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훼손하지 않는 겸손한 야망 [도서/문학]

인류세 앞에서 어슐러 K.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읽기
글 입력 2021.05.16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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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부터 유럽의 배들은 남성 선장과 대원을 가득 태운 채로 바다를 누비며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새로이 발견한 땅에 남근과도 같은 깃발을 꽂아 정복을 표현했고, 그로써 땅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수 세기에 걸친 항해의 말미에는 세상의 끝을 정복하겠다는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점 정복 경쟁이 있었고, 아문센이 40일 먼저 남극점에 도착하며 영웅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스콧은 패배의 아픔을 느껴야 했고 이듬해 여름 탐험기를 담은 일기장과 함께 동사한 채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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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Sur"와 번역본이 수록된 페미니스트 SF 선집 "혁명하는 여자들"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은 네 명의 유색인종 여성이 아문센보다 2년 먼저,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서 보기만 하겠다는 단순하고 겸손한 야망으로 뭉친 이 탐험대는 깃발도,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탐험일지를 언젠가 후세대의 누군가가 발견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다락방에 묻어두고 이들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여성으로의 삶을 이어간다.

 

 

 

여성으로서의 취약함과 가능성


 

 

하지만 어느 과학 분야도 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런 훈련의 기회도 전혀 없었으니, 무지 탓에 나는 남극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총합에 내가 뭔가를 보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들의 겸손함은 자의적이면서 동시에 타의적이다. 과학적 지식생산 체계에서 배제되어왔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앞서 지식을 생산한 과학자들의 성과들을 읽으며 그것을 존중할 줄 알 뿐, 자신이 그것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이때 자신의 능력과 잠재성에 대한 자기의심은 도리어 다른 방식으로의 탐험 가능성을 시험하도록 한다. 지식 생산을 위한 탐험이 아닌, 관찰과 답사를 위한 탐험이 그것이다.


탐험대를 구성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역할이 아닌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여성이 적기 때문이었다. 탐험에 대한 이야기는 미친 짓, 심지어는 사악한 일로까지 여겨졌으며 흥미를 보이는 이들도 육 개월 간 가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멈출 수 없어 참여를 마다했다. 그런 가정에서의 역할과 돌봄의 책무는 이들의 탐험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안적인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남성의 영웅적 행위 뒤에 밥을 차리고 아이를 키운 여성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명령과 복종, 단 한 명의 지도자가 지휘를 하는 리더십이 아닌 치열한 논쟁과 투덜거릴 수 있는 틈이 존재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상호돌봄이 있는 수평적 관계, 스콧 탐험대의 기록들, 그리고 조금의 행운과 함께 탐험대는 무사히 남극에 도착하게 된다.

 

 

 

대안의 역사를 쓰는 일



 

그곳은 지저분한 데다

뭔가 야비한 무질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스콧 탐험대가 지나간 오두막에는 보급품 상자들, 쓰레기, 개똥이 엎질러져 있었고 주변에는 남극의 원주민, 펭귄이 촘촘히 서 있다. 그 오두막을 기지로 쓰자는 제안과 오두막에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는 반대 제안 사이에서 논쟁한 끝에 결국 탐험대는 오두막을 발견한 그대로 둔 채 문을 닫고 나온다. 그들이 대신해서 만든 것은 얼음에 작은 방을 파서 만든 토끼굴이다. 그곳에서는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사생활만을 누릴 수 있고 조금 부족한 식량과 약간의 낚시로 버텨야 하지만, 최대한 적게 남기고 적게 가져가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지나온 역사, 남성의 역사는 지저분하고 불쾌한 것이다.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야비한 역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불태워버릴 수도, 그대로 수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탐험대가 대신 택하는 것은 그 역사를 반복하거나 덮어쓰는 것이 아닌 다른 대안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 역사는 원주민의 삶의 공간을 훼손하지 않는 역사, 부족하더라도 그 소박함에서 가치를 찾는 역사, 의기양양하게 자국을 남기지 않는 역사다.

 

 

 

경이감의 에코페미니즘



 

그녀가 말했다. “어디로 가야 되지?”

“북쪽.” 후아나가 말했다.

 


남극점에서 갈 수 있는 방향은 북쪽뿐이다. 남성이 아직 훼손하지 못한 곳을 찾아 지구 끝까지 항해해 도착한 그곳이 동상 걸린 입술이 갈라질까 봐 농담에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춥고 끔찍한 곳이라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결국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훼손의 땅, 마구잡이로 깃발이 꽂혀있고 ‘여기는 너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땅이다. 남성이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봉우리를 생각나는 이름으로 명명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차를 마시고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왜였을까?


 

그 낯선 대륙, 남반구에 남은 마지막 극한의 땅, 우리 지도와 지구본에 하얀 구름처럼 남아 있는, 여기저기 잘린 해안선과 미심쩍은 곶들과 가짜 섬들과 거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곶들로 둘러싸인 빈 공간, 즉 남극을 직접 보고 싶다는 갈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욕망은 극지의 눈처럼 순수했다.

 


아마 그것은 애초부터 이들이 남극으로 떠난 이유는 정복 경쟁을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여성인 그들은 남성들의 일방적 정복의 결과가 어떻게 위계와 폭력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남극, 그 미지의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경이감(sense of wonder)의 세계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하고 얼굴이 붉어지게 하는, 감정이 반응하는 대상이었다. 그때 느낀 감탄의 감각이 조바심이든 숭고함이든 어떠한 희망이든, ‘내가 가장 먼저 도달했다’라는 승리감보다는 더 잔잔하고 오래 머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남극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훼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이로써 탐험대는 이성-감성, 문화-자연, 남성-여성의 이분법에서 항상 전자를 우월하게 생각한 서구 근대의 이원론을 돌파하고 비폭력적이면서 관계지향적인 에코페미니즘의 세계관을 탐험한다.

 

 

 

인류세 앞에서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읽기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겸손함은 지금 인류세 시대에 더 강렬하게 와 닿는다. 지구는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자원으로 만들어져있고 그 자원은 한정적이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성장은 불가능하므로 지구와 인류의 끝없는 풍요로움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엇갈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 시대, 지구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방법은 모두가 적절한 풍요로움을 누리는 법을 찾는 것이다. 

 

과거에는 남극이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면, 남극점에 아문센이 도달한 지 100년 남짓 지난 지금 남극은 20개의 인접국가가 극지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을 하는 곳이 되었다. 이렇게 정복은 한 번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지역이 황폐해지고 벗겨질 때까지 진행된다. 정복 자체가 위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며, 무언가를 종속시키는 일이다. 그렇게 정복자들은 권력을 쥐고, 풍요로움을 독점한다.

 

반면에 정복하지 않겠다는 것은 위계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계가 만들어내는 폭력과 황폐화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또 인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극을 여행하며 그곳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것은 비인간의 존재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곳에 사는 펭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을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곳의 눈과 얼음이 어떻게 우리와 연결되어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쓰레기가 널브러진 오두막을 뒤로하고 새로이 얼음 토끼굴을 만들어냈던 그들처럼 과거 정복과 훼손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할 때다. 정복하고 그곳을 쓰레기로 덮어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쓰레기장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살아갈 땅을 박탈당하지 않고 생존하는 방법이다. 훼손하지 않는 겸손한 야망이 우리를 생존하게 한다.

 

 

 

사실같은 허구, 페미니스트 SF



페미니스트들은 종종 라틴아메리카 여성을 서구 식민주의에 종속된 가난, 폭력, 개발의 영원한 피해자로만 비추곤 했지만 페미니스트 SF는 다르다. SF 속 유색인종 여성은 그 어떤 백인 남성보다도 먼저 남극점에 도달한다.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이 허구를 사실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그때의 ‘느낌’ 속에 유영하며 지구의 끝에 도달해서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여성들이 조용히 일상에서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설렌다. 여기저기 깃발이 꽂힌 훼손된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극과 같은 끔찍한 땅이 아닌 우리가 나고 자란 이 땅에서 새로운 상생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이런 사실 같은 허구가 주는 설렘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인용문 출처: 조애나 러스 외. 혁명하는 여자들. (2016). 서울: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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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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