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에서의 '무제' [문화 전반]

왜 '제목 없음'인가
글 입력 2021.05.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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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Track 9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이 곡을 '고스트 메신저'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시작은 애니메이션이었지만 나는 점차 이 곡을 부른, 인간 이소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점점 매료되기 시작했다. 잔잔한 멜로디와 존재론적 질문, 삶에 대한 성찰이 주를 이루는 가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위로 받았다고 이야기 한다.

 

처음 이 곡을 접했을 때에는 이 곡 이름이 Track 9인줄 알았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이소라의 7집 앨범 수록곡들은 전부 제목이 없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앨범 상세 정보에는 제목 대신 그것을 나타내는 그림만이 자리할 뿐이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Track1 부터 Track 13은 제목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제목일 뿐, 그렇게 불리는 게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긴다. 제목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더러 어떻게 부르길 원하기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언어적 표현으로써의 명칭'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것일까?

 

 

 

단어(이름, 제목)는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약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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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하면, 단어는 그것이 나타내는 사물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재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어떤 물체는 빨간빛, 혹은 녹색빛을 띠는 한 손 크기의 과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빨간, 혹은 녹색의 과일'을 사과라 부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사과'라는 단어 자체가 '빨간, 혹은 녹색 과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라색을 띠며 동그란 알이 여러개 주렁주렁 열린 과일(우리가 지금은 '포도'라 부르는)'을 사과라 부르기로 '약속'했더라면 우리가 현재 '포도'라고 부르는 과일을, '사과'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단어는 우리의 약속 체계일 뿐, 그것이 진짜 사물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약속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분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사과'라고 여겨지는 과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과를 '배'와 '포도', '바나나'로부터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사과'라 부르기 모호한 과일이 발견될 경우, 이를테면 '사과'의 형태를 갖고 있지만 맛은 '배'와 같을 경우, 이때는 새로운 단어로 약속해야 한다. 겉은 사과, 속은 배이므로 두 가지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과'나 '배'로부터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이름이나 작품의 제목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는 수단이 되고 작품의 제목은 주변 다른 작품들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름, 제목은 그것의 정체성,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본연의 것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다른 무언가가 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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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얘기한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면, 어느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과가 한 개 있다고 해보자. 이 사과는 그동안 너희 인간들이 나를 사과라 부르는 것에 나름 만족했지만 이제부터는 마음이 바뀌었으니 사과 말고 '포도'라고 불러달라 요청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과가 포도이길 원한다니, 라며 말도 안된다 생각할 것이다. 더불어 단 하나의 사과만을 위해 '포도'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혼란으로 가득찰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단어는 모든 인간들의 통칭적인 약속이며 체계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막무가내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는 사과일 뿐, 포도나 배나 바나나가 아니다. 사과가 포도처럼 보라빛을 띠는 것도 아니고, 맛도 확연히 다르며 식감도 천지차이다. 크기도 몇 배 이상 차이나며 구조 또한 매우 다르다. 같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과일 세계에서는 '사과'가 '포도'인게 말이 안된다.

 

이처럼 특정 이름이나 제목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내 이름인 '김재훈'을 누군가가 '강건우'로 마음대로 부른다면 나는 절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예술계에서 '무제'가 의미하는 것



하지만 이름, 제목은 그것을 그것만으로 한정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특히 다양한 해석이 필요한 예술 작품의 경우 제목을 지정해버리면 해석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어 대중의 자유로운 상상을 막아버린다. 제목은 무수히 많은 해석 가능성을 하나로 규정해버리는 행위와 똑같은 것이다.

 

포도를 그려놓은 예술작품에 '사과'라는 제목을 붙여놓는다면, 이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깊이 개입된 것이다. 포도를 통해 사과를 연상하라는 암묵적 지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전혀 연관된 것이 없어보이는 포도와 사과를 어떻게든 연결지으려 애를 쓸테다. 결국에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긴 할테지만 제목이 관객의 해석 주체성을 대부분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리 능동적인 예술 감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제목을 붙여놓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사과'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더 다양한 해석을 내놓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상상을 통해 관람객 각자가 생각하는 포도의 이미지를 떠올려 해석할 것이다. 누군가는 포도를 먹지 못하는 포기가 빠른 여우를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포도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릴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포도를 통해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실 것이다. 포도색과 같은 보라색이 주는 의미를 탐구하는 관람객이 있을 수도 있고 포도의 형체를 통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예측하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생각과 관점을 가졌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제목과 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파블로 피카소

 

 

그렇기에 많은 예술작품은 제목을 짓지 않고 '무제', 즉 제목을 짓지 않은 상태로 작품을 출품하기도 한다. 실제 2015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7400여 소장품 중 '무제'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은 7%가 넘는 520여 점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단순 일련번호나 '작품' 같은 제목까지 모두 포함하면 10%가 넘는다고 하니 정말 많은 작품들이 제목을 특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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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무제'전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최소한의 단서라도 얻어볼까, 하고 필사적으로 명제표를 찾아봤지만 '무제'라는 제목에 좌절했던 경험이 있는가. 제목 없이는 도저히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무능력에, 또는 마치 대화를 원치 않는 듯한 작가의 냉정함에 분노를 느낀 적은 없는가. 여러모로 현대미술에서 '무제'라는 제목은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관객이 느끼는 소외감은 '무제'가 단지 '제목이 없다'는 중성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달지 않겠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래, 이것이 작품의 해석을 관객에게 맡겨두는 '열린' 태도라는 것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이 작품은 작가의 온전한 창작물이 아닌가. 그것을 작업실로부터 공공 전시장소로 옮겼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을 하겠다는 의도이고, 그렇다면 제목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뭔가를 들려주려고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온당하지 않은가. 제목을 달지 않겠다니. 자기가 낳은 자식을 이름표도 없이 고아원 앞에 버리는 패륜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비난에 작가는 작가대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 어설픈 제목을 달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점이 정말 이해가 안 가는가? 관객들이 제각기 상상력을 보태어 만들어 갈 수많은 해석, 그 보석 같은 가능성들을 내가 붙이는 '제목' 하나로 제한해 버리는 것이 아깝지도 않은가?

 

모름지기 작품이란 캔버스가 조각대 위에서가 아니라 관객 각자의 마음 속에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 제목 따위는 일단 제쳐두고 선입견없이 작품을 찬찬히 음미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것인가? 내가 관객을 버렸다고?

 

'무제'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우리의 첫 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왜 이리 몰라주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특별전 : 무제> 전시 기획 中

 

 

15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무제'전에서는 제목없는 작품을 낸 이유에 대해 작가들에게 묻는다. 제목을 짓지 않은 이유에 대해 조각가 엄태정(77)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고 했고, 화가 김용익(68)은 "아직까지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떤 내용도 표상하지 않은 채로 작품이 스스로 존재하도록"이라고 답했다. 또 김창열(86) 작가는 "당시의 멋이었다. 그 세대 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도 뭔가 울림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제목들이 유행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편으로 무제는 혹독한 시절에 저항의 상징이었다고도 한다. 화가 이반(75)은 과거를 회상하며 "'비무장지대'같은 제목을 붙이면 안기부(현 국정원)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도 저항의 일환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제라 지정한 것에도 많은 이유가 있고 나름의 방식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제의 경우 관객이 한번 생각할 것을 두번, 세번 생각하게 한다는 데 있다. 관람객의 해석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더 다양한 시각과 생각을 가진 세계를 위한 위대한 걸음의 출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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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인해, 개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제한적일 수 있다. 노래를 듣고 각각 느끼는 바대로 제목을 붙였으면 좋겠다.

 

이소라

 

 

이소라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쩔 수 없이 Track X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지만 이소라 7집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그녀의 바람대로 각자 노래 제목을 붙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Track 1부터 순서대로 들으며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제목을 붙임으로써 다시 한번 이소라의 노래를 돌이켜 본다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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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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