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긴 복도를 지나서, 유폐된 진실을 찾아 [전시]

정여름 개인전, "Happy time is good"
글 입력 2021.05.07 02: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숨겨진 전시장을 찾아보세요


 

정여름 작가의 개인전을 보기 위해 합정지구를 찾았다. 어디가 입구인지도 찾지 못한 채 5분 동안 입구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지하 사무실 문 뒤쪽에 전시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 들어서자, 낡은 서랍장 위에 전시 방명록이 있었고, 문 쪽 커튼을 치우고서야 전시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전시장은 난생처음이었다. 전시장 입구가 사무실 안쪽에 있었다는 것도, 입구를 찾기 어려웠다는 점도 신선했다.

 

 

정여름-포스터-768x961.jpg

 

 

전시장은 1층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각 다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전시장 지킴이나 안내 관리자들도 존재하지 않아서 비밀의 공간을 찾는 듯한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이번 전시를 감상하다 보니 전시의 주제와 공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를 찾는 과정 또한 전시 관람에 속했기 때문이다.

 

 

 

망령들의 기억, <긴 복도>


 

hallway-2129434_640.jpg

 

 

정여름 작가의 은 한반도에 있는 주한미군기지를 다룬 전시이다. 지하실에서는 <긴 복도> 영상이, 1층에서는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본 글은 <긴 복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획자 이진실의 글에 따르면 이 전시는 “장소의 은폐와 위장 그리고 그 자리에 깃든 기억”을 주제로 삼고 있다. 작가는 용산과 원주에 있는 주한미군기지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망령들의 기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지하에서 감상했던 <긴 복도>는 탐정과 AI가 함께 원주시에 있던 ‘캠프 롱’을 수사하는 과정이다. 이 캠프롱 기지는 미군기지였던 곳으로, 작년을 기점으로 69년 만에 강원 원주시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작가는 캠프롱 기지의 환영을 축하하는 행사인 ‘CAMP 2020’에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이들은 캠프 롱 기지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지만, PX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즉 미군기지는 생계를 앗아간 동시에 다시 삶을 존속하게 한 모순적 공간이었다.


다시 작품 <긴 복도>로 돌아가면, 탐정의 시각에서 카메라가 움직이기 때문에, 감상자는 탐정의 눈을 따라 당시 정보를 전달하던 장소인 ATM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어두운 실내를 비추게 되는데, 관객은 살짝 소름이 돋을 수 있다.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 속 건물 내부에는 아무도 없고, 건물 벽면에 사람의 피가 튀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구와의 단절, 망각


 

earth-11593_640.jpg

 

 

그렇게 궁금증을 유발하며 영상은 아무것도 없는 벽에 파란 선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리키는 그 위치는 이내 흑백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인식한다. 아무도 없던 그 장소에는 사진 속 그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는 잊고 있던, 차마 몰랐던 진실에 대해 ‘다른 지구와의 동기화’라는 특이한 설정으로 이야기한다.


이 특이한 설정의 전제는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또 하나가 존재하는데, 현재 지구의 모습을 복제해 다른 지구도 같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동기화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 원인이 인간의 ‘망각’이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할 때 다른 지구와의 연결은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의 이야기는 현시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한, 이름 없는 죽음들이 그러한 망각에 포함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잊는다면 타 지구에서도 인간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는 다시금 이러한 진실이 잊히지 않도록 망각하지 말자고 표현하는 것이다.

 

 

 

잔상 속에 흐려진 기억



background-723053_640.jpg

 

 

또 비디오에서는 ‘이시도라’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된다. ‘이시도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환상 속 도시이다. 책 속 노인이 되어서야 도착하는 이 도시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 마침내 우리 품으로 돌아왔던 미군기지와도 닮아있다. 영상에서는 “우리는 이미 이시도라를 지나왔다.”, “이시도라를 지나고 뒤를 돌아보니, 이시도라가 변했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대사를 통해 이시도라가 미군기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디오에서 이시도라는 차가운 색에 반복되는 화면 속 ‘빨강색 사각형’으로 표현된다. 주한미군기지의 위치를 GPS 화면을 통해 보여주고,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던 그 지점을 붉은 사각형을 이용하여 강조하였다. 미군기지를 둘러싼 뒷배경 또한 차가운 색으로 대체되고, 붉은 사각형만 남기고 흐려진다. 이러한 연출은 작가가 생각한 ‘잔상’에 의해서도 해석될 수 있다.


작가는 잔상을 인간의 업을 뜻하는 '카르마'라고 표현하며, 한 곳이 존재하면 다른 곳이 약해지는 속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영상 속 뒷배경을 흐리게 연출한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존속은 지나고 보면 잔상처럼 기억될 것이고, 잔상 속 흐려진 요소 중에는 주한미군기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한미군기지의 자리를 붉은 사각형을 이용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망각과 잔상 속에서 흐려진 부분을 찾다



photo-256882_640.jpg

 

 

기획자의 글에 따르면 “원주의 캠프 롱 기지에 대해 구글맵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정보값, ‘캠프 롱 ATM’은 스크린을 뚫고 나온 얼룩, 군사적인 외양 뒤에 자리한 금융 자본주의 네트워크라는 실재"였다고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비디오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 풀어냈다.


하지만 기억의 파편처럼 진실을 전달하고 있어서, 총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심오한 표현이 다소 많고, 특히 이시도라를 설명하고 바로 ‘광화문’ 장소와 연결 짓는 부분에서는 설명이 부족했다. 한편 미군기지라는 장소 선정도 유익하나,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와 삶을 더 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러나 망각, 잔상 속 흐려진 조각을 찾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을 영상 매체를 통해 흥미롭게 전달했다. 또 전시장 입구를 찾는 노력처럼,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고찰이 이루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충분하다.

 

 

* 전시 도록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위 사진은 전시 작품과 무관합니다. (포스터 제외)

 

 

[심은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