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12. 미술 한 잔 하실래요?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예술과 함께하고 있는 걸까요?
글 입력 2021.07.0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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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노트 Sigak] 12. “미술 한 잔 하실래요?” (1)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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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을 나른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다시 슬슬 지루해질 즈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잔을 잡을 때마다 손이 젖는 미미한 번거로움을 느끼며, 아까부터 줄곧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봐요?”

 

 

- ‘예술적’이란 단어를 검색해봤어요. 제가 생각하는 ‘예술적이야’라는 말의 의미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음, 그 자체로 이미 ‘예술적'이네요.


- 왜요?


- 의미가 쓰이고 읽히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니까요.


- 그럼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적’이란 말의 의미인 거네요.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야말로 자신의 관점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사족이지만, 그런 단순한 연상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한 번 고민스러워지면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해하다 결국 제 답은 잊을 때가 많아서요. 지금도 봐요. 제가 떠올린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의견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잖아요. 물론 필요한 과정이에요.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주변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좀 부정적으로 강박적이에요. 다른 의견은 들으면서, 내 의견은 잃고 마는.


그러고선 별 수 없다며 띄워둔 화면을 모두 닫고 잠금 버튼까지 누르는 그였다. ‘탁-' 핸드폰을 내려놓는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선명하게 울렸는데. 부리고 싶은 투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애써 차분해지려고 노력한’ 손길이 그 찰나에 느껴졌다.

 

 

- 그저 좋다는 의미의 ‘예술적’, 보기에 아름답다는 의미로 쓰이는 ‘예술적’. 감각적이거나 기술적으로 세밀하다는 것에서 우러나오는 의미로서의 ‘예술적’. 평범한 것과는 달리 마치 예술 작품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예술적’. 고정관념적인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예술적’ 등등. 막상 살펴보니 정말 많았어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예술적’이란 표현을 가져온 것이 조금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들었어요. 저는 정말 소소하고 단순한 의미로 ‘예술적’이란 말을 꺼냈거든요.


- 음. 이제 선택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 어떤 관점을 취할 건지.



그는 다른 이에게 말한 것을 자신에게도 너그럽게 말할 수 있는 법을 좀 알아야 한다. 남들에겐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자신에게는 강박적인 편이다. 아마 그래서 미술이 좋은 동시에 너무 어려운 사람. 미술에 대한 애증이 맞물린 초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저는 미술이 좋은 것 같아요.”



- 좋아요. 우리의 관점으로 돌아와요. 진토닉 얘기요. 왜 이 한 잔이 우리에게 예술적이었던 걸까요. 지금 이 순간도요.


- 맛있어서? 특별해서? 적어도 그래서 감탄한 게 아닐까요.



진토닉, 제가 방구석에서 나름대로 만들어서 마실 수 있어요. 잔에 얼음, 토닉, 레몬, 진을 넣어서요. 그런데 이런 공간에서 저 바텐더가 세심히 준비한 것으로 받으니 예술인 것 같아요. 지금이 더 감각적이고 어떤 감흥이 일고요.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그렇고. 혼자 마시는 방구석의 것과는 분명 달라요. 단순하게 말하면 저는 지금이 더 좋아요.



- 방에서 만들어 마시는 것과 전문가가 만들어주는 건 다르니까요. 맛이나 경험뿐만 아니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바텐더의 노력이나 정성, 그리고 그에 얽힌 크고 작은 것들... 방금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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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느낀다-라. 맞아요.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있지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나로서의 경험과 기분으로 이 한 잔이 어떠한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맛있다고, 이런 부분이 느껴지는 게 좋다고 말이에요. 한편, 보다 관심 어린 관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도 있고요. 진토닉을 다양하게 마셔본 사람이라면 더 구체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이 진토닉이 어떻게 맛있는지, 무엇이 달라 특별한지, 이 한 잔을 위해 바텐더가 어떤 노력과 시도를 했는지 더 자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더 나아가 그것을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요. 자신의 경험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걸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 네? 어, 아마도요? 그런데 결국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다만 제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자신이 없어요.



가끔 그의 모호한 말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곤 한다. 몇 번 나눈 대화의 덕을 이제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가 사람을 보는 관점인 것이다. 콕 집어 얘기하진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신의 경험을 알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 우리의 삶은 그런 다름을, 한곳에서 피어날 수 있는 다채로움을 이해하는 것에서 조금 더 풍성해지니까요. 더 다양한 의미나 빛깔 따위의 것을 발견하고 머금으면서요. 음, 저도 누구나의 흔한 바람처럼, 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해요. 이왕 사는 거 더 즐겁기를 바라고요. 욕심을 낸다면, 더 많은 걸 보았으면 하고. 모르던 걸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고. 뭐. 그저 그런 작은 깨달음과 사건들로 제가 한 뼘씩 넓어지는 거요. 아마 저는 미술이 제게 그런 것이 되었으면 했나 봐요.



아 뭐예요. 대화가 갑자기 진지해졌잖아요. 괜히 머쓱해지게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말을 조금 더 꺼낸 건 본인이면서. 뭐 대뜸 그런 질문을 한 내 잘못도 있는 건가. 어딘가는 억울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 예술가 같은 바텐더. 그 바텐더의 오랜 시도와 연구 끝에 완성된 진토닉. 그러기에 한 잔의 작품이라 불려도 될 만큼의 것. 아는 거라곤 “진토닉은 진, 레몬, 토닉으로 만들어진다”여서, 그걸 따라 얼렁뚱땅 만든 진토닉. 혼자 마시는 한 잔이랑 누군가와 대화하며 마시는 한 잔. 내게는 맛있는 한 잔이랑 아무리 먹어도 맛없는 한 잔. 대단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저 한 사람으로서 우린 이 모든 걸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리고 보고 느낄수록,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각자의 나름대로 더 섬세하고 깊어질 거고요. 그래서 모두 진토닉이라 불리지만 결국 그 모두가 다른 결을 지닐 수밖에 없어요.


- 네. 그렇죠.


- 사람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같은 것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 존재. 그런 사람이 창조하는 게 예술이라니까요. 예술은 그런 거예요.



다시 대화가 멈췄다. 같은 것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창조하는 예술. 문득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 - 이런 게 떠올라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러다간 오늘 중에 집에 돌아가기는 어렵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한편으론 그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 어려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한 우리이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늘 뱅뱅 맴도니까. 질문은 속으로 삼키고,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참, 예술이네요” 갑자기 떨어진 말에, 잠시 낀 여백과 그 사이에 돌아가던 내 사고 회로도 멈춰 섰다.



- 저는 정말 맛있는 걸 먹을 때 “예술이다”라는 말을 써요. 아마 그게 가장 일상적이고 자주 쓰는 방식의 ‘예술이야!’ 같아요.



그런 기분과 그런 마음으로 기대하던 것을 입에 넣었더니 정말 좋아서. 기대를 넘어서서. 아님 뭐랄까요.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그런 감동에 외치는 것 같아요. 기분이 나쁠 때나 불편한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런 감탄을 하기는 조금 어려운 것 같고요. 한편으론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 한 입이 위로가 되어 좋을 때도 있겠죠. 단지 몇 개의 표현으로 정의하기엔 정말 다양한 순간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예술적인 순간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 논리를 조금 더 정리해보자면, 그 한 입을 먹는 순간 크고 작은 요소들이 하나하나 촤악- 하고 맞물리는 순간이 제게는 일상적인 ‘예술적’ 순간들인 것 같달까요. 꼭 예술이란 단어를 꺼낼 필요 없이 그저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그런 관점을 가진 저라 예술도 그렇게 바라보는 것 같아요. 복잡하지만 섬세한 요소들이 맞물리고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지 않을까-하는 생각. 그것만의 정제된 구조와 맥락 속에 있기에 ‘예술’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기에 예술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알고 그 관계를 이해할수록 깊이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추상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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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럼 현대미술 단골손님 뒤샹의 변기를 가져와볼까요. 그건 단지 ‘사인한 변기’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것만으로 예술이 된 건 아니란 거예요. 특히 현대미술은 개념이 들어가기에 눈에 보이는 요소들만으로는 그 존재를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다른 요소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볼게요. 우선 예술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창조한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 시대가 있었어요. 그런 생각으로 예술 작품을 이해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변기가 전시된 전시회 현장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은 관객들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 논하던 무수한 글들이 있었죠. 또한 “예술가의 선택"의 의미를 논한 뒤샹의 주장이 있었어요. 어딘가에는 뒤샹의 의견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거라 생각하며, 미술에 관한 것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일단 사람들에게 떨어진 ‘충격’이 있었네요. 오늘날에도 “아니 그게 뭐라고, 그럼 미술이 대체 뭐야?”라고 질문하는 우리가 있어요. 그만한 충격인 거죠. 이 충격이 일으킨 “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도 있네요. 또 무엇이 있을까 물어야 한다면 이제부턴 다른 사람에게 질문해도 좋을 거예요. 다른 관점에서 포착한 요소와 해석이 또 있을 테니까요. 무궁무진하죠. 가끔 농담조로 미술만큼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곤 해요.


어찌 됐든. 뒤샹의 변기 주변에 있던 그런 요소들과 그에 얽힌 질문들은 지금도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내용이 되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그 작품이 “현대미술의 확장”, "개념미술의 시작"과 같은 퍽 비범한 의미를 가지며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의미한 사건이 된 것이죠. 단지 “예술가가 사인한 변기”라고만 하기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맞물려 있는 거예요.


제가 지금 사인한 변기를 미술관에 둔다거나, 명작을 비슷하게 따라 그린다고 해서 그 예술가와 동등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냥 따라 했다는 건조한 행위만 있지, 제가 어떤 통찰을 통해 그것에 부여한 내용은 딱히 없으니까요. 제가 예술을 이해하는 관점, 표현하고자 한 주제 의식 등과 같이 저로서 지닌 고유한 논리나 설득력 따위가 없어요. 과정으로 보자면 “이러한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해 거친 무수한 선택의 이유나 고민이란 것이 없는 거죠. 예술가는 자신의 관점으로 구축하고 연구해온 그만의 예술관 속에서, 이 작품을 위해 매 순간 왜 이런 선택과 사유를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그래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한 거군요. 볼수록 더 보이고,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현대미술 뒤로 따라붙는 말들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고요.


- 작품과 만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이 맞물리는 입체적인 순간인 거죠. 이런 면, 저런 면, 또 다른 면이 잘 맞물릴수록 더 구체적인 경험이 나타나는 거고요. 그렇게 풍성해지고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일면이 넓어지는 것이겠죠. 그리고 여전히 막연한 느낌이 남아있지만, 그런 게 예술의 소통이 아닐까요. 그걸 본 내 이야기를 하고, 그것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깊어지는.

 

 

다만 나의 경험을 헤아리기 위해 그만큼 고민하고 들여다보는 시간도 필요하겠죠. 미술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만, 나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일에 대한 것도요. 그렇게 차근차근 나의 것, 상대의 것을 함께 쌓아올리며 시야가 넓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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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요.


- 사람?


- 방금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같은 걸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만드는 게 예술이라고요.


- 아. 그런 말을 했던가요.

 

 

근데. 음. 당연한 얘기만 하는 것 같아 새삼스러운데요. 다시 모서리를 맴돌자면요. 평범한 일상을 살든, 예술작품을 감상하든 저는 언제나 저라는 한 사람이에요. ‘일상을 사는 나’와 ‘예술을 보는 나’는 결국 같은 사람이란 거죠.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감각과 사유는, 예술을 감상하는 나의 감각과 사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에요. 방구석에서 얼렁뚱땅 진토닉을 마시는 저와 세심한 노력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예술 같은 진토닉을 마시는 저는 같은 사람이에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런 말이 나왔나 봐요. 모두 어찌 되었든 진토닉이라 불리는데. 참 별 사소한 이유들로, 이런 경험이 있어서, 이런 부분이 신경 쓰여서, 이런 게 느껴져서 또다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저란 사람, 당신이란 사람, 그 누구나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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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감각.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기억을 통해, 같은 것의 반복에서 특별함을 발견해내는 사람이란 존재를 생각해 봐요. 사회가 운운하는 실용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에서 벅찬 감동과 위안을 얻곤 하는 우리의 모습들. 단순한 행동에서, 사소하기 그지없는 사건에서, 우연한 순간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만들고 영감을 얻는 모습들이요. 더 나아가. 단지 경험하는 것에 그치지 못하고, 간직하기 위해 기록하고, 그렇게 남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모습들. 그런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을 같은 인간이기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순간들의 공존까지.


참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의 일상은 퍽 예술적이에요. 인간은 그런 존재라니까요. 너무 당연한데, 너무 당연하게 잊고 살아요. 어쩌면 그런 순간들로 조금 더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얻기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그런 순간을 깊이 음미하는 시간을 쉬이 가지지 못하고 있고요.


이런 말이 흔하게 쓰이잖아요. 모두 같은 세상 위에 존재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고요. 각자 자신으로서 느끼고, 경험하고, 기억하고, 의미를 읽고, 해석함으로써 형성한 세계와 관점이 있다는 거죠. 동시에 그런 관점을 지닌 이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이면이 있는 거고요. 저는 그렇게 오늘날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을 이해하곤 하고, 결국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려 해요.


사람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새롭게 질문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예술과 함께하고 있는 걸까요?

 

 

돈이 안 된다잖아요. 쓸모가 없다잖아요. 있든 없든, 보든 말든 사는 데엔 별지장이 없다잖아요. 꽤 오랫동안 돈과 쓸모를 정답처럼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예술은 그토록 우리 곁에 남아있는 걸까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예술이 함께할 수밖에 없던 것일지도 몰라요. 살아있기에 숨을 쉰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말하는 명제처럼요.


특정한 ‘쓸모’에만 존재 가치와 의미를 대입하기에는, 사람은 누구나 풍성한 의미를 경험하고 사유할 수 있으며 그만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사로운 순간들 속에서 비로소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그러한 것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형언할 수 없는 의미를 얻곤 하니까요.


그런 작디작은 사건에서도 고유한 의미, 풍성한 순간을 발견하는 사람들. 흐음, 정말 어쩌면 예술은 쓸모없기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쓸모없음은 ‘쓸모’에만 한정되었던 우리의 시선이 다른 것에도 초점을 맞추어보고 질문하게 하니까요. 이쯤 되면 우리는 ‘쓸모’의 의미도 다시 질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 정말 쓸모 있는 건 무엇일까요? 예술은 이런 것을 말할지도 모르죠. 우리가 살아가며 부대껴야 하는 쓸모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울 거라는, 그런 거요.


지금까지 진토닉 한 잔을 두고 제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삶은 그런 예술적인 순간들을 품으며 지속돼요. 당신의 감동을, 고유한 시각을 차단한 삶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죠. 다만 그것을 깊이 살피고 느끼고 이야기해볼 기회가 거의 없던 것뿐이고요. 우리는 예술을 통해 그런 기회를 다시금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사람이 지닌 그런 모습과 움직임들 때문에, 사람은 정말 예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예술을, 미술을 이렇게 이해해요. 사람으로서. 그냥 단순하게 ‘나’로서요. 그래야 단지 아는 걸 넘어서, 조금 더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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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그저 설명하려다가 너무 어려워서. 결국 당신을 불러온 거예요. 그냥 대화를 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미술을 바라보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이런 사람인가 보다. 이런 관객인가 보다. 뭐, 그런 생각에요. 물론 이따금 머리 아프게 한 것에 대해선 사과할게요. 제가 말주변이 잘 없어서요. 막 쉽게 설명하거나 사람하고 대화하는 걸 잘 못한단 말이에요.


- 그런 사과는 하실 필요 없는데. 전 와서 말을 들을 뿐이었으니까요. 제가 도움이 됐다면야, 다행이네요. 흥미롭기도 했고... 그리고 마지막 말은 조금 공감하기 어렵지만요.


- 그런가요?


- 아마도요?


- 흐음, 네 알겠어요. 그럼 그건 다시 생각해 볼게요. 대화가 길었네요. 얼음도 다 녹았는데. 마저 비우고 이만 헤어질까요.


- 오늘은 여기서 끝인가요?


- 네, 그런가 보네요. 이렇게 끝나는 대화도 있는 거죠. 사람이 끝맺지 못할 때면 잔이 적당히 비워질 때를 끝맺음으로 빌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예술적인 타이머인 거죠. 아님 혹시 더 할 얘기가 있어요?

 

 

아니 그냥.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떨어진 그의 말을 더욱이나 믿기 어려웠다. “우리의 대화도 이제 마지막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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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마지막 글인

[관객 노트 Sigak] 에필로그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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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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