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의 자리엔 다른 것이 남는다. - 진리의 발견 [도서]

인간의 무작위성과 에밀리 디킨슨이 상처를 말하게 된 과정.
글 입력 2021.02.1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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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성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몇 발짝 떨어진 채 보이지 않는 삶의 실마리로 작용한다. 무작위성을 드러내는 게 어려운 이유는 무작위의 흔적이 빚은 관계를 논리적·감각적 맥락으로 엮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계를 넘게 되면 과잉 해석의 혐의를 받거나 맥락의 당위가 의심받기에 더욱이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마리아 포포바가 책을 통해 끄집어낸 인간 존재과 존재론, 그리고 무작위성 속에서 발견한 연결점은 이런 곡절을 보란 듯이 딛고 일어선다. 작가는 책에서 언급한 인물들이 생애 내내 부딪힌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벽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개별 존재의 유의미한 시도(우리가 흔히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를 ‘인간’이라는 의미로 환원한다. 이는 보편성을 운운하는 얘기가 아니라, 여전히 소외되고 구분된 위치에 존재하는 우리들을 위한 ‘인간’에 대한 얘기다. 여기엔 결국 사랑도 포함돼 있다.

의미만큼 두꺼운 이 책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조각을 떼어서 얘기하는 식이 나로서는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감당해낸 사랑과 상처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며 그가 “상처를 진정시키기 위해 상처를 이야기”하게 된 시간을 감각해본다.
 
 
 
문학의 공적인 삶에 자신을 소환하는 에밀리 디킨슨

  

 

위대함을 품은 구절은
명료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40년 전인 1862년 봄,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여성 권리 옹호자인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애틀랜틱 먼슬리에 실은 젊은 기고가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문장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히긴슨의 글을 읽지만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놓지 않는다. 동시에 디킨슨은 “미지의 작가들에게 문학의 공적인 삶으로 나오라는 히긴슨의 초대장을 읽”고 그에게 시와 편지를 보낸다.
 
 
정신은 자신과 너무도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보지 못합니다. 물어볼 사람이 아도 없어요. 이 시가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시간을 내서 말해주신다면 감사하겠어요.
 
선생님-친구에 대해서 물었지요-언덕과-일몰과-아버지가 사준 나만큼이나 몸집이 큰 개가 있어요. 이 친구들은 사람들보다 나아요-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모든 비평을 환영한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태도는 자기 갱신을 놓지 않으면서 타인의 평가를 자기 굴레로 옭아매지 않는 담대함을 지녔다. 히긴슨이 디킨슨의 시에 대한 비평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디킨슨은 말한다.
 
 
 사람들은 뼈에 대한 칭찬을 들으려고 외과의사를 부르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 뼈와 골절을 고치는 일이 더 중요해요.
 


에밀리 디킨슨의 공포(terror)

 

에밀리 디킨슨이 히긴슨에게 남긴 편지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에게는 공포가 있습니다- 9월 이후로요-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노래를 해요. 모지 옆에서 소년이 하듯이요- 두렵기 때문이에요.
 

디킨슨이 얘기한 공포(terror)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도 지속되는 심각한 공포를 지칭하는데, 작가의 말처럼 그렇게 자신의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이가 ‘terror’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면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생각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설이 있었지만 유력한 흔적은 바로 케이트 스콧 앤손에 대한 에밀리의 강렬한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게 단단하게 만들어진- 꿈이라면- 그저
천국을 증명하는 거야-
혹은 내가 그녀를 꿈꾸었던 것이라면-
상상의 힘을 증명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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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내는 일은 느린데 잃어버리는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나.
 
 
아프지만 피할 수 없었던 사랑을 그는 온몸으로 받아냈다. 사랑의 조건은 우선 그 감정을 응시하는 것인데(이는 그렇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고, 의지와는 별개이다.) 디킨슨은 그걸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과 거절의 과정에서 절실하게 공포와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에밀리는 히긴슨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를 잃어본 적이 있다면- 선생님-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거예요.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숨을 쉬지 않는 죽음은 숨을 쉬는 죽음만큼 차갑지 않아요.
 
 
혼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 어떤 갖은 환상에 잠기게 하는지 그녀는 얘기한다.
 
 
마녀의 부재가 마법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런 디킨슨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을 일부분만 돌려받는 일조차 거절”이었다. 그는 그런 과정에서 어떤 서글픈 희망을 본 걸까.
 
 
우리가 다시 결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그 자신에 이끼를 심어야 할까? 우리는 아마 조금 달라져 있고, 조금 나이가 들어 있겠지. 하지만 여전히 똑같을 거야. 우리 삶과 상실 사이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말이야. 그리고 제비꽃처럼…
 

히긴슨 역시 사랑을 포착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불가능한 사랑을 칭송하고 보답받지 못한 마음을 그리는 시를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애정이 부여하곤 하는 기대의 불균형을 통렬히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긴슨은 이를 두고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에게 사랑을 너무 많이 주니, 이 얼마나 슬픈 불만인가.”라고 얘기했다.
 
 
 
공포 그 이후, 상처를 이야기하는 존재.


디킨슨이 이별과 거부, 전쟁을 겪으며 느낀 ‘공포(terror)’는 그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 뭔가를 망실하고 있음을 얘기해 준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남긴 디킨슨의 흔적은 그녀가 지침서로 삼았던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시의 전언을 스스로 증명한다.
 
  
슬픔을 통해 우리는 천상으로 성장한다. 단순한 희망과 가장 평범한 인내심으로 슬픔을 극복하면서.
 

디킨슨이 처음 시를 발표한 잡지의 편집자인 새뮤얼 볼즈는 그와 가장 긴밀하게 편지를 나눈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사랑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볼즈는, 수신인이 지워졌지만 힘든 사랑을 겪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의 과업은 우리가 주어야 하는 것,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일이야. 그로 인한 보답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주는 것을 돌려주지 않아. 어떤 이들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줘. 그러니 장부의 계산은 스스로 균형이 맞게 되어 있어.
 

이 편지가 디킨슨에게 닿았다는 판단은 온당하다. 같은 시기 디킨슨의 다른 편지에서 “마음의 헌신”에 대해 얘기하며 고양된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멈출 수는 없어! 내 과업은 사랑하는 일이니까. 오늘 아침에 정원 끝자락의 작은 덤불 아래, 저 아래에서 새를 봤어. 나는 물었어, 무엇을 위해 노래하니, 아무도 ‘듣고’있지 않은데? (...) ‘내 과업은 노래하는 일이야.’ 그러고는 날아가 버렸어.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한때 그 자신도 새였던 참을성 있는 천사였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새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박수를 쳐주었을까?
 

이 사랑과 그 찬란한 파생물들을 보여주는 것은 이 책의 일부이다. 이렇게 커다란 일부를 가진 책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요조 작가의 말처럼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는지. 연초부터 참 큰 책을 만났다.

 

 

 

조원용 컬처리스트.jpg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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