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와 함께 지켜봐주겠어요? - 정글의 짐승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5.3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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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작품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의 중편소설 「정글의 짐승(The Beast in the Jungle)」이다.

 

헨리 제임스는 (영문학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존재이다. 심리소설의 대가로 흔히 불리는 그는 소설에서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결국 말하자면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 과정을 반영한 글쓰기이다.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소설 바깥의 작가가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탈피하고 소설 속 인물의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생동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근대에서 현대로 소설의 커다란 패러다임이 이행하는 과도기에 머물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후 세대인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제임스 조이스와 D. H. 로렌스의 소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글의 짐승」은 헨리 제임스의 후기 소설에 해당한다. 약 50년간의 작가 경력 동안 헨리 제임스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왔다. 초기 소설에서는 대인관계 및 혼인관계를 그리며 인간의 사회적인 모습을 주로 다루어 왔다. 특히 미국의 소설 작가로서 영국 및 유럽 국가들의 영향 속에서 아직 국제적 역략이 부족한 미국의 모습을 작품 속에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주리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후기 소설들은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의 심리 과정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하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사고 과정과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문장 형식과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면 더욱 재미있게 「정글의 짐승」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일러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 소설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일부이며, 이마저도 「정글의 짐승」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와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자체는 문장도 길고 표현의 지시도 명확하지 않아서 읽기 어려운 소설로 평가받고 있고, 그러한 면들 때문에 다양한 평가들이 오늘날에도 계속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정말로 독특한 줄거리 설정, 그리고 헨리 제임스 특유의 문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말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분위기와 인물의 감정은 굉장히 독특한 것이었고, 근래 한국 소설에서 접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공유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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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Beast in the Jungle, 2019

 

 

“Then you will watch with me?”

“그럼 나와 함께 지켜봐주겠어요?”

 


「정글의 짐승」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여 만남을 가지는 한 쌍의 남녀, 존 마처와 메이 바트램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어느 점심 사교모임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이때 메이는 그들이 약 10년 전에 만난 사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휴양지인 나폴리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났었고, 존은 자신이 안고 사는 공포를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메이는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존은 메이가 아닌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공포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


존이 안고 있는 공포는 자신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정글의 짐승”이 언제 습격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비웃음을 살까봐 세상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할 공포. 그 공포가 언제 덮칠지 모르는 채로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메이는, 그의 공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와 함께 그 공포를 지켜봐주기로 한다. 그의 상처를 건들지 않도록, 가장 세심한 방식으로 그의 곁에 머물며 그를 함께 지켜봐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내가 매력을 느낀 첫 부분은 소설의 앞부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존은 어떠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숨기고 있다. 이 상처의 정체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명확하게 말해지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정글의 짐승”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존이 안고 있는 상처, 이 상처의 정체에 대해 메이는 구체적으로 캐묻지도 않고 우회적으로 일컫는다. 존이 안고 있는 공포를 인정해 주고 그가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옆에서 최대한 신경써주는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 사람의 비밀에 대해 메이는 10년 동안 함구하였다. 그들이 재회하기까지 나폴리에서의 만남과 그들이 나눈 대화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한 재회에서 그 모든 것을 존으로 하여금 상기시켰다. 존은 자신이 평생 외롭게 자신의 공포와 싸워왔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고통을 함께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메이는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었고, 오히려 외롭게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던 것은 메이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10년이 지나 다시 만난 자리에서 메이는 존의 고통을 “함께 지켜봐주겠다”고 말한다. 스스로 외로움을 견뎌왔을 존과 멀리서 그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던 메이는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된 것이다.


*


메이가 함께 관찰해주는 새로운 일상 속에서 존은 삶의 안정감을 회복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메이의 섬세한 시선 속에서 처음에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존은 자신의 업무 시간 이후에 메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규칙적인 일상을 완성하고, 그 안전한 루틴 속에서 메이와 함께 자신의 고통을 관찰해 간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메이가 쇠약해지고 더 이상 이러한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존의 규칙적인 일상은 붕괴된다. 오랜 시간 메이의 섬세한 보살핌이 지난 후에도 존은 스스로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존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역설적으로 규칙적인 일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존이 메이를 대하는 방식은, 항상 적절한 선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 속에 제한되었다. 그녀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가 자신의 성의를 느끼게 하려면, 또 자신과의 대화를 불쾌해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존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고민은 무해한 연인의 전형 속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는 것일 뿐, 정작 자신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가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존은 타인의 시선을 무척 의식하고, 자신의 원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를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인물에 가깝다.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설정한 규칙적인 삶과 습관들이, 결국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마음속에 계속 묶어두었던 것은 아닐까.


*


「정글의 짐승」은 물론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모호한 내용과 복잡한 문장을 완벽히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문장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단편적인 감정들을 천천히 쫓아가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 어려운 책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새로운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글의 짐승」은 시중에 「밀림의 야수」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다. 근래 한국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 형식에 지친 독자, 혹은 인간 본연의 심리와 사고에 더 가까이 가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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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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