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자전거 도둑', 그들이 찾는 것은 자전거인가 도둑인가? [영화]

글 입력 2021.02.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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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분명 문학과 차별화되는 매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텍스트’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 실감한 건 한창 고전 영화에 빠져 영화사의 연표를 거슬러 가던 적이었다. 네오 리얼리즘의 정수로 꼽히는 <자전거 도둑>은 필름 자체가 당대 사회에 대한 커다란 은유로 '읽히는' 체험을 안겨주었다. 화려한 시각 및 음향 효과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영화가 가진 문학성이란 필시 생경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란 본디 ‘읽을’ 가치가 있는 하나의 은유적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를 함께 읽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지나치게 인간을 닮은 탈 것,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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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전거 도둑>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도둑맞음으로써 곤욕을 겪는 가장 안토니오를 주인공으로 한다. 공교롭게도 한국에는 영화 <자전거 도둑>과 동일한 제목의 문학 작품이 두 개 존재한다. 하나는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으로, 순진한 아이의 시각으로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른의 부도덕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둘째로 소설가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은 실제로 영화 <자전거 도둑>을 과거 회상의 매개로 삼아 전개된다. 자전거를 훔쳐 타는 동네 에어로빅 강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서민적인 아픔과 유년 시절의 상처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영화 <자전거 도둑>과 더불어 이 두 소설을 비교하면 다소 유사점이 발견된다. 자연히 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오브제인 ‘자전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세 작품에서 모두 자전거는 과거 소시민들의 간절한 이동 수단으로 묘사된다. 속절없이 빨라지는 세상에 발맞추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탈 것이다. 그러나 가속을 붙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을 저어야만 한다는 것이 자전거가 지닌 결핍이다. 온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발을 굴러도, 세상의 속도에는 차마 닿지 못하는 것이 빈민들의 현실임을 보여준다는 듯, 무르고 얇은 체인은 끝없이 삐걱댈 뿐이다. 두 소설 <자전거 도둑>이 모두 1990년대 서울의 도시 빈민들과 자전거 속에 녹아든 이들의 애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작인 <자전거 도둑>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오히려 그런 자전거의 뼈 아픈 한계를 즐기는 형태의 스포츠나 여가 활동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주인공들에게는 퍽 씁쓸한 광경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자전거는 분명 가장 인간적이며 인간을 닮은 탈 것이란 것이다. 영화 주인공 안토니오에게 자전거란 삶의 의지 그 자체이다. 어렵게 찾은 삶의 돌파구를 상징하는 자전거와 이를 도둑맞는 상황은 그렇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자전거’를 매개로 하여 표현되었지만, 이는 어쩌면 눈 깜짝할 새에 흩어지고 마는 희망을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읽을' 수 있다면 영화 내내 자전거를 쫓는 주인공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속절없어 보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픽션, 현실 같은 비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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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은 1948년, 폐허가 된 도시에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이탈리아 시민들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이 영화는 ‘네오 리얼리즘’의 경향 속에서 탄생했다. 네오 리얼리즘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리얼리즘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즉, 예외보다는 일상을, 영웅적 인물보다는 평범한 인물을, 꾸며진 상황보다는 당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이로 인한 절망이나 인간성의 파괴 등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전거 도둑>에서는 이러한 전형이 그대로 나타난다. 먼저 2년 간 무직으로 살아야 했던 주인공 안토니오의 어찌 보면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자전거 도난 사건을 다뤘다는 1)소재의 측면에서 지극한 일상성을 띄고 있다. 또한 주인공들이 로마의 도시 빈민의 신분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에서는 2)인물 측면에서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어떠한 신분의 상승 없이, 아니, 오히려 자전거와 아버지로서의 지위마저 잃은 더욱 비참한 빈민으로 종결된다는 3)주제적 측면에서 평범한 인물의 절망과 파괴적인 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전거 도둑>은 네오 리얼리즘의 집약체와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독특한 다큐멘터리적 특징으로 ‘건조한 시선’을 또한 꼽고 싶다. 감독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듯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로마 실업자들의 절규와 분노, 난무하는 생계형 범죄, 전당포 앞에 늘어선 빈민들의 무기력한 표정을 카메라는 일상적인 샷사이즈와 일정한 속도의 워킹으로 건조하게 비춘다. 특히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자전거 도둑을 찾는 여정, 즉 이 모든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에도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폐허가 된 빈민들의 터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그 어떤 드라마틱한 움직임 없이 그저 아이레벨에서 느지막한 핸디로 주인공들을 따라간다. 이 영화가 흔한 신파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극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빈민을 바라보는 시선과 빈민들의 불행한 서사의 대조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파도에서 네오 리얼리즘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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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할리우드 중심의 세계 주류 영화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영화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오 리얼리즘은 할리우드의 무자비한 장악력에 브레이크를 걸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먼저, 현실을 왜곡하는 할리우드의 드라마적 표현을 비판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네오 리얼리즘이 당시의 주류와 다른 영화적 미학을 추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 여과없이 드러난다. <자전거 도둑>은 특유의 느슨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주인공 안토니오와 그의 아들 브루노의 이동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는 구조적 뼈대는 존재하지만, 영화의 흐름에 기여하지 않는 인물들이 산발적으로 뛰어 든다. 예를 들어 일자리를 외치는 벽돌공들과 이들에게 자신의 탓을 하지 말라며 항변하는 직업 소개 사무소 직원은 영화적 배경에 해당하는 부조리를 드러낼 뿐, 서사의 어떠한 연결고리도 잇고 있지 않다. 자전거를 찾을 수도 있고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던 점술사나, 사소한 도난 사건엔 신경도 쓰지 않는 경찰관 역시 당대 사회의 부조리나 비이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안토니오 부자의 현실을 보여주는 역할만을 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명확한 인과관계 속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잘 짜여진 상태’로 모든 요소가 연결되어 있지만, <자전거 도둑>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도시 빈민들이 주인공 부자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런 의도적인 서사적 느슨함이 네오 리얼리즘, 그리고 <자전거 도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며, 이는 할리우드 서사 조직 방식과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부조리와 비이성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부자는 마치 단 하나의 희망, 혹은 이러한 사회를 벗어날 열쇠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독특한 ‘여행의 구조’는 어두운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부자가 찾아 헤맨 것은 '자전거'인가, '도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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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감출 수 없는 씁쓸함과 함께 떠오른 질문은 '그들이 진정으로 찾아 헤맸던 것은 무엇인가?'였다. 자전거가 없이는 직업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도둑을 찾아 물건을 돌려 받고, 그를 응징하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유만 존재했다면 이 작품이 '읽어야만 하는 영화'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전거를, 즉, 이 부조리를 뒤집을 희망의 열쇠를 찾아 방황한 걸까. 아니면 도둑을, 그러니까 부조리를 낳은 원인을 쫓은 걸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건조함의 대명사, 네오 리얼리즘 작품에서 이러한 거대한 은유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다시금 영화의 힘을 상기시킨다. 1948년이라는 제작 년도가 무색하게도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분리해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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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쫓은 것일까, 도둑을 쫓은 것일까. 부조리의 출구를 찾아 헤맨 것일까, 부조리의 입구를 찾아 헤맨 것일까. 생각이 문득 많아지는 질문이네요. 개인적으로 둘 중 어느 것을 쫓았든, 프레임 밖에서 브루노도 그런 아버지 뒤를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쫓았으리란 생각도 드네요. 자전거 혹은 도둑을 쫓던 아버지가 결국 자전거 도둑이 되어서야, 브루노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비슷한 보폭으로 걷게 되는데 이 때 카메라가 이들 부자의 뒷모습을 애써 뒤쫓지 않고 그저 그 둘이 거리의 군중들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질 때까지 건조하게 자릴 지키고 있던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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