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머니, 나의 순이씨 [사람]

여전히 소녀의 마음을 지닌 당신이 애틋해서
글 입력 2021.06.0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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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씨의 취미는 사진 촬영이다

 
 
엄마의 어릴 적 별명은 '순이'다. 유독 조용하고 얌전했던 성격에 어른들이 순하다며 부른 애칭이었다. 나이가 쉰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불릴 정도니 그 시절에는 거의 두 번째 이름이었던 셈이다. 순이야, 순이야. 입에 알사탕을 넣고 굴리듯 단어를 머금어 본다. 발음도 곱고, 듣기에도 좋다. 그동안 전해 들었던 엄마의 유년 시절이 머리에 재생된다.
 
 
1.
순이는 연필과 노트보다 흙과 농기구가 익숙했던 어린이다. 아침마다 책가방에 교과서 대신 보자기를 넣고 등교한다. 하굣길엔 논둑길을 따라 걸으며 소에게 줄 풀을 보자기에 싼다. 시키지 않아도 척척 동물들의 먹이를 챙긴다. 고사리손은 쉴 틈이 없다. 바빠지는 농사철에는 어른들의 부름을 받아 논으로, 밭으로 출동한다. 변변한 장화 하나 없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순이는 형제자매 중 다른 일은 몰라도 농사만큼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 하나의 몫을 해내는 자신이 대견스럽다.
 
 
2.
옆집에 두 살 많은 소년이 이사 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얼굴도 훤칠하고, 공부도 잘한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자신과 다르게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들어보니 반장을 도맡아 학급을 이끄는 우등생이란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소년의 존재는 유독 돋보인다. 옆집에 오갈 일이 생기면, 순이는 자꾸 눈길이 간다. 어느새 순이와 소년은 서로의 근황은 가볍게 물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좁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까지 다니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된 가을, 동네 축제를 연상케 하는 운동회가 열렸다. 순이는 몸이 약해서 잘하는 운동은 없지만 등굣길이 신난다. 전 학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운동장으로 몰려온다. 많은 사람 중에서 옆집 소년만 색을 칠한 듯 선명하게 보인다.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오늘은 마음껏 곁눈질할 요량이다.
 
곤란한 일이 생겼다. 순이가 달리기하는 도중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것이다. 고개를 슬쩍 드니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마음에 숨어버리고 싶다. 그는 순이를 일으켜 세워 결승 지점까지 함께 뛴다. “순이, 너 이 오-빠가 챙겨줄게” 겨우 두 살 차이면서 오빠 노릇 한다니까 순이는 웃음이 난다. 그래도 그 친절이 싫지는 않다.
 
 
3.
새 학기가 되면서 순이가 소년의 교과서를 물려받았다. 세월의 때를 입은 교과서 표지와 낡아서 뭉툭해진 모서리가 눈에 띈다. 상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펼치니 빼꼼한 글씨 주변에 밑줄과 필기가 가득하다. 소년의 성적이 좋은 건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씨도 참 반듯하다. '모자람이 없는 인간이네' 혼자 생각한다. 소년의 교과서를 보니 어떤 의욕이 끓어오른다. 이 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둬보겠다고 다짐한다.
 
사실 순이는 지독한 비염을 앓고 있어서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누렇고 진한 농도의 콧물은 두통과 함께 사계절 내내 순이를 괴롭힌다. 수시로 코를 '팽'하고 시원하게 풀어야 숨이 쉬어진다. 그렇기에 공부는 순이에게 남의 얘기였다. 농사일이 체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다음 시험에서 성적이 올랐다. 이번에는 기적의 교과서로 공부한 덕이었을까, 공부에 아예 재능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주변에서 커닝했냐며 비아냥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속상했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소년에게 이 소식을 전할 생각에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는다.
 
*

그 시절 마음에 품었던 소년은 남편이 되었고 지금은 곁에 없지만, 여전히 엄마는 소녀 같다. 아스팔트 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져 짓무른 살구와 매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낙엽이 지는 시기엔 가장 고운 단풍잎을 모아 식탁에 색깔별로 펼쳐놓는다.
 
시골길을 함께 걸을 때면 거리에 자란 이름 모를 풀의 정체를 설명하며 어린 시절 경험을 꺼낸다. 새 원피스를 입은 날에는 꼭 “나 어때?” 연신 묻는다. 드물게 내가 어려 보인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면 “그래?~”하고 배시시 웃는다.
 
엄마도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곤 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엄마는 나에게 어른이었기에 당신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때면 새삼 마음이 간지럽고 눈시울이 뜨겁다. 핏덩이 같은 자식을 이렇게 키운 게 대단해서, 소녀의 마음을 간직한 당신이 애틋해서. 순이씨의 오늘을 더 소중히 눈에 담아야겠다.
 
 
[김세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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