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구나 울어도 괜찮은 달나라 - 문스토리

글 입력 2021.05.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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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생명력은 거세되고 축 늘어진 채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물건처럼 이동하는 밀랍 인형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문스토리>를 다 보고 나니 그동안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이 많은 서울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에서 와서 지하철에서 모여 하나같이 지친 표정을 짓는 걸까. 저들 중 누군가에게도 내가 온전한 나일 수 있는 달과 같은 고향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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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문스토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서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았던 달나라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뒷면에는 무엇이 있는지, 정말 토끼가 절구통에 선약을 찧는지 소문만 무성한 달나라에 대해 이 뮤지컬은 기억을 잃은 몇몇 지구인들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과거엔 잘나가는 만화가였지만, 절필하고 택시 기사로 살아가는 ‘이헌’에게 의문의 사나이 ‘용’과 오래전 연을 끊은 친구 ‘린’이 나타나 조용했던 일상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이헌’의 오랜 팬이자 만화 잡지의 편집자 ‘수연’이 그에게 7년 전 중단되었던 만화가 다시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뮤지컬은 이헌이 왜 갑자기 만화를 중단했는지 추적하면서 그의 상처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헌과 린은 깊은 사연이 있다. 둘은 보육원에서 만난 사이로, 린은 이헌에게 부모가 없는 자신들이 달의 아이라고 말한다. 처음엔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졌던 그 이야기는 어느새 둘의 꿈을 지탱하는 희망이 되고, 그들은 달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 ‘용’에게 편지를 쓰며 각자 가수와 만화가의 꿈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문스토리_공연사진_1.jpg

 

 

이렇게만 서술하면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이 뮤지컬은 처음부터 린이 오랫동안 이헌을 떠난 사실을 묘사하며 둘의 견고한 우정이 무너졌다는 걸 알린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를 단단히 보호해주었던 환상의 껍데기를 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보육원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달나라 이야기는 어른이 된 이헌에겐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어느새 유명 만화가가 된 이헌은 린이 자신처럼 평범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뮤지컬을 보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린이 전해준 달나라 이야기는 정말 거짓일까? 그런 건 있을 리 없다는 어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걸까? 이헌과 린을 만나기 위해 달에서 온 용의 존재가 관객들에게 자꾸 달나라가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용은 그저 그의 망상일 뿐이라는 이헌의 말을 따르기엔 수연과 만나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접어들고 한참을 진짜일까 가짜일까 고민했던 나는 이헌을 찾기 위한 인터넷 방송에서 용이 지구 어딘가에 있을 달의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더는 진위를 가리지 않기로 했다. 설령 달나라 이야기는 모두 린이 꾸며낸 말이고 그를 찾아온 용과 린이 이헌의 망상이라고 해도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잊고 있었던 정체성을 일깨워주기만 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스토리_공연사진_8.jpg

 

 

이 뮤지컬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린이 트랜스젠더라는 점이다. 기존 미디어에서 묘사해왔던 조금은 과장된 모습의 트랜스젠더와 달리 린이 특정 성별을 과장하는 장면은 없다. <문스토리>에서 트랜스젠더 설정은 진지하게 성 소수자 담론을 꺼낸다기보다 이야기의 주제의식에 맞춰 내가 정의하는 나와 남이 정의하는 내가 불일치한 인물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은 이방인으로 인식되기 쉽다. 아무리 합법적인 이방인이어도 그들을 차별하는 시선이 불법으로 규정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타인을 프레임에 가둔다. 여자와 남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린과 그를 사랑한 이헌의 이야기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 나에게도 울림을 준 건 프레임에 가둬지고 차별받는 일이 그만큼 만연하다는 뜻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용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남들과 다른 너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달에서 온 특별한 아이라는 말이 <문스토리>의 주제 의식을 대변한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한 친구와 주변을 산책했다. 공연에 대해 이런저런 감상을 공유하던 우리는 어느새 정체성에 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도 각자의 일상에서 정체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탓에 혼자만의 시간조차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의식했고 친구는 누군가의 무례한 언사를 의식했다. 말 잘 듣는 학생으로만 살아오기를 강요받던 우리에게 남들의 평가는 실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공연장에서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상태였다. 관람을 마치고 산책을 하고 헤어지는 순간 인사하는 친구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내 표정도 그랬을 것이다. 마음이 정말 가벼워졌으니까. 그때만큼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못 미친 게 아니라 달에서 온 특별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오늘 소피의 ‘It’s Okay To Cry’를 듣는데 <문스토리>와 참 잘 어울리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과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지 않다고, 그저 자신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노래의 배경을 알고 나니 울어도 괜찮다는 노래의 가사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린다. 린이 만약 가수가 되었다면 소피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출퇴근길에 음악을 들으면 익숙한 지하철 풍경이 조금 달리 보인다. 어떤 음악을 재생하느냐에 따라 삭막하기만 한 출근길이 처연해지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고 웅장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음악으로 장식된 사람들이 밀랍 인형보다는 생명력 있는 존재로 느껴진다.


밀랍 인형과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당연히 감정이다. 겉으로 보기엔 지하철에 있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설렘도, 피곤함도, 절망도, 무력감도 들어 있다. 지구는 린의 슬픔도, 그를 잃은 이헌의 슬픔도 외면했지만, 달의 아이들만큼은 이해해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났던 달나라에서만큼 모두가 울어도 괜찮을 것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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