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해체, '기생수'로 '장자' 읽기 [만화/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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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좀비가 나타난다면….
인간은 알지 못하는 존재를 꾸준히 상상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가슴 한구석에 두려움과 공포를 가두고, 호기심과 재미를 선두로 세워 이들을 상상한다.
미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새로운 사유와 발견의 힘이 된다. 무엇보다, 이들과 인류의 접촉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얻는다.
1990년대 후반, 만화가 이와아키 히토시는 ‘기생수’라는 존재를 상상한다. 만약 기생 생물이 나타나 인간의 몸에 기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그 기생 생물이 인간과 겨룰만한 힘을 갖고 있다면, 견줄 뿐만 아니라 포식자로서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어떨까.
이러한 <기생수>의 상상은 ‘인간’을 향한 물음으로 나아가고, ‘장자’라는 돋보기는 이 물음을 대답으로 이끈다.
인간 ≠ 절대자
어느 날, 정체 모를 생명체가 신이치(주인공)의 손에 들어간다. 어떤 상처도 발견할 수 없어서 의아하던 참인데, 갑자기 오른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이치의 오른손이 기생생물에게 먹혔다. 그의 혈액을 영양분 삼아 오른손에 기생하는 이 기생 생물, ‘오른쪽이’는 급속도로 성장한다. 인간보다 높은 지능, 인간을 능가하는 힘, 인간을 단숨에 죽이는 공격력, 그리고 우리가 동물적 감각이라고 부르는 예민함과 속도, 반사 신경을 갖췄다.
오른쪽이의 동족은 인간의 뇌를 먹고 그 몸을 숙주로 삼았다. 인간을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자, 인간은 ‘먹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 중심적 사고
오른쪽이: 동족을 먹는 게 그렇게나 싫은가?
신이치: 당연하지.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야.
오른쪽이: 소중한 건 내 목숨뿐이야. 난 나 말고 다른 생물은 어떻든 상관없어.
신이치: 넌 짐승이나 벌레 같으니까.
- <기생수> 중에서
신이치의 주장은 어느 한 사람의 특별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이치가 주장하는 것처럼 오른쪽이가 “짐승이나 벌레 같으니까” 다른 생물은 어떻든 간에 자기 목숨만 생각하는 걸까? 실은 ‘짐승이나 벌레’ 대신, ‘인간’을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돌고래를 학살하고 트로피 헌팅을 한다. 생존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이, 부의 축적이나 권위의 과시, 삶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써 동물이 희생된다. 동물의 입장에서는 <기생수> 속 기생 생물만큼이나 더없이 잔인한 존재가 인간이다.
이상의 사실에도,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의 생존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 인간 중심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해체
장자는 이런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경계할 것을, 그리고 이것의 해체를 주장한다.
옛날에 바다 새가 노나라 교외로 날아와 앉자,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모셔다 종묘(宗廟)에서 잔치를 열고,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 양, 돼지고기 등의 일등 요리로 대접하니, 새는 이에 눈이 어질어질하고 근심과 슬픔이 앞서 감히 한 점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한 채 삼일 뒤에 죽었다.
이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람 자신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장자』, 「지락」 중에서
『장자』의 「지락」 편에는 어떤 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노나라 임금이 날아든 새를 극진히 대접했음에도 새는 죽고 말았다. 아무리 대단한 대접이라도 인간의 방식은 새에겐 그저 고통이었다. 새는 새가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류’인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계의 중심이자 모범이며 표준이다. 그럼에도 이 세계엔 사람의 것 외에 다양한 거처와 먹고 사는 방식이 있고, 저마다 고유의 방식대로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방식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무서워하던가?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正處]를 알고 있는 걸까?
사람은 가축을 먹고 사슴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는다.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른 맛[正味]을 아는 것일까?
원숭이는 편저를 짝으로 하고 사슴은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사귄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인간들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결사적으로 달아난다.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아름다움[正色]을 아는 것일까?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춘추시대 미인으로 여겨지는 인물
- 『장자』, 「제물론」 중에서
사람은 물이나 나무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에 살고 원숭이는 나무에 올라간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인간에게만 맛있지, 다른 생물에게는 좋은 먹이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일지라도 물에 비치면 물고기는 도망가고, 가까이 가면 새와 사슴은 달아난다. 이들에게 모장과 여희는 아름답지도 어떻지도 않다.
인간의 시선에서 기생수는 잔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기생수의 관점에서 인간을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했던 것처럼. 선과 악, 옳고 그름은 이렇게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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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시비, 미추를 결정 짓는 고정불변의 법칙이란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가운데, 인간 역시 상대적이다. 상대성의 인간에게 절대성을 부여하고, 그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얼만큼의 위험과 어리석음을 감수하고 있는 것일까. 짐작도 쉽지 않다.
인간을 중심에 둔 선택과 판단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치트키가 아니다. 판단의 기준이 오직 인간뿐일 때, 우리는 편협해진다. 현실에서 편협이 야기하는 사건들이 '새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여전히 편협하게 사고할텐가.
오른쪽이: 너에게 살 권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그 권리가 있어. 하긴 권리란 발상 자체가 인간 특유의 것이지.
- <기생수> 중에서
‘인류세(人類世)’라는 용어가 있다. 현시대를 인간이라는 종(種)을 중심으로 한 지질시대로 보는 것이다. 한 시대는 언젠간 끝이 난다. 과연 인간은 언제까지 ‘주류’일 수 있을까.
자, 이제 다시 상상할 때가 왔다.
참고 문헌
『장자』, 김학주 역주, 연암서가.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역주 장자』, 안병주, 전호근 공역, 전통문화연구회.
[송혜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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