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분(氣分)

글 입력 2024.03.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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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살쯤 됐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학교 도서관이 큰 즐거움이자 설렘이었다. 매일 1시간 정도 일찍 등교해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고, 같은 반 비공식 북클럽 친구들과 도서관 바닥에 앉아 수업 시작 전까지 책을 봤다. 그날 빌린 책은 그날 다 읽고 다음 날 반납, 또 새로운 책을 찾아 읽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책을 읽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때의 나에게 초등학교라는 확장된 사회(책가방을 매고 걸어서 등하교하고, 알림장을 적고, 수학 문제를 푸는 등)는 아주 새로웠으며 대단하고 크나큰 설렘이었다. 또 겪어보지 못한 것이 더 많은 미지의 세계(어른들의 세상, 진짜 사회)도 궁금했는데, 책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최대치였다.


티비와 다르게 책은 상상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이 많았다. ‘짙고 차분한 밤색 긴 머리에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여자아이’라는 긴 묘사에도 상상할 여지가 충분했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지 펑퍼짐한 멜빵 바지를 입고 있는지 궁금했고, 어떤 각도로 미소를 짓고 있을까? 눈썹은 어떤 모양일까, 마음에 드는 소녀의 모습을 찾을 때까지 머릿속에 그렸다 지웠다 반복했다. 그렇게 나만의 모양으로 세계를 오밀조밀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거워 관객석에 앉아 막이 열리기 전 발을 동동거리는 모양새로 들떠 있던 기억이 난다.


책 세계에 빠져 있던 그날들 이후 나는 훌쩍훌쩍 커서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직장인이 됐다. 수많은 일과 사람, 단체를 겪어 오면서 매일 아침을 설레게 했던 그 오묘하고도 마법 같았던 세계는 차츰 잊혀 갔다.


그 당시 본 책은 대부분 기억 속에 사라졌지만 어렴풋하고도 끈질기게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내용이 있다. 소설책이었고 대략 이런 내용이다. 사실 태초의 인간은 육성으로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또 생각만으로 대화하던 능력과 습성이 남아있어 사람들은 아직도 상대의 기운 만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챌 수 있다는 것이다.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회인이 된 지금 느끼기에 더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다.

 

사람들을 만나면(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늘 얼굴을 보는 직장 동료든)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색깔이 있다. 옅고, 진하고, 밝고, 어두운지, 거기에 그날그날 시시각각으로 다채롭게 변하는 과정까지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 색깔은 주로 기분이라는 단어로 불린다.


전화로 목소리를 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메일을 주고받거나 심지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없이 있을 때도 우리는 기분을 느낀다. 실시간으로 서로의 기분을 느끼는 우리는 사실 기운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실제로도 기분은 그런 뜻이다. 기분(氣分)이란 氣(기)를 分(분) 한다는 것, 즉 기를 나눈다는 의미다.


기분은 내면적이기도 하면서 외면적이기도 하다. 기분을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고 있어도 그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나온다. 내 안에서 생겨 나 어쨌든 분출되어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운을 어떻게 세상과 잘 나누느냐가 중요한데, 좋고 바른 기운을 주고받는 게 핵심이다.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논리다. 기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세상을 대하면 돌아오는 기운도 다정하다.


우리는 기분의 연속에 살고 있다. 기분은 기억 속에 살고 있고, 현재 생생히 살아 있으며, 미래까지 이어진다. 옛 추억을 하나 떠올려도 그때의 기분이 먼저 느껴진다. 아침잠 많은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하며 느꼈던 그 설렘처럼 말이다. 당시를 기억하면 그 통통거리던 가벼운 발걸음과 배슬배슬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그 웃음이 먼저 느껴진다.


오늘 출근길 멍하니 앉아있던 버스 안에서부터 퇴근 후 신난 모양새로 집에 걸어오기까지, 아니 집에 와 남편과 까르르 거리며 식사하고 친구와 키득키득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고, 짐짓 진지하게 화상 앱 독서 모임을 하는 것까지 내 일상의 모든 것에 기분이 담겨있다.


우리의 하루, 이틀, 일주일,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기분은 결국 우리의 전부다. 기분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기분 관리도 능력이고, 실력이다. 내가 어떤 기운을 풍기며 무슨 색깔로 앉아 있는지는 자신의 선택이고, 결정 권한도 모두 나에게 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사회생활 10년 차에서야 깨달았다니.


이왕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살아가는 거, 조금만 더 밝고 반짝이는 기운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다가올 세상을 기대하며 발 동동거렸던 어릴 적 나처럼 말이다. 고작 사회 경험 몇 년 했다고 해서 앞으로의 날들에 설레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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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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