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스물다섯, 그리고 졸업이다.

스물다섯 첫해의 생각
글 입력 2021.01.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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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물다섯. 그리고, 졸업이다. 이 두 단어는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런데 둘이 한번에 다가오니 숨이 컥 막혀버렸다. 누가 보면 이제 인생 끝났다ㅡ싶을 정도로 바둥거리고 있다. 그런데 콱 죽어버릴정도는 또 아니다. 집채만한 돌덩이처럼 크고 무겁지도,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처럼 가볍지도 않다. 그냥 딱, 내 몸무게만큼이다. 나는 나를 하나 더 이고 산다. 흐음ㅡ이게 인생의 무게라는 건가? 하고 혼자 너스레도 떨어본다. 거울에 대고 손가락으로 웃음을 만들던 조커가 떠오른다. 더 이상 바둥거리지도 않고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축 처진 그가 떠오른다. 손가락, 웃음, 작살, 물고기. 더 이상 웃기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아직 가벼우니까, 하고 위로를 해봤다.

 

 

2.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독기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항상 바둥거렸고 어그러진 자존심을 들고 어미 잃은 아이처럼 흐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독기 있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건 사실이니까. 독이 차고 차고 차올라서 넘쳐흘러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나는 순하지도 독하지도 못하다. 나는 성인(聖人)도 영웅도 아니다.

 

 

3.

정극과 희극 어딘가의 인생.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쯤으로 가야 할까.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해온 것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없다. 한번 더 겪을 자신이 없다. 더 최선의, 더 현명한, 더 합리적인. 나는 돌아가는게 아닌 그저 머무르고 싶다. 매듭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 더 멀리······. 매듭은 없었다. 마음을 동여맨다.

 

 

4.

정준일의 <꿈>을 듣는다. 내가 이 노래에 공감해도 되는 걸까? 나는 예술가도 아닌데? 응?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가이다. 아니, 그도 예술가인가? 그도 예술가가 아니라고 노래했는데. 그래, 모욕당하는 사람들이다. 꿈에게, 사랑에게, 실패에게, 운명에게, 나에게. 모욕을 동여매고 상처를 토해낸다. 토악질 한번에 모욕 한번. 시간을 늘여간다. 토하지 못할까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고고한 척 하지만 변태적인. 새는 뼛속부터 날아오르려는 몸짓이다. 뼈도 비어있고 배설물도 비워낸다. 저 자그마한 솜덩어리도 온 몸을 비워가며 날아오르는데, 나는 어째 토악질 한번도 시원하게 못하는지! 마음껏 게워내야 날 수 있다. 그런데 다 게워내면 지쳐 죽을 것 같은 예감은 무엇일까. 여전히 나는 독을 차지 못했다.

 

 

5.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키우면서도 선선히 독을 차고 가리라던 김영랑 시인은 날 보면 무어라 입을 열까. 저 먼 세상으로 떠나신 1950년 지금은 2021년. 요즘 것들 많이 편해졌다 하시려나 편해져서 고마웁다 하시려나. 꾸지람도 어여쁨도 모두 내 차지는 아니다. 나는 이 곳에서조차 이방인이자 조연이다. 방랑할 수도 소속될 수도 없다. 아직 나의 모란은 피지 않았나 보다.

 

 

6.

공포는 욕망에서 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욕망이며 질책에 대한 공포는 칭찬에 대한 욕망이다. 인간사에 기록된 무수한 영광들은 모두 이 공포와 욕망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미래를 꿈꾸게 하고 공포는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준다.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은 가장 어려서부터 극복과 절제의 대상으로 학습된다. 두려움은 떨쳐내고 욕망은 억누르며 살아야 한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선과 악. 삶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니, 사실 나누어지면 좋겠다.

 

예전에 미대입시를 준비하던 친구에게 종이도 앞과 뒤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잠시의 의심을 했지만 직접 만져보니 정말이었다. 앞과 뒤는 아주 묘하게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는 아주 꽤나 미묘해서, 이걸 진짜 혼자 구별할 수 있냐 물었다. 친구는 자신도 아직 헷갈려 한참을 들여다본다 말했다. 이런 말들이 무색하게도 미술선생님은 단박에 해냈다. 그 이후로는 그것을 생각할 일이 없었기에 앞뒤구분이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인지 유난히 잘 알아채는 이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가끔, 아니 사실 매일 바란다. 제발 그것이 경험으로 채워지는 일이기를. 앞과 뒤의 구분 정도는 살면서 채워나갈 수 있기를. 나아갈 길의 옳고 그름은 익혀지기를. 내 공포와 욕망을 알아챌 수 있기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나아가서 그에 먹히지 않기를. 다시 떠올려본다. 여전히 나는 가벼운지를.

 

 

[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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