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를 나이게, 너를 너이게 하는 것은 - 산책하는 침략자

글 입력 2021.08.15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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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해안가의 작은 항구 마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져 매일 같이 미군 기지의 전투기 소리에 불안감이 고조된 그곳에서 3일간 실종되었다 돌아온 남편 '신지'는 아내 '나루미'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 할머니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마을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 돌며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지는 그저 매일 어슬렁거리며 산책만 하고 있다. 그런 신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루미. 그러던 어느 날, 신지는 나루미에게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는데...


"실은 나, 외계인이야."

 

 

 

인간이란 무엇인가, 끝나지 않는 질문


 

예술은, 그리고 연극은 인간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 정답이 없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작은 샛길이라도 내보려는 움직임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 옆에 인간을 나란히 세워보는 것이다. 수많은 SF 작품이 지금의 인간과는 멀리 떨어진 시공간을 배경으로 로봇이나 외계인, 인조인간 등을 다루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이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역시 어쩐지 연극 무대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내세우지만, 결국 묻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한 노력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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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옥상훈


 

극중 외계인의 존재가 드러내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인간은 외부에서 습득한 경험으로 수많은 '개념'을 형성하며 살아가며, 그 개념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한 사람을 이루는 수많은 개념 중 하나라도 빠지면 예전의 그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극중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나루미의 언니 아스미는 본래 가족에게 정이 많았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이후 같이 사는 엄마를 내쫓으려 할 만큼 다른 사람이 된다. 일을 그만두고 백수로 살아가며 전쟁을 그저 지루한 일상의 자극제쯤으로 여기던 세이치는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긴 후 반전주의자가 되어 반전운동을 하러 다닌다.

 

 

 

그래도 신지가 신지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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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옥상훈

 

 

외계인에게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이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면, 외계인 그 자체인 신지는 말할 것도 없다.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외계인에게 자신의 뇌를 내어주기 전에 그다지 좋지 않은 남편이었을 신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축제날, 즉 외계인에게 뇌를 내어준 이후 나오미에게만큼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런 신지를 나오미는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그건 신지가 아니라 신지의 몸을 가진 다른 존재라고 믿는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고 묻는 나루미에게 신지는 뜻밖에도 자신은 신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지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신지의 존재는 인간이 수많은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합되어 생각을 만들고 행동으로 표출되는지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신지는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서 개념을 가져왔지만 그것들이 합쳐져 나오는 말과 행동은 카세 신지라는 고유한 필터를 거친 결과다.

 

한편, '소유'라는 개념을 잃고 사슬에서 해방되었다며 반전 운동을 하러 다니는 세이치를 보고 그의 후배 와타루는 처음에는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이내 자유로워 보이는 그를 부러워하며 신지에게 자신도 해방시켜 달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에게서 같은 개념을 빼앗아 간다 해도 그가 세이치처럼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소유'라는 개념은 비슷할지라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이치의 주장대로 세계 평화를 위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는다 해도 세계 평화가 온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신지가 지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빼앗은 개념은 사랑이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아니라 나루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배우고 체화하는 개념의 종류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우리가 이렇게 고유한 존재인 것은 그 때문이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정말 외계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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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옥상훈


 

산책하는 침략자라니. 처음 봤을 때 궁금할 수밖에 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극을 보기 전에는 제목이 무언가의 은유인 줄 알았지만 다 보고 나니 연극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정직한 제목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극중 "'외계인'은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서 그 단어를 좋아한다"며 웃던 외계인의 대사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혼란한 배경을 보며, 이 근사한 제목을 어떤 은유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멋대로 생각해보았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켰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산책하는 침략자>의 외계인은 무엇일까?


사람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더 이상 무력만이 아니다. 21세기의 침략자는 정말로 '산책을 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산책하는 침략자'인 신지를 보며 종교와 예술, 범람하는 정보와 폭발적으로 늘어난 미디어 등이 떠올랐다. 나루미는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신지에게 묻지만 그는 그저 산책했다고 대답할 뿐이고, 실제도로 그렇다.

 

우리는 개념을 빼앗아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는 '침략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가족에게 매몰차게 변한 아스미의 경우를 보면 그를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반전주의자가 된 세이치, 다정한 남편이 된 신지를 생각하면 쉽게 답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또 변하길 요구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이 외계인과 마주친다. 새로운 내가 되는 것과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의 경계는 모호해 보인다.

 

'인간'이라는 개념도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산책하는 침략자>가 던지는 질문은 점점 더 답하기 어려워진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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