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마님은 왜 사당을 불태웠나 [드라마]

드라마 <후궁견환전>과 <녹비홍수>로 알아보는 '규방 암투물' 보는 이유
글 입력 2021.03.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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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견환전>과 <녹비홍수>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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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들의 취향과 비교했을 때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고대의 규방 암투물을 좋아한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이런 드라마를 찾아보는 편인데, 최근에는 그 유명한 <후궁견환전(甄嬛传)>을 봤다. (국내에서는 <옹정황제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후궁견환전>으로 명시한다.) 2주 동안 76부작을 다 봤고, 드라마의 명성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나는 이곳저곳에 <후궁견환전>을 영업하고 다녔다. 작년에는 <녹비홍수(知否知否应是绿肥红瘦)> <연희공략(延禧攻略)> 등을 재미있게 보고,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떠들고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주변인들이 나에게 물어보곤 한다. “너는 가부장제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이런 드라마는 어떻게 참고 보는 거야?”

 

맞다. 난 가부장제가 싫다. 특히 가부장제가 신성시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를 참아내는 건 참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대상이 보수적이라고 해서, 그 텍스트 자체까지 보수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진보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러한 진보성이 드러나는지, 청나라 후궁 암투를 주 소재로 하는 <후궁견환전>과 송나라 규방 암투를 주 소재로 하는 <녹비홍수>를 중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후궁견환전> : 그 황제는 왜 죽어야만 했나


 

<후궁견환전>은 후궁으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가게 된 견환의 일대기다. 청나라 옹정제가 즉위한 뒤 수녀 선발이 열린다. 자신만을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 백년해로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견환은 자신이 간택되지 않기를 빌지만, 미색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결국 후궁이 되어 입궁하게 된다. 입궁 직후 암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좋아하지 않는 이와 정을 나누지 않기 위해 견환은 병을 핑계로 황제를 피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견환은 눈 쌓인 홍매화 정원에서 우연히 황제와 마주치고, 그 후에도 (정체를 숨긴) 황제와 만나 시와 음률을 논하며 서로 마음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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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견환은 황제의 엄청난 총애를 얻게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후궁들은 견환을 모해한다. 황제의 마음만 자신에게 있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는 온갖 박해와 수난을 지혜롭게 헤쳐나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유산을 겪으며, 가문 또한 휘청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명부의 암투를 정치적인 이유로 눈 감는 황제를 목격하게 된다. 더 나아가 황제가 자신을 총애한 이유가 자신이 죽은 순원황후를 무척이나 닮아서임을 알게 된 견환은 절규한다. 황제와 마음을 나눴다고 믿었던 견환은 그동안의 사랑이 허상임을 깨닫고, 갓 태어난 딸까지 포기하며 절로 출가한다.

 

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견환의 이상(사랑하는 이와 백년해로)은 일부다처제와 황권 중심의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특히 남편의 역할과 군왕의 역할을 겸하는 '황제'의 경우 황실의 번창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후궁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조정에서의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명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정치적 노림이 들어간 총애는 일편단심일 수도, 영원할 수 없다. 이를 알게 된 견환은 폐위된 채로 출궁 하게 되고, 출궁 한 후에서야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군왕, 황제의 동생이자 선황의 17 황자)을 만난다. 그리고 궁 밖에서 가장 행복하고 화목한 시절을 보낸다.

 

견환은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과군왕과 부부의 연을 맺으려 하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군왕은 황제의 명으로 변경으로 떠난다. 과군왕을 기다리는 견환은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어 기뻐하지만, 과군왕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견환은 과군왕의 죽음이 조작된 사고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위해, 또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유배 중인 자신의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궁에 돌아갈 결심을 한다. "윤례(과군왕)가 말한 적 있어. 폐하가 잠결에 내 이름을 불렀었다고. 잘될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부딪혀 봐야지. 난 폐하의 손과 폐하의 권력을 이용해서 복수할 거야. 궁으로 돌아간다.(53화 中 견환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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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견환의 환궁이 결정되고, 길일을 받는다. 그런데 그때 과군왕이 살아 돌아온다. 견환은 절망하지만, 돌이킬 수 없기에 그의 정인을 밀어낸다. 견환의 행복은 황제에 의해 한 순간에 끝을 맞이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궁에 들어간다. 이때의 견환에게서는 과거의 순수했던, 사랑을 꿈꿨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전의 견환은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그저 무사히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남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숨만 지키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환궁 후 견환은 복수를 위해 내명부 암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황궁은 평탄하게 살 수 없는 곳처럼 묘사된다. 순수한 마음으로만 살아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다. 이제 견환은 비정한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럼없이 계략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견환은 황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내명부의 권력을 장악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간다. 황제의 말 한마디(총애)에 여인들의 삶이 결정되기에, 견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견환은 더 이상 황제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증오해마지 않는 황제와 함께 살아간다. 황제 또한 견환에게 이전과 같은 순수한 사랑을 받지 못하자, 견환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의심한다. 결국 황제에 의해 견환은 자신의 손으로 (의도치 않게) 과군왕을 죽이게 되고, 견환의 사랑과 행복은 황제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다. 궁극적으로 황제는 (녕빈 섭란의가 황제의 약에 독을 탄 사실을 묵인하고, 임종 직전 황제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견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견환은 태후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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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견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조리한 시대 속에서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일들을 통해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오른다. 극의 끝에서 견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러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피곤하구나, 좀 쉬어야겠다. (76화 中 견환의 대사)"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한 건 견환뿐만이 아니다. 다른 여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화비 연세란의 경우, 대장군 연갱요의 동생으로 대단한 권세를 자랑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연세란은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황제가 다른 후궁을 총애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를 미워할 수는 없어 다른 후궁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화비에 대한 총애는 황제가 연갱요를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황제와 태후는 공신인 연갱요에게 너무 많은 힘이 실리지 않게끔, 그 동생인 연세란이 아이를 가지자 유산을 시키며 (이 과정에서 다른 후궁인 단비가 그 누명을 쓴다.)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연세란은 "폐하... 폐하! 제게 정말 너무하십니다! (42화 中 연세란의 대사)"라는 말을 남기며 벽에 부딪쳐 자진한다.

 

의수황후의 경우 자애롭고 너그러운 현모양처로 그려지지만, 그 또한 황제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비밀리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연세란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의수황후의 악행이 종국에 밝혀진 후, 황제와 대화하는 장면이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신첩의 것이었던 복진 자리를 언니(순원황후)가 빼앗았고 신첩 아들의 것이던 태자 자리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지아비의 사랑마저 빼앗겼죠. 신첩도 만족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중략) 폐하의 잘못은 신첩을 왕부에 들인 게 아니라, 언니를 왕부에 들이고 언니만 총애한 겁니다. 언니와 신첩을 함께 맞으시다니요. 누구보다 영명하신 폐하께서 자신의 일은 그리 모르십니까? (중략) 폐하, 황후의 자리와 나 자신을 지켜 내고 폐하께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신첩 또한 아무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어요. 현모양처인 척 연극하는 게.. 신첩에게는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고요! (72화 中 의수황후의 대사)" 이러한 대사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해당 드라마에서의 '악'은 그 당시의 시대상이다.

 

화비 연세란을 위해 온갖 계략을 세웠던 귀인 조금묵 또한,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으로 그려진다. 총애를 얻지 못했던 조금묵은 자신의 딸(온의공주)을 위해 권세를 가진 연세란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연세란을 배신하고 견환에게 조력하는 이유도 딸을 살리기 위해서다. 견환과 함께 입궁해 자매 같은 사이로 지냈던 안릉용 또한 처음에는 순수하고 겁이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궁의 암투 속에 휘말리면서 점점 변해간다. 의지할 만한 가문도, 뛰어난 (황제가 좋아할 만한) 미색도 없었기에 의수황후에게 의지하고,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날 독하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사실 조금 억울했던 것뿐이에요. 소리 없이 남의 발판이 되는 게 싫었고, 소리 없이 살아야 하는 게 억울했어요. 총애를 얻어야만 했고... 폐하와 황후 그리고 날 이용하고 우습게 아는 자들이 미웠어요. 황후가 날 돕는 게 아니란 걸 왜 모르겠어요. 폐하가 날 사랑한 적 없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궁궐에 진심이란 게 있긴 할까요? (68화 中 안릉용의 대사)"

 

<후궁견환전>의 여인들은 황제(남성)의 권력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황제의 한 마디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고,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받는 대로, 받지 못하면 받는 대로 저마다의 고충이 뒤따른다. 무정한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저마다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실천한다. 여기서 누가 선인이고 악인인가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며, 생존을 위해 저마다 노력한다. 여기서의 생존은 황제의 총애, 가문의 입지, 자신의 목숨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있다. 부조리한 시대 아래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여인들은 피할 수 없는 대결에 휘말리며, 이들의 모든 선택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결국 황제의 한 마디에 의해 세워지고 스러지는 것이 이들의 삶이었다. 자신의 삶을 옥죄는 자금성(시대)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얻어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남은 길은 한정적이었다. 그럼에도 <후궁견환전>의 여인들은 자신의 삶에 치열하게 임한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황제가 아닌 어의를 사랑했지만 그 감정에 적극적이었던 심미장, 연모하는 이를 두고 입궁하여 복수의 칼을 가는 섭란의 등.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펼쳐진다.

 

 

 

<녹비홍수> : 그 마님은 왜 사당을 불태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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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비홍수>는 성씨 가문의 서녀 '성명란'의 일대기다. 고대 중국(송나라) 여성들의 규방 속 삶, 그중에서도 서녀 ‘성명란’의 삶을 풀어내는 만큼 그 답답함은 크다. 명란의 친어머니 위서의는 성굉의 세 번째 부인(첩)으로, 성굉은 두 모녀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러던 중 두 번째 부인 임금상의 계략으로 위서의는 명란의 동생을 출산하던 중 죽게 된다. 이후 명란은 할머니(노마님)에게 교육받으며 자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명란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항상 자신을 낮추고, 억울한 것들도 다 참고 견딘다. 이후 결혼을 할 나이가 된 명란은 대단치 않은 집안의 서녀라는 이유로 첫사랑(제국공부 외아들 제형)을 포기하게 되고, 이후 명란은 어릴 적부터 그와 인연이 있었던 녕원후부의 둘째 아들 고정엽과 부부의 연을 맺어 고씨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건 단연 '규방 암투'다. 명란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암투를 목격했고, 이후에도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숨 죽이며 때를 기다린다. 또한 고씨 집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각종 암투에 안주인으로서 지혜롭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대극이기에 ‘아녀자는 바깥일을 상관할 바 아니다’라는 가치가 지배적인데, <녹비홍수>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드라마에서 규방은 규방으로만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 안채 일은 안채만의 일이 아니다. 규방과 조정, 안채 일과 바깥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가족사,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삶을 다루는 만큼 그 내용은 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녹비홍수>는 이를 사회와 연결시켜 짜임새 있게 그려낸다. 해당 지점에서 여인들의 사적 공간과 사내들의 공적 공간이라는 분리 체계가 무너지고, '규방 암투'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녹비홍수>가 73부작이라는 긴 호흡 동안 일관되게 보여주는 건, ‘가家'의 체면과 명성을 위해 집안 내 약자(여성)를 억압하고, 진실을 덮는 (가부장적) 모습이다. 보수적인 시대상 속에서 여성 수난사는 가정 안으로 봉합된다. 개인이 익명이 되고, 또 축소되면서 모든 불평등과 불공정함, 온갖 부조리가 개인의 희생으로 없어지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악역은 규방 암투에서 칼을 들고 있는 여성들이지만, 그 이면의 진짜 악역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명란이 자란 성씨 집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는 아버지 성굉의 우유부단함에 의한 연쇄다. "저는 아버지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알아요. 아버지께 중요한 건 집안의 명성이란 것도, 아버지가 가진 재능의 한계와 허세도 너무 잘 알고 있죠. 귀도 얇고 결단력이라곤 없어서 아녀자들 싸움에 관심 없는 것도, 확실한 이익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요. 그냥 살던 대로 계속 물에 물 탄 듯 사시면 되지, 뭘 자꾸 캐물으세요? (65화 中 성명란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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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란이 고정엽과 결혼을 하고, 후작부 고씨 집안에 들어가서 일어나는 일들 또한 그 원인은 '고씨 가문'이라는 가부장적 허상 그 자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소진씨가 고씨네 사당을 불태우며 절규하는 장면은 <녹비홍수>가 어떠한 면을 조명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드라마의 최종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소진씨(고정엽의 계모이자 명란의 시모)가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가문’이라는 가부장 그 자체)에서 울부짖는다. “형제는 허물없이 우애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나라에 충성할지니 가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이 후작부는 악마의 소굴이야. 내 언니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데, 가문을 살리겠다고 이 집안은 백가 여식을 맞아서 아이까지 낳고선 내 언니를 버렸어. 이 집안은 백가 여식과 내 언니를 죽음으로 몰고선 나까지 망치려 했어. 이 큰 집에서 평생 가면을 쓰고 더러운 버러지처럼 살았어. 진정한 나로 산 적이 없었어. 기생도 이렇게 비루하게 살진 않아. 이제 진정한 나로 살 거야! (73화 中 소진씨의 대사)” 소진씨의 절규와 그 죽음을 목도한 명란은 눈물 흘린다. 명란이 자신의 적이었던 소진씨를 보며 눈물 흘렸던 건, 당대 여성의 현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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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대가 시대니만큼, 어찌 보면 이 모든 암투의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는 ‘남성’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다. 집안의, 가문의 남자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러니 규방으로 공간화된 여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불을 보듯 뻔하다. 결론적으로 <녹비홍수>는 해피엔딩이다. 불태워져 무너진 사당을 재건하고, 가족이 모인다. ‘평탄한 날’의 시작이다. 명란이 꿈꿔 왔던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이 시작된다. 결국 ‘가족’으로 돌아가는 결말이지만, 드라마는 시대의 담론 속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려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특히 <녹비홍수>에서 인상적인 건, 남녀 간의 애정을 그리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건 여성들이다. (남녀관계에서 사랑과 이상에 빠진 남성들을 작중 여성들이 현실로 이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시대가 원하는 여인을 연기해낸다. 당시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아비를 섬기는 것이다. <녹비홍수>의 여인들은 지아비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현실(지위, 자식 등)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 규방 암투는 지아비를 차지하기 위한 투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으로 묘사된다. 해당 드라마에서 감정 놀음을 하는 건 오히려 남성이다. 여인들의 현실을 경험하지 않기에 가능한 처사다.

 

 

 

이쯤 되면 '암투물'이 아니라 '정치물'


 

<후궁견환전>과 <녹비홍수>는 그 양상은 다르지만, (<후궁견환전>에서 남녀 간의 진실된 애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반면 <녹비홍수>에서는 남녀 간의 진실된 애정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둘 다 보수적인 시대상 속에서의 여인들의 수난사를 다루며 은근한 진보성을 드러낸다.

 

우선 소재 자체가 ‘규방암투(閨房暗鬪)’이다 보니 주요 인물이 전부 여성이고, 그렇기에 인물들의 스펙트럼이 넓다. 누구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이 입체적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주요 인물이 남성인 이야기에 어쩌다 한두 명 등장하는 여성들의 캐릭터성과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소재 특성상 ‘여성 수난사(억압)’가 필연적으로 다뤄진다. 그렇기에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상,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이나 그 결말이 보수적일 수 있으나 ‘여성 수난사’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진다. 즉,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단순한 구도를 답습하지 않고, 여성들의 암투를 만들어 낸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가시화한다.

 

물론 당시의 여성들을 얽맨 굴레는 사라지지 않는다. <후궁견환전>에서 견환은 태후가 되었지만,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새로운 후궁들이 들어온다. <녹비홍수>에서도 무너진 사당을 재건하며 가족이 모인다. 또다시, 또 다른 여인들의 생존기가 그려질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쉬어야겠다고 읊조리는 견환과, 가족들을 바라보며 평탄한 날을 기원하는 성명란의 얼굴이 쉬이 잊히지 않는 이유다. 또다시, 또 다른 수난사가 기다린다. 이를 단순히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물'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녹아든 여인들의 삶이 너무나도 고되고 치열하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정치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토록 매력적인 드라마를 보지 않을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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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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