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술을 향유한다는 것

글 입력 2021.04.2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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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좀비


 

재작년까지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진짜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힘들다는 말을 좀 더 극적으로 하고 싶어서 과장된 표현을 활용한 것뿐이었다. 잠을 못 잘 때, 할 일이 많을 때, 마감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을 때마다 지금 내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죽고 싶다고, 왜 사느냐고 중얼거렸다.

 

이제 난 더는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에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그 말이 전과 다르게 실체가 있는 말로 느껴져 섬뜩했기 때문이다. 왜 사는지 모르는 인간은 미끄럼틀을 타듯 쉽게 나락으로 빠진다. 목적 없는 삶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오로지 살아있기만 한 나의 존재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주 들었던 노래가 데이식스의 ‘Zombie’였다.

  

 

I feel like I became a zombie

머리와 심장이 텅 빈

생각 없는 허수아비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Oh why

I became a zombie

난 또 걸어 정처 없이

내일도 다를 것 없이

그저 잠에 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

 


어디서든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감상하곤 했다. 정말 노래에서 말하는 좀비가 된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리고 허공을 보며 가사를 음미했다. 공감되지 않는 소절이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는데 나만 그대로인 느낌. 내일이 기대되기는커녕 무섭기만 한 느낌. 그 느낌을 멋들어진 비유 없이 솔직하게 표현한 노래가 반갑고 고맙고 서글펐다. 노래의 화자도, 나도 왜 이렇게 지쳐야 하나 싶어서.

 

최근 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Zombie’를 다시 들었다. 몇 개월 만에 듣는 ‘Zombie’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예전엔 노래의 전반적인 주제인 ‘무기력’에만 집중했다면, 다시 들었을 때는 ‘그저 잠에 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라는 가사 뒤에 이어지는 ‘살아’라는 코러스에 신경을 쏟았다. 1절과 2절을 이어주는 역할에 불과한 부분이겠지만, 나에게는 어떻게든 살라고 간절하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들렸다. 그날도 지친 하루를 보냈던 나는 그 부분을 들으며 그래도 살자고 다짐했다.

 

대체 몇 개월 사이에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같은 노래가 이토록 다르게 들렸던 걸까. 물론 상황이 전보다 안정적으로 변한 것도 한몫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목적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 그냥 살아도 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교훈이었지만, 멋진 이야기로 같은 생각을 전해준 예술 작품이 없었다면 이 신념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작품은 바로 영화 <소울>이다.

 

 

 

소울


 

소울 포스터.jpg

 

<소울>은 픽사의 23번째 영화로 <업>, <인사이드 아웃> 등 수많은 명작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감독 피트 닥터의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한 중학교에서 밴드부 교사로 근무하는 ‘조 가드너’는 재즈 연주가가 되는 게 꿈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던 어느 날, ‘조’에게 동경하던 재즈 밴드에서 연주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의의 사고로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 가게 된 ‘조’는 지구에 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의 멘토가 되어 그에게 불꽃을 찾아주면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노력한다.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22의 모습에 많은 관객이 공감했다. 내게 슬럼프가 찾아왔던 시기를 크게 구분하자면 대학교에 합격한 직후와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대입이라는 목표만 생각했던 학창 시절과 졸업이라는 목표만 생각했던 대학 생활 모두 그 끝엔 뿌듯함 대신 허무함만이 밀려왔다. 사회가 정해준 목표만 완수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불투명한 미래가 던져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는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불꽃을 목적과 동일시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재즈 뮤지션의 꿈을 이루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의 불꽃도 자신과 똑같이 한 가지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조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꿈을 잃는 것과 같다. 목적으로 향하는 여정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소울1.jpg

 

 

그토록 꿈꿔왔던 공연이 끝나고 조는 내일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오늘과 똑같이 연주한다는 대답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를 떠올렸다. 당시 김연아 선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포츠 스타로 그의 금메달 소식에 전 국민이 열광했다. 모든 운동선수의 염원을 이룬 그는 이후 토크쇼에 출연해 그동안 자신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는데 막상 그 꿈을 이루고 나니 공허해졌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며칠 전 또 다른 인물이 영예로운 경력을 쌓았다. 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이다. 그의 수상 소식보다 흥미로웠던 건 시상식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고의 순간은 없다. 나는 최고라는 말이 싫다. 다 같이 최중으로 살면 안 되냐’는 대답이었다. 여러 어록 중에서도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지 않냐’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전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도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함부로 최고를 정하면 그 밖의 것은 그보다 못한 것이 된다. 처음부터 최고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을 그 자체로 즐긴다면 조금은 덜 지치지 않을까.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고 나자 22에게도 불꽃이 채워진다. 22가 지구에서 보낸 순간 중에 보편적으로 최고라고 불릴 만한 일은 없었다. 밖을 걷고 피자를 먹고 미용실에 가고 조의 어머니에게 정장을 선물 받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일상에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너무나 평범한 그 일상이 지구에 처음 발을 들인 22에게는 ‘경이’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불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22에게 조가 던진 ‘그건 목적이 아니야. 그건 그냥 사는 거야.’라는 말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꿈꿔왔던 공연이 끝나고 허무해진 조는 집에서 혼자만의 연주를 시작하는데, 22가 지구에 머무는 동안 모았던 물건들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삶이 이미 불꽃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지어 그는 별 볼 일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중학교 밴드부 교사 일로 타인에게 불꽃을 심어주기도 했다.

 

조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22를 찾고 우여곡절 끝에 그에게 지구통행증을 돌려준다. 불꽃을 찾았지만 조에 대한 미안함과 새로운 삶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22에게 조는 자신은 이미 살아봤으니 괜찮다고 다독이며 지구로 가는 길을 함께해 주는데, 그때 조가 22에게 지어준 미소는 최근 몇 년간 영화에서 봤던 미소 중 가장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잠금화면.jpg

잠금화면으로 설정할 만큼 이 장면에 진심이다.

 

 

 

좀비로 가득한 세상


 

‘Zombie’에 이런 가사가 있다.

 

 

다 털어놓고 Wanna cry

다 내려놓고 Can I cry

마른 내 눈물을 돌려줘

 

 

우리는 당연하게 힘들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도 현대 사회를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힘들어야 한다. 위로받고 싶지만 고개를 돌리면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도 더 힘든 사람들만이 가득해 하소연 한마디 내뱉지도 못한다. 고통스러운데도 눈물이 말라버린 우리는 그렇게 좀비가 된다.

 

그러나 <소울>을 다 보고 극장에서 나왔던 순간만큼은 나도 사람이었다. 수백 번도 지났을 길을 걸으면서 마치 세상을 처음 본 아이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에, 곁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에, 구름 한 조각에, 익숙한 건물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트인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는 그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슬픔을 정확히 인식한 음악, 정확히 인식한 책,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가장 큰 위로라고 한다. 내가 위로를 받은 순간에 나를 정확히 인식한 음악과 책과 영화가, 문화예술이 존재했다.

 

나의 징그러운 글쓰기 中, 박세나 에디터

 

 

나에게 있어 ‘Zombie’와 <소울>이 나를 정확히 인식해준 예술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공감을 얻었고 영화를 보면서 나의 일상은 이미 불꽃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위로를 얻었다.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를 뜻한다. 사회가 주입한 목적의식에 메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예술을 향유하면서 가까스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목적은 삶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지만, 애써 페달을 돌리지 않아도 삶은 지속된다. 이제 나는 힘든 상황에 닥칠 때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모든 걸 버티며 살아있는 내가 대견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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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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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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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이라는 것. 그것을 선연하게 전하는 이야기. 저도 영화 <소울>의 직설적이고 따듯한 메시지에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영화를 소재로 한 글에, 제 글의 일부가 인용되었다니 참 기뻤어요. 저도 사회가 주입한 목적의식에 메여 제가 가는 길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마냥 뛰던 날들이 있었어요. 삶이 쉬웠던 적은 역시나 단 한번도 없었고, 우리는 그 어려운 삶을 매 순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저는 진금미 필진님의 표현을 빌려 '우리 모두 대견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멋진 글에 제 글을 인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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