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 앤디 워홀 : 비기닝 서울(ANDY WARHOL: BEGINNING SEOUL)

글 입력 2021.04.21 20:1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앤디 워홀은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더현대 서울’이라는 거대한 백화점에 당당히 자리한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선정한 개관작이 앤디 워홀의 작품이구나. 백화점 1층에는 로봇 안내원이 돌아다니고, 즐비한 명품관들 사이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상품이 오간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현장이 아니겠는가. 이곳에서 앤디 워홀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었다.


앤디 워홀은 무거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깊숙하게 얄팍한 예술가였다. 그는 20세기 뉴욕 중산층 시민들의 일상에서 예술을 발굴했고, 친근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독보적 존재로서 입지를 다졌다. ‘앤디 워홀: 비기닝 서울’에서는 이러한 워홀의 통통 튀는 특성을 그대로 살려 전시를 구성했다. 관객은 수려한 미술품을 감상하듯 작품의 색채, 명암, 구도 등을 분석하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마음대로 즐기면 된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한이준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였는데, 각 요일과 시간대별로 서로 다른 도슨트들의 해설(약 40분 소요)이 제공되니 전시를 보러 갈 계획이 있다면 시간 맞춰 듣기를 추천한다. 더욱 깊은 시선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엑소 멤버 카이가 참여한 오디오 도슨트도 있으니 취향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앤디워홀1.jpg

 

 

앤디 워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로, 체코슬라바키아 출신의 이민자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벽에 낙서하기를 즐겼는데, 그런 모습을 본 어머니 줄리아는 일찍이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줄리아는 앤디에게 필름 카메라를 사준 후 지하실에 암실까지 만들어 마음껏 사진을 인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인지 앤디 워홀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어머니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알려진다.


어릴 적 예술적 재능을 발굴하여 독창적인 감각을 어느 정도 터득한 워홀은 뉴욕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은 대형 공장을 세워 제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했기에 세계 시장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했고, 이는 풍족한 문화 개발로 이어져 뉴욕이 소위 말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던 때였다. 이 복잡다단한 환경 속, 대학교에서 광고 예술을 전공한 워홀은 뉴욕의 패션 잡지사에 삽화가로 취직했다.

 

 

앤디워홀2.jpg


 

특히 그가 그린 구두 드로잉은 상업예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억대 연봉을 능가할 정도로 성공했으며, 단숨에 뉴욕 상업예술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구두 드로잉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저작권상의 문제로 사진은 찍지 못했다. 실제로 보면 드로잉 위에 섬세한 장식도 붙여놓아 정교함을 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워홀은 젊은 나이에 성공했지만,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그는 마치 마티스가 누렸던 것과 같은 명예와 명성을 갖길 원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슈퍼맨과 같은 만화 소재였다. 당시 만화는 대중예술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는 이를 예술에 활용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를 캔버스로 옮긴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린 뒤였고, 워홀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무언가를 통해 뉴욕 예술계에 파문을 일으키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색다른 소재를 찾기 시작한다.

 

 

c03e7539d3fc4ea5335e4214ff7f0bb7fbafe4145ed2d8f8515ab7399808c6edffb898ceed7454466f671411f1b5a106c7e778c480e723a314eb6d11b444074e90ff505958b9cf69b71062b6ebf5b5f89feb500bea5e7c0b1bb7ff41a2fa5a5385977549ed0949668d8a86f0c.jpg

 

 

그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캠벨 수프였다. 미국인 누구나 즐겨먹을 수 있는 깡통 수프이자, 32가지의 맛으로 개발되어 다양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제품. 그는 이 캠벨 수프야말로 대중예술에 걸맞는 소재라고 생각했고, 이를 캔버스에 옮겨 여러 개로 찍어낸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똑같은 제품을 소비한다는 진실을 작품 안에 녹여냈으며, 현대 산업의 특징인 '대량생산'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다.

 

워홀은 그렇게 자신의 브랜드를 차근차근 구축했다.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앤디 워홀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색깔을 확보한 것이다. 워홀은 사진도 즐겨 찍었는데(어릴 적 지하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던 경험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는 가수부터 배우까지 모든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으며, 워홀에게 사진을 찍힌다는 것은 당시 뉴욕의 진정한 셀러브리티로서 인증을 받는 것과도 같았다.

 

 

폴라로이드.jpg

 

 

그는 피사체의 아름다움을 프레임 안에 탁월하게 담아내는 능력을 지녔다. 워홀이 선도한 트렌드는 현재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순간에 담아 타인과 공유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아마 그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누구보다 핫한 인플루언서가 되지 않았을까. 진정으로 시대를 이끌었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홀은 스스로 만든 '실버 팩토리'라는 작업실을 운영했다. 실버 팩토리는 벽지부터 문까지 은박지로 뒤덮혀있는, 이름 그대로 은색 빛으로 빛나는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작업실뿐만 아니라 일종의 클럽이자 사교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는 실버 팩토리를 방문한 드랙 아티스트들의 웃는 모습도 작품으로 남겼는데, 그곳이 얼마나 자유로운 장소였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버 팩토리.jpg

 

 

20세기 중반의 뉴욕은 앤디 워홀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워홀이 가지는 브랜드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는 문화를 창조했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실버 팩토리 한편에서 연주할 음악가를 모집했고, 이때 발굴한 밴드를 '벨벳 온 더 그라운드'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Interview'라는 잡지를 창간해 연예인들과의 인터뷰를 솔직담백하게 담아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자세하고 재미있게 전시되어 있으니 직접 방문하여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공허.jpg

 

 

전시의 마지막 순서로는 앤디 워홀이 그린 펜슬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팝아트의 황제라고 불린 인물이 그렸다기에는 다소 소박하고 얌전한 그림들이라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워홀은 일상적으로 펜슬드로잉을 자주 그렸다고 알려졌다. 하긴, 사람이 어떻게 항상 화려한 모습만 보일 수 있겠는가. 대중에게 알려진 그의 페르소나는 철저한 계산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니, 우리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 '앤드류 워홀라'의 모습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유명 브랜드로 점철된 예술품, 분주하게 찍어낸 사진, 담담하게 그려낸 그림. 이 모든 것은 한데 모여 앤디 워홀의 정체성을 담아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마냥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총에 맞아 고통과 실의에 빠진 적도 있으며, 대중예술에서 벗어나 환경 문제에 눈을 돌려 동식물을 캔버스 위에 담아내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다사다난한 일생과 작품을 관객이 온전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우리가 알던 워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의 일생을 조목조목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다.

 

*

 

어떻게 글의 제목을 붙여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앤디 워홀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타낼 수 있는 간결한 표현이 필요했는데, 뮤지컬 <레드북>에서 주인공 안나가 부르는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제목으로 붙이기로 했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표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앤디워홀 또한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의 삐죽삐죽한 은색 머리는 사실 가발이었고, 카메라 앞에서 눈빛을 쏘며 자신을 뽐냈던 것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가짜였나?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175589867_120721146712544_478544721427250241_n.jpg


 

앤디 워홀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워홀에게는 드로잉도, 판화도, 사진도, 영화도, 음악도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니 세상이 정해놓은 틀을 깨고 자신의 모습을 내세운 그에게 단순히 '팝아트 화가'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대중에게 알렸다. 그의 매력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었고 더 아름다운 예술을 개발하는 발판이 되었다.


내가 이번 전시를 통해 느낀 감상은 결국, 나를 말하며 살자는 것이다. 나의 모습을 말하고 당신의 모습을 존중하며 서로의 개성과 매력을 인정하다보면 세상은 더욱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나도 조금이라도 '앤디 워홀스러운' 당당함을 갖고, 아니 '이남기스러운' 당당함을 갖고 싶다. 그렇다면 더욱 빛나지 않을까. 뻔한 결말로 글을 맺어서 부끄럽지만, 내 생각은 여기까지다. 당신 또한 당신만의 모습으로 빛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남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