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행위자가 없는 시대에 박힌 니체의 독설 - 도서 '도덕의 계보'

글 입력 2021.07.2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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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나친 부도, 가난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명령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열정 대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대단한 만족감 대신 몇 걸음 떨어져 나만의 작은 동굴을 꾸미는 것에 몰두한다.


들끓는 욕구와 압도하려는 욕망, 강력하고 의기양양함은 행위의 주체를 잃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그것들은 집단으로 대리 소비된다. 행위가 존재하는데 진정한 행위의 주체가 없다는 점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매체의 발달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이제 매체를 통해 우리는 남의 먹는 행위를 대리 소비하고, 인스타그램의 작은 틀에서 비치는 것들을 열망하고 그것들을 원망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동경하면서 박탈감을 느끼며, 끔찍한 것들을 동정하면서 음험한 관음증적 욕구를 채운다.


초기 인터넷 연구자들은 매체의 발달이 자유로운 의견개진,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의견을 가지는 것에 실패했다. 다양해 보이지만 철저하게 구분되고 파편화된 커뮤니티 속에서 의견은 동질화된다. 끊임없이 논쟁이 발생하지만, 개중 그 자신의 의견에 관한 회의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현대인 중 하나로서, 현대인의 왜소화와 평균화가 물질적으로 풍부한 시대의 결과만은 아니라고 대변할 수 있다. 고정 수입은 힘을 잃었고, 자본주의는 양적완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앞서 내가 쓴 것들은 오늘 리뷰할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드러난 니체의 의도를 지워버린 다음 내가 제멋대로 현대사회에서 느끼고 공감했던 문장들을 변형한 것들이다. 이 책에서 메두사는 그리스도교이지만, 내가 쓴 위에서 메두사는 길들여진 인간사회에 드리운 다수의 시선이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당대 유럽인들이 점점 더 천박하게 되고, 더 선량하게 되고, 더 영리하게 되고, 더 사람들에게 편한 존재가 되고, 더 범용하게 되고, 더 하찮은 것이 되고, 더 그리스도교적으로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니체의 독설은 어딘가 오늘날에도 유효타를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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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는 전통 도덕론을 비판하는 니체의 논문집 중 하나다. 먼저 철학에 적당한 관심을 둔 개인으로서 니체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정말로 이번에 읽은 이 책이 나에게는 무척 니체다웠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니체의 철학을 쉽게 풀어본 책을 읽은 적은 있어도, 그의 책을 자세히 읽은 적 없다.


내가 그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서재에도 그 스스로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고 자부하는 '차라투스라는 말했다'가 몇 년째 먼지를 털지 못한 상태로 꽂혀있다. 니체 철학을 쉽게 풀어쓴 책에 큰 감동을 하고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어 고등학생 때 산 것이다.


변명하자면, 그 책은 내 읽기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책을 쉽게 읽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반은 허풍쟁이고, 나머지 반은 책 읽기의 천재거나, 성경을 비롯해 온갖 책을 씹어먹은 진정한 변태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쉽게 읽지 못했고, 쉽게 읽기 위한 두 조건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리뷰는 수박의 과육이 아니라, 껍데기 맛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니체의 책이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내용 자체의 난해함은 둘째치고, 니체 특유의 문체가 읽기를 방해한다. 니체는 다양한 문헌에서 구절을 빌려 올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장엄한 어조로 글을 전개해나간다. 이러한 니체의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기대되는 글쓰기-최소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논문의 형식-와는 동떨어져 있다. 이러한 방식은 친절하지도 않고,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오롯이 읽는 것 이상의 지식이 필요했다.


이번에 리뷰하는 도서, '도덕의 계보'도 그렇다. 니체는 친절하게 개념을 정의하고, 그러한 개념들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선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아카넷에서 새로 출판된 도덕의 계보는 그 의미가 깊다. 번역가는 국내에 이미 7종의 번역본이 출판되었지만, 기존의 번역본들이 부자연스러운 번역과 오역 때문에 니체를 연구한 역자 자신도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이번 번역서는 니체가 말하려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번역자는 다양한 문헌을 각주에 달아 이해할 수 있게하고, 책의 끝에는 요약과 해설을 삽입하였다. 독자로서는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읽으면서 역자가 달아놓은 주석은 난해한 니체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번역자가 명료하게 니체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하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큰 도전이었다.


따라서 나도 이 책에 관심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읽으면서 도움을 받았던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굳이 이러한 내용을 넣는 이유는, 이 책들이 마치 하나의 잘 짜인 서사시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였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래 소개할 두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도덕의 계보'의 의미와 이 책에서 전복시키고자 하는 노예도덕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데카르트의 '성찰'은 서양 철학의 기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코기토를 통해 신의 현존을 기반으로 진리 판단의 기준에 의한 참 거짓의 기준을 설명한다. 이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그와 대조적으로 근거율에 독자적인 것, 개별적이나 분리된 것은 결코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쇼펜하우어는 데카르트가 모든 것에 원인이 있음을 인정했으나, 그의 존재론적 증명은 단순한 분석판단을 매개로 얻어진 논리적 진리에 의존할 뿐이며, 인식근거를 주어진 개념 속에서 찾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와 같은 자기원인은 영원한 인과의 사슬을 끊을 수 있지만, 원인을 인식근거로 대체함으로써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이어 오늘 리뷰할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한다. 쇼펜하우어는 원인학적 설명이 끝나는 부분에서 형이상학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즉, 외부 대상의 인식, 표상의 방법으로는 사물의 내적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내부를 통한 방법을 선택했고, 사물 자체인 의지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다른 것과 투쟁함으로써 의미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한다. 삶에의 맹목적 의지는 언제나 허기져있으며, 인식은 의지에 봉사하고 의지의 목표를 달성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식 맹목적 의지의 노예인 인간은 끊임없이 의욕 하면서 최종적인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가져오는 고통의 바다라고 보는 견해나 동정심을 강조한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니체는 삶을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삶의 원동력, '힘에의 의지'를 긍정한다. 따라서 그는 동정을 도덕의 기초로 본 쇼펜하우어가 삶을 부정하고, 그 자신조차 부정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도덕의 계보'는 기존 도덕이론에 대해 꼬집는 논쟁서다. 그 이름에 맞게, 그는 도덕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도덕적 가치는 어떻게 발생 했는지를 추적해나간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도덕관이 노예도덕이라고 꼬집으며, 음험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목소리가 아닌 그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을 내가 읽은 방식으로 투박하게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도덕적 편견을 발견하고, 주권적 개인으로서 지치지 않고 삶을 이끌어나가라고 소리높여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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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저자의 서문과 세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최대한 압축하여 이야기한 부분으로, 그가 왜 이러한 도발적인 책을 출판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둔다. 서문에서 그는 도덕적 편견의 기원에 관심을 두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 서양 철학을 지배해왔던 이성 중심의 도덕관을 비판한다.


세 논문은 촘촘하게 짜여있다기보다, 전혀 다른 논리로 독립적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어떤 원한과 무기력에 의한 도덕이 아닌, 선악 저편에 있는 삶에 대한 긍정과 힘, 주체의식에 의한 도덕적 주체의 각성을 강조한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양심의 가책에 대해 논의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맥락이 도덕과 연결이 되며,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한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이 준 양심이 우리의 죄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양심의 가책'이 음험한 세력의 권력장악 결과라고 판단한다. 마지막 세 번째 논문에서는 사제적 이상의 결과인 금욕 주의적 이상이 무에의 의지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이 삶을 규제하고, 삶을 빈곤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본 리뷰는 니체의 책을 분석하기보다는, 내 관점에서 리뷰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리뷰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선과 악을 논의한 첫번째 논문이 그러했다. 개인적인 배경을 조금 노출하자면, 나는 언제나 도덕적 판단과 그에 따른 잔인한 형벌을 즐겨왔다. 대학 시절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었기도 말이다.


니체가 예수를 긍정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그 단어가 삶을 긍정한 주인의 문법이었겠지만, 나는 맹세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약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바라왔다. 니체와 달리 부모님이 그리스도교적 철학에 심취해서만은 아니다. 이 책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도덕관이지만, 그의 말은 비열하고 나약한 누군가의 명치를 뚫을 만하다.


첫 번째 논문에서 니체는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구분한다. 선한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선악의 판단은 노예도덕과 관련이 있다. 신분제도가 철폐된 현대 사회에서 노예는 계급적 노예가 아니라, 비겁하고 연약한 존재를 의미한다. 노예도덕에서 선은 약자를 돕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선은 약자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용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노예적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약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인도덕에서의 좋음은 용기나 지혜 등에서 탁월함을 느낀다. 노예도덕에서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지만, 주인도덕에서 나쁨은 비겁하고 어리석은 것을 의미한다. 노예들은 이러한 주인들에게 원한을 가진다. 노예들은 주인에게 대항할 용기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예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반해, 주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지배하고 싶어하는 악한 자들이기에 자신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노예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선하기 때문에 지배받는다고 자신을 스스로 기만한다.


주인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불행을 그 자신에게 귀인 한다. 따라서 노예도덕은 고귀하고 강력한 자, 신을 부정하는 자들을 저주함으로써 성립한다. 즉, 노예도덕은 지배자와 권력자에 대항한 원한의 결과다. 니체는 약한 사람이 약하게 행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기만하는 것을 비난한다. 기만은 인간을 성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예도덕이 만연한 사회는 기만하고, 무기력하게 된다.


니체는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 가치판단을 할 수 있고 끊임없는 욕구들의 긴장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고귀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니체 철학이 이기주의적 철학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선과 악의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타자를 승인할 수 있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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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스스로를 뒤돌아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스스로를 길들여왔다는 진화심리학자의 분석과, 도덕적 직관을 입증한 도덕 심리학자의 분석, 감정이란 자기주지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인지심리학자의 분석이 떠올랐다. 이는 분명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이야기한 의지철학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교을 추앙한 일부 사람들의 음험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분히 의도와 단순한 표상의 연결로 왜곡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르지만, 앞서 내가 기술했듯 기술 발달과 문화의 성장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의 근거는 오늘날에 더 입증되고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활기있는 삶에 대한 강조는 현대에 와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무엇이 되었건, 우리는 '워라밸'의 시대를 살고 있다-이제는 그 조차도 오래된 말이지만 말이다-. 그러한 삶의 지향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힐링을 강조하고 나만의 삶을 찾으라는 말 뒤에 드리운 어둠이 없다고는 확신하지 못할 뿐이다. 점점 더 소박해지는 문화들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많다.


이 글을 쓰는 나만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 방관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그러한 사람이기에, 그러한 것들만을 잡아낸다. 미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나, 그것들을 책임지고 헤쳐나갈 용기가 없는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소박한 삶을 자조하면서 영위한다.


행위만 둥둥 떠다니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가끔 니체가 부활한다면 고혈압으로 다시 죽진 않았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수많은 화면에서 행위는 소비되지만 정작 그 행위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의 문화는 니체의 관점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행위의 주체가 되고, 삶을 긍정하라는 그의 철학은 이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멋진 이야기를 하는 책이지만, 나약한 정신에 대해 니체가 꽂는 피끓는 비판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만은 아니다(일단 그의 분류적 표현 방식은 그냥 하나의 비유로 넘어가고자 한다.). 이건 변명만은 아니고, 최근에 찾은 헤밍웨이의 얼굴이 아른거려서이다. 내가 아닌 것들의 목소리를 빌려 그 자신을 기만하는 것을 비판하는 그의 말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끊임없이 주인으로서 삶만이 초인적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삶에서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모호한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의식과 의지는 효율적인 왜곡과 편견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한 착각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만, 태양에서 내리쬐는 햇볕만큼 분명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솔직히 그의 책을 하나만 읽은 나로서는 그가 주장하는 인간의 활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종합하면, 나에게 니체의 철학은 온전한 답이 아니었지만, 삶의 원동력을 회복하라는 이야기는 묘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렵지만 특유의 글솜씨와 독특한 전개과정은 느리지만 아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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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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