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한 애주가의, 산책자의, 인문학자의 고백 [사람]

어쩌다 사랑하게 된 술, 산책, 무용한 것들에 대해
글 입력 2021.06.0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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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마음 가는 대로 인생을 살다 보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많아진다는 뜻이다. 요컨대, 비가 내린 다음 날 짙게 깔린 땅 냄새를 맡을 때, 기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볼 때, 카페의 넓은 창 바로 앞에 앉아 작업할 때,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 새벽에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하루 정리할 때, 그리고 떡볶이를 먹는 모든 순간 등이 있다. 그 모든 사소한 순간 앞에 서면 괜스레 이상하고 기묘한 감정이 솟구친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지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심장은 평소보다 더 불규칙하게 뛴다. 설렘과 긴장감 그 사이 정확히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남을 느낀다. 나는 이 감정을 ‘행복’이라 정의한다.

 

좋아하는 순간들을 꽤나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행복을 느끼는 극적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며, 어느 순간부터 극적으로 행복한 순간을 맛보면 바로 휴대폰 메모장에 짧게 기록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기록하는 일은 내가 언제 그리고 무슨 일을 했을 때 행복한 지를 구체적으로 오래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그걸 알면 나중에 불행한 순간이 닥쳐도 스스로 행복한 순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시작했다. 다시 말해, 기록하는 행위는 당장은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한 마음 씀씀이인 동시에, 길게 보면 행복해지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과도 같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어쩌다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 것들에 얽힌 사연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행복했던 순간의 감각을 일깨워 피워낸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을 정리한 나의 이야기다. 나의 작은 이야기 조각들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워낼 수 있길 바라며, 고백합니다.


 

 

첫째, 어느 한 애주가의 고백



 

‘꼴록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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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잔에 따르는 술 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인가? 내가 술에 진심이라고 느꼈던 순간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다른 일을 빌미로 술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 술 자체가 순수한 목적이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는 술을 마시는 약속이 잡히고 설레기 시작할 때, 먹는 음식마다 궁합이 잘 맞는 술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할 때, 그렇게 술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술을 향한 나의 진심을 깨닫는다.

 

술 자체의 쌉싸름한 맛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술을 둘러싼 것들을 사랑한다.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이 있고, 그곳에는 언제나 각자의 진실된 마음과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대개 술을 마셨던 모든 기억들이 저마다 다 다른 향기, 소리, 장면들로 남아있는데 다시 떠올려도 좋을 만큼 감각적이다.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희미한 조명이 있고, 음악소리와 주변의 말소리가 섞인 소리가 들리고, 공간을 감싸는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있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깊숙하고도 뜨거운 대화의 온도가 있다.

 

다만, 술과 사람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유일하게 나처럼 술에 진심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만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셋이나 있는데, 저마다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어 신기하게도 통하는 부분이 많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 친구까지 함께 있다니 참으로 복받은 인생이다. 이들과 별별 인생 이야기들을 하며 지금껏 수많은 술잔들을 부딪혔다. 그러니까 한창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때쯤 각자 인생의 방황 시절과 희로애락을 함께 공유한 사이다. 이제 술은 그저 거들 뿐, 술잔을 부딪히고 따라주는 것만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얽히고설킨 모든 감정들과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만드는 술, 그리고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참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이 있다면,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고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나의 오랜 술친구들과 미래의 술친구들과 가능하면 오래 술잔을 부딪치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종합 비타민을 챙겨 먹는다.


 

 

둘째, 어느 한 산책자의 고백



 

‘오늘의 날씨 맑음. 미세먼지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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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했다. 두 발을 현관문 밖으로 내딛는 순간부터 나의 사소하지만 위대한 여정은 시작된다. 뚜벅뚜벅.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점심을 먹고 해가 중천에서 살짝 비스듬히 지날 때쯤 딱 적절히 따스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애매한 낮 시간대가 적절하다. 그때면 엄마와 함께 동네 뚝방 길을 자주 걷는다. 걷는 방식과 속도가 워낙 천차만별이라 따로 또 같이 빠르게 걸었다가 느리게 걷기를 반복했다.

 

산책을 시작하는 데 딱히 뚜렷한 목적이나 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좋은 날씨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의지, 그 두 가지면 충분했다. 어떤 날에는 머릿속에서 부유하기만 하는 생각을 붙들고 나갔다 어느 순간 형체 있는 생각으로 정리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번잡한 생각은 뒤로 미뤄두고 그저 걷는 데에만 충실할 때도 있다. 그도 말고 산책 중 우연히 기분 좋은 순간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대개는 나무, 흙, 길, 돌, 물, 하늘, 벌레, 아이들, 물고기, 새 등등 정적인 것들과 동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에 자주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것들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낀다. ‘저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저렇게 존재하고 있구나, 저들만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작은 위로를 얻는다. 그렇게 나는 풍경 속을 거닐고, 보고, 느끼고, 여유를 머금고, 생각에 빠지는 그 모든 경험을 사랑한다.

 

하나 더, 산책은 나의 의지대로 걷다 가도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그저 가고 싶은 대로 쭉 걷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반환점을 돌아 다시 걷는다. 마치 인생이 그렇듯, 나아갔다 멈추기도 했다 뒷걸음치기도 했다 다시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마냥 걷다가 조금이라도 끝이 없어 보이는 인생길에 막연한 기분이 들 때마다 주문처럼 이 말을 되새긴다. ‘가자, 가자, 가다 보면.’ 힘들어서 멈춰 서는 순간이 있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그저 나의 속도대로 소신 있게 걸어가라고. 그 마음가짐과 결심까지 온전히 산책자의 몫이었다.

 

 

 

셋째, 어느 한 인문학자의 고백



우연한 계기로 독일어를 배웠고 알고 지낸 지는 햇수로 벌써 9년이 됐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기저에 있는 문화 맥락과 그에 관한 소소한 의미, 가치,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언어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문화, 역사, 철학, 예술 등이 깃들어 있다. 경계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연결되고 그것들의 숨은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낼 때마다 배움에 깊이가 생겼고 기분 좋은 희열을 느꼈다. 주변에서 나를 ‘뼛속까지 인문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부터였다. 그리고 무용(無用) 한 것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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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것들은 대개 아름답다. 그래서 좋아한다.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 작고 하찮아서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것들. 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 또는 사람들이다. 무용에는 사물이나 존재뿐만 아니라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식이나 사상도 포함된다. 독서 행위, 깨달음의 순간, 사유하는 과정, 흐르는 대화 속 영감이 되는 말의 조각 같은 것들 말이다. 모두 측정할 수 없는 무수한 가치들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순간들을 ‘가치 있는 영혼의 양식’이라 칭하며, 그것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절대 무용하다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의 삶에서는 작은 즐거움과 위로를 안겨주는 유용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용과 유용을 가려내는 일은 스스로 어떤 태도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생각하는지에 달렸다.

 

나는 소소한 순간에도 쉽게 자극을 받고 행복해한다. 어쩌면 그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축복받은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스스로에게는 예민한 구석이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것들에 의미가 생겼을 때 마음속에 소소한 기쁨과 희열이 자리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존재 또는 순간들일지도 모르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잊히지 않고 다시 새롭게 되새겨질 수 있도록 나의 의미와 시선을 덧대어 세상에 이야기를 전한다. 그것이 내가 택한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인문학자의 삶의 방식이다. 작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고 각자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는 것,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가!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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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에는 사연이 넘친다. 나에게 술, 산책, 무용한 것들이 그러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다시 질문을 한다. “내가 왜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들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좋아하는 감정은 단순히 기분 좋은 호르몬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꿈을 품을 수 있게 만든다. 그건 다시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이루기도 하며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이룬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이유가 만들어진다.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것을 나의 곁에 두고 오래 사랑하려 한다. 사람, 마음, 이야기가 있는 곳에 오래 머물면서 자주 자극받고 감각하고 싶다. 보고, 듣고, 느끼고, 다시 사유하면서. 그리고 그것들 사이로 사연이 겹겹이 더 많이 쌓이면 좋겠다. 무언가를 향한 진실된 마음과 애정을 한데 모아 이렇게 한 사람의 이야기로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때로는 글로 때로는 말로 한결같이 온몸을 다해 애정을 표현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나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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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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