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퍼니게임(1997) [영화]

글 입력 2021.04.0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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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 게임>은 스릴러 장르의 리듬과 구조를 마음대로 조절하며 관객의 심리를 밀고 당기는 영화다. 익숙하게 여겨 온 장르적 관습의 시간을 미리 당기거나 지연시키고 서사구조를 비틀어 예상치 못한 전개를 이어나가는데, 이는 관객이 기대한 관습적 패턴을 전복시키고 관객의 위치를 일깨운다는 점에 있어 영화의 자기반영성을 자각하게 되는 공포를 유발한다.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이 영화를 두고 스릴러 장르에 패러디를 가한 작품이라고 공공연히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스릴러 장르에 기대하는 바를 요약하자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주인공의 지속되는 불안과 공포 끝에 그가 사건을 해결하고 일상적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패턴이지만 <퍼니 게임>은 스릴러 장르 자체를 자기반영적 시선으로 비틀고 패러디하고 있으며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서사구조를 비틀어 서사 전개에 있어 사건의 시간을 앞당기거나 지연시키며 공포를 유발하고 마지막까지 익숙한 장르적 규칙을 배반한다.

 

2) 소격 효과, 리버스 등의 형식적 실험을 통해 관객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들고 스릴러 장르를 보는 관객의 잔인한 기대심리를 거울 비추듯 반사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결국 위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스릴러’라는 장르 관습과 규칙을 테마로 관객과 재밌는 심리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서사구조: 시간의 앞당김과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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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 간격을 독특하게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 점차 조여오는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공포는 급습한다. 여타의 스릴러 장르와 같이 점진적으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아닌 돌발적으로 공포는 시작된다. 평화로운 여름 별장에 막 도착한 게오르크 가족이 짐을 푸는 동안, 옆집에서 왔다는 피터는 계란을 빌리고자 안나를 번거롭게 한다. 단순히 계란만 주면 끝날 줄 알았더니 피터는 게오르크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터라는 인물은 친밀한 이웃의 모습에서 돌연 괴한의 모습으로 변한다.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등장인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게오르크의 다리를 골프채로 내려친 피터로 인해 공포는 시작되고 이유 모를 그들의 위협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다.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의도적으로 사건의 발생을 지연시키는 지점은 괴한인 폴과 피터가 게오르크 가족을 죽이고자 결심했으면서 막상 죽이는데 시간을 꽤 지연시킨다는 점에 있다. 죽일 듯 위협하면서도 계속 살려두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스릴러 장르라면 이즈음에 누군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부터 의아함을 가지게 된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이 기이하며 주인공 인물의 죽음을 내심 바라게 되는 것이다.

 

스릴러 장르를 보며 주인공이 위협을 극복해 사건을 해결하길 바라는 감정이입의 역할은 이 영화에서 반대로 나타나며 우리는 관객의 위치의 흔들림을 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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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는 12시라는 특정 시간에 이들을 죽이겠다고 공표하는 폴과 피터의 장면을 통해 스릴러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을 자기 반영적 시선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영화가 던진 12시라는 단서에 관객이 집착하는 동안 한 번 더 관객의 기대를 전복시킨다. 시간이 아직 다 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피터가 아들 게오르크를 생각보다 빨리 죽이게 된 것이다.

 

아들 게오르크를 죽인 후 폴과 피터가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자 우리는 막연히 그들이 도망을 갔을 것이며 살아남은 게오르크와 안나는 무사히 그 집을 탈출하게 되리라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폴과 피터를 영화에 다시 등장시킴으로써 익숙한 관습을 한 번 더 비튼다. 무사히 탈출한 줄 알았던 안나는 다시 붙잡혀 돌아오고 관객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이제 우리는 이 불편함을 거리낌 없이 느낄 수 없다. 이미 우리의 위치를 자각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과 위협을 기대하고 더 나아가 바라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포로가 된 안나와 게오르크는 그들을 계속 죽이지 않고 살려 두자 ‘이제 그만 끝내라’고 폴에게 외친다. 이 장면은 마치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인물들은 관객의 위치가 되어 이제 지겨우니 얼른 끝내라고 하지만 폴이 대변하는 영화는 ‘납득할 만한 전개로 상영 시간을 채운 뒤 끝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이르다고 대답한다. 장르에 대한 자기 반영적인 지점인 이 장면에서 영화가 시간을 계속해서 지연시키거나 앞당기는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스릴러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형식적 시도 : 소격효과 및 리버스 쇼트



폴은 끊임없이 관객을 의식한다. 개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안나를 이끄는 순간에도 다 알고 있다는 듯 관객을 돌아보며 윙크를 하고, 게오르크 가족이 12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관객을 쳐다보며 내기를 제안하고 ‘상영시간을 채워야하는데 게임을 벌써 끝내도 될지’에 대해 반문한다. 여기서 폴이 제안한 내기의 유형은 스릴러 영화 안에서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관객의 심리전을 모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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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는 반드시 해야 하고’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게임은 바로 장르 자체이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동안 누구는 죽을 것 같고 누구는 살아남을 것 같다는 관객의 습관적 기대를 표면으로 끌어올려 내기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격 효과는 지금 우리가 주인공 인물의 잔혹한 이야기를 관찰하고 감상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러니 불쾌하다. 관객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몰래 공포를 즐기고 싶은 욕망을 가진 반면 이 영화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장르 영화의 주체로 함께 하고자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바를 마치 폴이 알고 있다는 마냥 행동하는 모습은 마치 관객을 농락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스릴러 장르의 작동 방식을 관객이 온몸으로 체험하게 만들며 매번 기대를 빗겨나감으로써 관객을 기만한다. 정해진 역할극을 이어가야 하는 인물들이 마치 자아를 자각한 것처럼 느껴지자 관객은 불편한 감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영화의 리버스 쇼트 역시 이러한 시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 된다. 폴은 안나에게 기도문을 거꾸로 외우면 누가 먼저 죽을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안나는 폴의 총을 빼앗아 피터를 쏴 죽인다. 여기서, 폴은 리모컨을 찾아 다시 원점으로 플레이백 한다. 플레이백 되는 장면들은 다시 피터를 살리고 안나가 총을 뺏으려 하자 폴이 얼른 총을 빼내면서 마무리된다. 우리가 여기서 본 것은 무엇일까. 이 장면은 영화가 단 한 번 장르적 규칙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주인공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는 관객의 기대를 수렴하듯이 안나가 피터를 죽이는 것을 보여주지만 영화는 다시 재밌는 장난을 친다. 폴이 리모컨으로 영화를 과거로 다시 돌려버리는 것이다. 관객은 다시금 허무해진다. 안나는 총을 뺏지 못하고 피터는 살아있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뒤 다시금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가는 이 리버스 쇼트는 관객의 기대를 순간 실현시킴과 동시에 다시 전복시킴으로써 관객이 원하는 주인공 인물들의 생존이라는 기대심리를 들키게 한다. 영화의 전개와 동시에 순간순간 자각하게 되는 우리의 위치와 심리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직조된, 의도된 불쾌감은 무엇에 의한 것일까. 우리의 시선을 숨기고 싶은 욕망이 그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의 공포, 죽음, 위험을 대신 즐기고자 하는 관객의 은밀하고 싶은, 수동적인 감상자로서 그치고 싶은 욕망 그 자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우리의 심리를 겨냥해 수면 위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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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장르적 관습을 비틀면서 관객들이 장르적 규칙을 자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릴러를 통해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대하고 예정된 공포와 인물의 역할을 기대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들을 지연시키거나 전복시키는 서사적, 형식적 시도들을 통해 잔인할 수도 있는 관객의 기대심리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대하고 예상대로 되는 경우 쾌감을 느끼는 관객의 심리에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폴이 우리를 돌아보는 순간에, 예정된 쾌감을 예상하며 지켜보는 관객의 지위의 윤리적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기다리며 지켜봐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퍼니 게임> 속 생존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폴과 피터의 살인 게임이 계속 진행될 것임을 암시하는 엔딩은 우리에게 찝찝함을 남긴다.

 

 

[김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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