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유행

글 입력 2021.02.2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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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을버스 뒷좌석에서 초등학교 5~6학년쯤 되어 보이던 학생들이 떠드는 걸 우연히 들었다. "얘는 X라 예쁘지 않냐?" "얘 얼굴 토나옴. 이거 다 뽀샵이야" "얘 X나 예쁘지도 않은데 귀여운 척 함, 맨날. 토나올 것 같아"


온통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카톡 목록에 있는 사람들의 프로필사진을 서로 비교하며 일명 얼평과 외모 뒷담을 하고 있었다.

버스좌석에 앉아 홀로 충격을 받고 있을 때 버스는 급정거를 했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 내 등을 살짝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뒤돌아보니 그 초등학생 무리들 중 한 명이 나도 모르게 떨어진 화장품들을 주워서 이거 떨어뜨리셨다고 친절하게 주어주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방금 전까지 험한 단어들로 얼평을 하고 욕을 하던 학생은 어디 가고 굉장히 공손하고 사람 배려할 줄 아는 착한 학생이 나타났다. 도대체 사람의 악함의 기준은 무엇이고 우리는 과연 그 기준만으로 악함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런 모순과 아득함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우연히 어떤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는 어린 학생들의 성차별적 혐오 단어 사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 글의 요지는 혐오 단어를 쓴다고 해서 그 아이가 특정성별 혐오주의자라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내 경험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은 글이었다. 내가 보았던 초등학생들은 대화내용으로 보아서는 여러 모로 충격적이었지만 예의범절에 관해선 나무랄 데가 없이 잘 교육받은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혐오 표현과 발언을 하는 것일까?

 

혹 아이들이 그들의 무리에서 눈에 띄기 위한 방식은 아닐까. 내가 어렸을 적 다녔던 한 초등학교에서는 특정 기간에 친구들끼리 쉬는 시간에 나가서 서열을 정하기 위한 싸움, 일명 맞짱을 뜨고 자기네들끼리 서열을 정하고 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 주먹을 겨룬 후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결국 과거의 이 원초적이었던 서열 정하기가 방식이 특정성별을 비하하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인정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을 뿐 그 목적은 여전히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싸움과 언어 사용의 방식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몸싸움은 더 이상 사회에서 인정받는 수단이 되지 않으며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는 그렇지 않다. 혐오 언어는 여전히 사회의 서열 경쟁에서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세우고 타인과 어울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유효한 효과를 거두고 있고,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효한 효과는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다루어졌던 비속어 문제로 설명되지 않을까. 공중파 방송 혹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가벼운 비속어는 소년만화의 한 장면처럼 학생들만의 순수함, 의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어왔다. 특히 굉장히 쿨하고 멋진 주인공들은 비속어를 맛깔 나게 씀으로써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방송매체들을 통해 비속어 사용의 긍정적 이미지는 강해져 왔고, 이는 곧 현실에서의 학생들의 비속어 사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비속어처럼 혐오적 단어 사용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아*** tv, 유** 등 인터넷 방송에서는 성별 혐오 단어를 비롯한 비속어를 아무런 제재 없이 남발하며 마치 그게 멋있고 폼 나는 것처럼 표현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그 사람들의 언어 사용을 모방한다. 그러나 이 시청자들이 어른들만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 폰을 접하는 요즘 세대에 방송매체에 노출되는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그리고 스펀지같이 빨아들이는 어린 세대는 앞으로는 더욱더 어린 나이에 혐오 언어를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태의 한 가지 분명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방송 매체가 아닌 사회에 그리고 어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왜냐, 방송은 대중이 선호하는 것을 만들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애쓴다. 그 말은 방송을 만들어 내는 사회가 그리고 그걸 보고 만드는 성인들이 혐오를 선호하고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혐오를 대물리고 학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 대하여 우리 어른들 중에는 저들이 우리를 혐오하기에 우리도 똑같이 저들을 혐오함으로써 복수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혐오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혐오로 혐오를 끝낼 수 있을까.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지 끝을 내진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성별간 세대간 그리고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언어를 통한 복수는 충분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다음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제는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인 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 그리고 그에 대한 실질적 법과 제도를 만들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혐오의 종식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어른들은 스스로의 자각과 반성을 통해 더 이상의 혐오가 번지지 않도록 종점을 찍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송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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