 세심하게 각져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훨씬 더 입체적이고 공간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오래 보다 보면 장소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도 든다.

 

3부 ‘여름 바람’에서는 2000년대부터 그려온 대표작 여름 바람 시리즈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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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로 들어가는 길목, 커튼이 있다

 

 

1994년 뉴욕 롱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친구의 집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을 마주하고 그 풍경에 매료된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커튼이 창가에 바람이 휘날리는 장면이 담긴다. 필요하다면 건물의 구조와 식물이 잘 보이도록 불필요한 가구를 제거한 상태로 깔끔하게 그림을 그렸다.

 

 

8) 여름 바람, Summer Breeze.jpg

여름 바람, Summer Breeze

©Alice Dalton Brown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다. 집 안에 배치되어 있던 가구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여 깔끔한 창가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여름 바람 시리즈 중에 이 작품만 실제 풍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바람에 살랑이는 순간을 포착한 듯 커튼이 살짝 붕 떠 있다. 그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물, 식물, 산이 보인다. 회색빛 벽에는 창과 휘날리는 커튼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긴다. 여름 바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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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 물든 날, Long Golden Day

©Alice Dalton Brown

 

 

커튼이 걸린 베란다와 카유가 호수를 합성해 진짜로 존재하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새로운 풍경을 탄생시켰다. 황혼,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또는 그때의 어스름한 빛을 의미한다. 완전히 해가 지고 나서도 미련 넘치지만 끝까지 아름다움은 놓지 않으려는 빛의 끈끈한 잔해가 느껴진다. 그 어스름한 빛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단연 가장 마음에 와닿는 작품이었다.

 

마루는 얼마나 반질한지 그 위에 커튼의 모습이 살짝 비치고, 커튼에는 바람 따라 접힌 결대로 그림자가 서려있다. 커튼의 하단에는 보이지 않지만 줄기와 꽃 모양 그림자를 통해 바로 뒤편에 식물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호수 가운데에서는 잔잔히 물결이 일고 있다. 황혼은 어찌나 강렬하던지 물이 하얗게 조각조각 나서 부서지고 있다.

 

어쩌면 빛을 통해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이렇게 황혼에 물든 풍경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얀 천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황혼빛이 고스란히 물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빛이 주는 또 다른 풍경인 셈이다. 쉬어가는 자리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작품을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아주 잠시 그림 속 커튼처럼 나도 황혼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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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 빛, Lifting Light

©Alice Dalton Brown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신작, <정적인 순간> <설렘> <차오르는 빛>.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락된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신작들이다. 가장 최근에 제작된 시리즈인 만큼 작가가 탐구하는 작품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사실 앞서 <여름 바람> 작품을 보고 나서부터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 일렁이는 물결, 마룻바닥, 보이지 않지만 커튼 뒤편에 있는 나무 그림자까지.

 

다른 점이 있다면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운다는 것이다. 오롯이 세 작품을 보다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특별 장치이다. 나의 경우, 세 작품 중 <차오르는 빛>을 보며 파도 소리를 감상했다. 양쪽 좌우로 커튼 두 자락이 펄럭이고 그 사이로 빛이 들이닥친다. 빛이 담긴 가장 극적이고 찬란한 순간을 맛볼 수 있다. 잠시 시간을 가지고 세 작품을 두루 둘러보며 여름 빛, 바람, 파도에 잠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4부 ‘이탈리아의 정취’에서는 2015년 로마 아메리칸 아카데미의 레지던시 작가로 초청받아 이탈리아의 색감이 잘 반영된 연작 스무 점을 파스텔로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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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의 권한으로 사진 촬영 허락을 받은 사진입니다.

 

 

대개 창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나무, 그림자가 서린 지붕과 옆 건물 벽까지. 그래서인지 그림 액자 자체가 마치 창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끝으로는 그녀의 작업 과정이 궁금해졌다. 같은 공간의 풍경을 어떻게, 어느 각도에서, 얼마나 오래 바라보는지, 그녀가 처음 빛과 그림자의 흔적이 있는 풍경을 포착하고 나서부터 그림에 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작품 옆에 쓰여 있는 설명의 글씨가 너무 작았다는 점이다. 전시의 특성상 오롯이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핀 조명에 기댄 작품이 많았다. 그렇기에 어두운 공간 아래서 작품 옆에 쓰인 작은 설명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많은 관람자들이 이 작은 해설을 들여다보겠다고 몸의 체중을 앞으로 실어 모일 정도였다. 이 점은 정말 아쉬웠다.

 

덧붙여, 한 가지 팁을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지니 뮤직과의 콜라보를 통해 자연의 소리와 함께 여름 호숫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보다 공감각적인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 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르며 한 곡씩 재생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음악을 배경 삼아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것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잠깐 자리에 앉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주목한 빛이 머문 자리에 살포시 앉아 감상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한 땀 한 땀 그의 섬세한 붓 터치로 서린 빛이 머문 자리에 차분히 머물다 보면 다시 생생히 살아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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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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