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죽음 앞의 철학자, 삶을 사유하다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글 입력 2021.04.2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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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살다가 문득 삶이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묻게 된다.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이었을까? 필연일까, 우연일까? 평생 '우연'을 연구해온 철학자로, 9년간 암 투병을 한 이 책의 저자 미야노 마키코도 아마 여러 차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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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죽음을 앞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 두 사람이 미야노가 죽기 전 두 달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말기 암환자와 그 친구이기 이전에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이기에, 둘의 대화는 말기 암환자와 주고받은 편지라고 했을 때 흔히 그려지는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편지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는 미야노의 말에 자신도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소노가 답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미야노는 우리가 모두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품은 존재임을 새삼스레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게 살아가며 하는 선택, 선택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우연, 그리고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어느 역학자가 만든 수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일어날지도 모를' 확률은 한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서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립니다.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오늘날, 개인의 사소한 인생에 일어나는 변화는 계산 결과인 숫자 앞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립니다. 숫자는 압도적일 정도로 분명하며 객관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 21쪽

 

 

다소 추상적인 주제들을 관통하는 것은 '합리성'에 대한 의심이다. 두 학자의 대화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실패를 맞닥뜨렸을 때 그 원인을 분석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건 일종의 상식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무엇을 '실패'로 정의할 것이며, 어떤 일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는 게 가능한 일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두 사람은 환자라는 미야노의 위치와 그가 앓는 병을 예로 들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택, 인과관계 등이 정말 그러한지 묻는다. 미야노가 진단받은 유방암은 과학적인 검사의 객관적인 결과물로 보인다. 하지만 부작용이나 예후를 설명하며 어떤 행동을 지시하거나 약물을 권하는 의사에 대해 이소노는 그가 제시하는 선택지 역시 "확률론으로 가장한 '약한 운명론'"이라 지적한다. 즉, 의료인이 전하는 데이터에도 문맥이 있으며 의료인 본인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환자는 일어날지 모르는 수많은 일들 사이에서 "옴싹달싹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무언가에 떠밀리는 식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선택을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안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것은 합리적인 지성의 작용이라기보다 쾌적함이나 반가움 같은 신체감각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 55쪽

 

 

이어서 미야노는 자신이 사회에서 환자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환자-건강한 사람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에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사회에서 흔히 질병은 '낫는다/낫지 않는다'로, 사람은 '환자/건강한 사람' 으로 나눠진다. 유방암 환자로 9년을 살아온 미야노에게 이러한 분류는 다소 폭력적이다.

 

그는 이러한 이분법이 질병에 걸린 상태와 아무런 질병이 없는 상태 사이의 무수한 스펙트럼을 볼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환자-건강한 사람으로 관계가 고정될 때, 그 관계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한정된 형태의 대화만이 오간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 환자는 환자로서만 존재하게 되고 그가 살아가는 시간,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납작해지기만 한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점이 되어 위험성을 계산하고 합리적으로 인생을 계획하여 타자와 일정한 형식대로 관계를 맺으려 할 때, 혹은 자기만의 이야기에 틀어박히거나 타인에게 모든 걸 내맡길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란, 본래 시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에 나와서 타인과 만나 운동을 일으키는 와중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됩니다.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동안 비로소 '나'가 존재합니다.

 

- 253쪽

 

 

미야노와 이소노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미야노의 병에 근간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는 삶 전반을 바라보는 관점으로까지 뻗어나간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모두가 경직되어 자신의 법칙만을 최선으로 믿는 사회이다. 또한 "시간의 두께를 만들지 않는 것"이며 "도보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수송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의료 인류학자와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아직 살아 있는 독자에게 우연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만나가면서 자신만의 선을 그리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실제로 자신들의 생각처럼 살았다. 미야노는 이소노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털어놓지 않을 수도 있었고, 둘은 편지를 주고받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편지가 있었더라도 책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책이 나와서 바다 건너의 독자에게 닿았으니, 기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단순히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때 오는 동정심이나 안도감에서 비롯된 감정은 아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수많은 우연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태어나는 수많은 시작들 속에 내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산다는 건, 다시 말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작은 선택 하나 하나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면, 선택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내키는 대로 손을 뻗어도 괜찮지 않을까. 책을 덮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지은이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옮긴이

김영현

 

출판사

다다서재

 

발행일

2021년 3월 29일


쪽수

284쪽


분야

문학>에세이

 

14,000원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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