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필요한 건 '휴지 한 장' - 바리데기 [도서]

마법이 아닌,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해야 할 때
글 입력 2021.06.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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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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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1일,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과 아내 오노 요코는 휴지 한 장을 흔들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곧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에서 이름을 딴 ‘뉴토피아(Nutopia)’라는 국가가 탄생했다. ‘Imagine’을 포함한 수많은 노래에 무정부주의, 반전(反戰) 평화주의의 메시지를 담은 적이 있는 존 레넌. 그의 생각은 뉴토피아의 건국 선언문에도 담겨 있다. “뉴토피아에는 땅도 없고, 국경도 없으며, 여권도 없고, 오로지 사람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지 ‘선언’만으로 뉴토피아의 국민이 될 수 있고, 평화에 굴복했다는 의미의 흰 휴지를 흔들 수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현재, 존 레넌이 꿈꾸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2021년이라고는 믿지 못할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딘가에서는 모여서 낸 목소리에 총성으로 응답하고 있다. 또 어느 나라에서는 천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그중 50만 명이 죽어 대통령을 바꾸라는 시위가 일어나는 등 사회가 불안정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서로를 향해 가하는 날카롭고 원색적인 비난. 인종, 세대, 성별, 국가, 학력, 지위, 재산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고 만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익명성에 숨어 불특정 다수에게 댓글 수류탄을 던지는 참호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너무 시끄럽다. 세상은 나아지지 못할 것 같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싶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갈등 없이 살아가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까. 세계인들을 일제히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꽃 한 송이’가 절실하다. 여린 꽃 한 송이를 던지면 펑 하고 연기에 싸이다가 걷히면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 필요한 비현실적인 방법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마법의 묘약을 탐구한 소설이 있다. 바로 <무기의 그늘>, <아우를 위하여>로 유명한 소설가 황석영의 2007년 작 <바리데기>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신화 바리데기에서 착상하여 집필한, 4년 만에 나온 장편이다.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사 '바리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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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티프가 된 바리데기 신화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불라국의 왕과 왕비가 여섯 딸을 낳은 이후 아들을 바라며 일곱째를 낳지만 딸이었다. 크게 실망한 왕이 바로 버리려 하자, 왕비가 이름이라도 짓고 버리자며 '버려도 버리고 던져도 버렸다는 뜻'의 바리데기라는 이름을 붙인다. 열다섯 해가 지나 불라국의 왕에게 불치병이 찾아들었다. 서천서역에 무장승이 지키는 생명수만이 그를 살릴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지만 신하와 여섯 딸 중 누구도 가지 않으려 하지 않자 나라를 샅샅이 뒤져 바리데기를 찾는다. 옥함에 갇혀 바다를 떠다녔던 바리데기는 당시 어느 노부부에 의해 발견되어 잘 자라고 있었다.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렸더라도 한 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며 서역 즉, 저승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장승을 만난 바리데기. 하지만 무장승은 길값으로 총 9년의 노동을 요구하고, 여차여차하여 일을 끝내자 이번에는 배필을 맺어 아들 일곱을 낳아달라고 한다. 긴 시간을 무장승과 함께 보내고 생명수와 약초를 얻은 바리데기가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죽은 사람들의 넋이 탄 배가 피바다에 떠다니는 모습을 본다. 생전에 덕을 쌓은 사람의 배는 사방에 연꽃이 만개한 채로 극락으로 가고 있지만, 악을 일삼았던 사람은 헐벗어 포박된 상태로 지옥으로 가고 있다. 바리데기는 수많은 배 중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탄 배에 염불을 해 주어 극락왕생을 시켜준다. 세상에 돌아와 왕과 왕비가 한날한시에 죽었음을 안 바리데기는 서역에서 가져온 약초와 물을 왕과 왕비의 입에 넣어주어 살린다. 왕과 왕비는 바리데기와 함께 살았던 무장승의 입궐을 허락하였고, 바리데기를 키웠던 노부부도 잘 먹고 잘살게 해 준다.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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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는 1990년대, 청진에서 태어났다. 바리가 태어나며 딸만 일곱이 되어 어른들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곱 자매와 할머니, 부모님은 오순도순 지낸다. 하지만 외삼촌의 남한 행 선택, 그즈음 불어닥친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바리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현이 언니는 삼엄한 감시를 피해 중국의 한 야산에 숨어 지내지만, 혹독한 추위로 인해 할머니와 언니를 잃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떠났던 아버지마저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바리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나 보이지 않으면 생각도 그를 따라가버린다. 나는 아버지가 언제 우리와 한겨울을 났는지 까마득하게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두 언니와 함께 부령으로 떠나간 어머니가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먼하늘의 구름 지나간 자리 같았다.

 

 

우리에게 ‘고난의 행군’은 북한 공산주의 정권의 민낯, 최소한의 생계조차 보장되지 않는 사회를 만든 정책의 실패, 그래서 북한이란 더더욱 피해야 하는 나라라는 인식을 하게 했다. 강대국들은 이념적 논지에 묻혀 북한 정권의 반인도주의적 면모를 선전하는 데에 급급했다. 모두가 동남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나라의 어려운 현실에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북한에서 영양실조로 죽은 약 30만 명의 사람들, 기근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문제가 있음에도 외면 때문에 해결되지 못하는 사이, 북한에서 삶을 위한 엑소더스(exodus)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알고 있으면 우리가 목소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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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워갈 꽃다운 나이에, 이미 생사고락의 풍파에 심하게 휩쓸린 바리는 떠돌고 떠돌다 따롄(大連)에 도착한다. 급히 배운 발 마사지 기술로 드디어 정착을 하나 싶더니, 밀항꾼들에 의해 이역만리 영국으로 가게 된다. 영국에 와 바리가 살게 된 연립주택에는 지하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리카, 중국...

 

 

아직도 세상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맘 편히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황석영 소설가는 책 끝에 ‘작가 인터뷰’를 싣고, "다시 되풀이되는 전쟁과 갈등의 새 시기에 문화와 종교와 민족과 빈부 차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어떤 다원적 조화의 가능성을 엿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서서히 영국에서의 삶에 적응한 바리는 바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친해진, 파키스탄 출신 압둘 할아버지의 손자 알리와 결혼한다. 티끌 만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의 화합은, '나와 맞지 않음'을 해결해야만 반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변색한 현재의 가치관에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다.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바리는 아이를 낳는다. 이름은 ‘홀리야’. ‘자유’라는 뜻이다.

 

 


생명의 물은 어디 있죠?


  

소설에 묘사된 바리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집을 잃었다. 떠돌아다니다 정착한 곳에서도 눈치를 보며 적응에 애를 먹었고, 사기를 당했다. 우여곡절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 꿋꿋이 살아나가는 힘을 '얻어버린' 바리는 누구보다도 강해졌고 굳세졌다. 영국에 와서야 비로소 바리가 살아있음, 그 자체를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리의 꿈에 다음과 같은 아우성이 어지러이 들린다.

 

 

목말라, 아프다, 배고파, 때리지 마라, 나쁜 놈들, 어머니, 여보, 살려줘.

 

 

어렸을 때 열병을 앓은 뒤 신력(神力)이 생겼던 바리는 발 마사지를 위해 누군가의 발을 잡으면 그 사람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경험을 하곤 했었는데, 귀청을 찢는 목소리로 채워진 꿈이 불행의 신호탄임을 알지 못했다. 동업자가 딸 홀리야를 죽인 것이다. 급히 도망가느라 집안은 어질러져 있었다. 괴로운 상황을 너무 많이 겪어 웬만한 고통에 무감해졌던 바리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반복되는 번뇌 속에서도 바리가 살아나가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생명수’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적 능력이 있는 바리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꿈에서 조언을 해 주던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서역으로 간다. 신화 속 내용처럼 피바다를 떠가는 배들이 묘사된다. 생사도 알지 못했던 가족들이 탄 배도 보인다. 서역에 왔지만, 생명수는 없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저 안에 옹달샘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냥 밥해 먹는 보통 물이야.

 

 

바리가 꿈에서 깨고 알리가 돌아왔지만 변한 것은 없다. 세계는 불안하다.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녕 생명수가 환상에만 머무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좌절감만을 맛보며 계속 변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생명수(水)가 아닌 생명수(手)를 모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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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할아버지는 말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렇다. 매 순간 인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은 시나브로 나아지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운명이 결정되고 삶의 값어치가 매겨지던 시대를 벗어나, 지금은 허물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한번에 모든 것을 정의롭게 바꾸는 묘약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 소설 속의 이야기'여야 한다'. 정의와 올바름의 고윳값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니까.

 

단지 우리 한명 한명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씨인 희망이 있다. 인간은 물은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지만, 손은 가지고 있다. 수소와 산소를 억지로 합쳐서 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뒤처져 있는 사람에게 손은 내밀어 줄 수 있다. 생명수(水)가 아니라 생명수(手)를 내밀어야 한다. 그 손으로 존 레넌은 휴지를 흔들었고, 바리공주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넋을 빌었고, 소설 속 바리는 고객의 발을 마사지하며 안식을 선사했다.

 

이렇게 우리가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모은다면, 거대 담론(알고 보면 거대하지도 않은) '평화'라는 단어는 '생명수'만큼이나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어가는 디아스포라는, 다른 억압들이 그랬듯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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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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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그라미
    • 안녕하세요, 컬쳐리스트 서지유입니다!

      대현님의 글을 보면서 '평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 간의 평화'에서부터 시작된 생각은 '지금 나'의 평화와 그로인한 감사함으로
      이어졌어요.

      힘든일은 매번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단 하나의 어려움 없이
      움직이는 나의 육체, 여타 안팎의 평화들. 당연한게 이토록 다행이구나 싶다 느낀건
      어떤이의 삶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덕분이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전쟁같은 삶이 한 사람의 손(행동, 말)에서 비롯되지만,
      평화를 주는 것도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제가, 압둘 할아버지의 말처럼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결국, '사람'만이 남고, 사람이 희망이 된 세상이요.
      ..존 레넌이 말한 뉴토피아가 뼈져리게 와닿습니다.

      싸우지 않는게 평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타인에게 손 내밀어주는 것이 평화이자
      평안이라 생각하게 되네요. 그리고 제가 그런 어른이자, 상사이자, 생명수(手)를 가진
      사람이고자 하구요.

      최근, 제 마음이 왜인지모르게 붕뜬 탓에 대현님의 글을 처음 봤을땐 조금 어렵고
      무겁다 느꼈는데, 글을 찬찬히 곱씹고 조용히 생각해보니, 제가 평화를 당연하게, 그리고
       저 역시 누군가의 생명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느꼈던 거더라구요.
      사람간의 평화도 나의 내적인 평안과 여유가 있을때라야만 잘 굴러가는 것 같아요.
      그런 여유가 많은 세상이길, 생각합니다.

      깊은 생각의 울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 건강조심하시고, 대현님도
      누군가에게 생명수를 건네는 여유가 함께 하길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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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지날
    • 2021.08.11 21: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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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그라미안녕하세요, 글 작성자 박대현입니다.

      지유 님의 감상평에서,지금 우리가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인과 관계가 성립되기도 하고, 아니면 관계성 없이 어디선가는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누구나 내적이든, 외적이든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손을 내밀어서 위로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은 지유 님께서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제가 한자 공부를 깊게 했던 탓인지 글에 한자어가 많이 섞여 들어가 아마 글을 읽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셨을텐데 다음부터는 한자어도 줄이고 문장도 매끄럽게 다듬어 읽기 쉬운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름의 막바지라 무척이나 덥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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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타너스
    • 안녕하세요, 에디터 이수현입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 궁금했던 소설인데 박대현 에디터님만의 관점과 이야기로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 말해주셨듯, 바리의 삶에 왜 이토록 고난이 많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 고난의 행군,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인물이 겪는 비극이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인물들의 고난이 마음 아프게 계속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리의 힘들고 힘든 삶을 보면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마음에 남는 것은 평화에 대한 바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모은다면, 거대 담론(알고 보면 거대하지도 않은) '평화'라는 단어는 '생명수'만큼이나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라는 대현 님의 평화에 대한 생각에 공감했습니다. 거대하고 도달하기 힘든 것으로 다뤄지곤 하지만 실은 각자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작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평화인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글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읽기 편안했습니다. 특히 소설 <바리데기>의 바탕이 된 신화를 소개해 친절하게 글에 입문하도록 돕고, 마지막에 생명수(手)의 필요성으로 대현님만의 관점을 풀어낸 점이 좋았습니다.

      앞으로 기고하실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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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지날
    • 2021.08.12 20:4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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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타너스수현 님 안녕하세요! 박대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이 짜임새 있다는 칭찬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바리의 인생은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혀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수현 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평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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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세희
    • 안녕하세요, 컬쳐리스트 송세희입니다 !
      인사가 늦어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어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뉴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소설 <바리데기>로 이어지는 글의 흐름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나, 하며 글을 읽었네요. 바리데기 신화 자체는 아주 어릴 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다시 보니 바리데기의 인생은 참 기구한 인생이었네요. 한 편으로는 '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자기 인생을 저렇게까지 바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기에 이런 생각은 유효하지 않은 것이겠지요ㅎㅎ

      평화와 인류애는 우리가 평소에 떠올리고 살기에는 언뜻 지나치게 크고, 부담스러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나이브하고 게을러지기도 쉽구요. 그래서 대현님이 현재 사회를 참호전에 빗대어 쓰신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다시 되풀이 되는 전쟁과 갈듯의 새 시기"의 한 복판에 살아가면서도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평화에 대해 지나치게 눈 돌리고 살아오진 않았나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가 생명수를 결국에 찾지 못하고, 딸 홀리야 마저도 잃게 된 뒤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세계는 변함없이 혼란하고 삶은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는 살아가겠지요. 소설은 끝이 나도 그 뒤의 삶은 이어지니까요. 어떤 혼란함과 괴로움이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일이 비극처럼 느껴질 때도 많지만 그렇기에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비극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평소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온 평화와, 또 스스로가 비평화를 타자화하고 있었음을 일깨워준 글이었습니다. <바리데기>에 대한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내어 주신 점에 감사드려요. 생각할 지점이 참 많았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더운 기가 가시지 않는 날들이네요. 오늘도 편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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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지날
    • 2021.08.13 20: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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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세희안녕하세요, 에디터 박대현입니다.

      바리가 생명수를 찾지 못한 후 현실로 돌아와서 소설의 말미에, 남편이 기적적으로 돌아오고 가족이 상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인근에서 폭탄이 터져 혼란 속에 휘말리게 되며 소설이 끝납니다. 얼핏 보면 결말이 비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의 논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외쳐도 인류의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인류의 비극이 끝나지 않더라도 바리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 거창해보이는 주제를 독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글이었는데 잘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희 님의 글 너무 좋습니다 ㅎㅎ 자주 읽지는 못해도 가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해 노력해보아요~! ><

      더위는 조금 꺾였지만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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