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편소설 읽기 [문학]

단편소설이 트렌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글 입력 2021.01.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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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편소설을 여러 편 읽었다. 그리고, 단편소설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어렸을 땐 지금보다 집중력이 높았는지 긴 소설들을 곧장 읽어 내려가곤 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해리포터 시리즈, 삼국지 이야기 등... 한 사람이 만들어낸 거대한 세상에 쉽게 잠수해 정신없이 수영하다 나오곤 했다.


강산이 한 번쯤 바뀌어가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나도 사회도 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짧은 것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매일 수십 장씩 활자가 빼곡한 종이신문을 읽던 나는 이제 핸드폰 속 기사 몇 개를 깔짝깔짝 보고 만다. 8부작, 16부작으로 구성된 드라마의 흐름을 당최 끝까지 보기가 힘들어 밥 먹는 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을 보유한 웹드라마만 보게 된다.

 

언젠가부터 소설책도 멀리하게 되었다. 장황한 묘사만 마주하면 머리가 아프고 소설이 으레 갖기 쉬운 용두사미식 결론에 분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하지만 긴 소설만 읽는다 하면 홀로 찡얼거리는 부정적인 감정은 마음을 괴롭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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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솜이 작가의 [자전거 와플가게]로 단편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언뜻 보면 어린이를 위한 동화 같지만 엄연한 어른을 위한 단편소설이기도 했다. 사실, 어른 어린이를 구분할 필요 없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일렁이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 한 편마다 음식이 한 개씩 주를 이뤘다. 와플, 카스텔라, 스트로베리 파이.. 매일 잠이 들기 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넘겨 읽었지만 늘 마음은 두둑해졌다. 처음으로 짧은 소설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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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읽은 단편소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따끈한 신작, [호모 콘피누스]이다. (‘호모 콘피누스’는 격리된 인간이라는 뜻이다.)


 

“3주라고 했었다.

3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모두 자가 격리 생활에 익숙해졌다.

인간은 원래가 적응에 능한 존재니까.

호모 사피엔스는 어느새 호모 콘피누스가 되어 있었다.“

 


끝이 명확하지 않은 자발적 격리 생활을 이어가며 ‘호모 콘피누스’의 인류 상을 읽는 기분은 남달랐다. 이렇게 현재의 코로나 사태를 비틀어 빨리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은 단편소설이기에 가능했다.


코로나가 유발하는 감정적 블루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상상은 늘 제자리를 맴돈다. ‘코로나 걸리면 어떡하지’, ‘코로나 걸려서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반복된 일차원적 상상에 갇히게 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저주가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 단편소설은 비록 유토피아를 그려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상상의 틀을 본격적으로 주무르며 미시적으로 모여있는 단편적 상상으로부터 탈피할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그의 글만큼 놀랐던 것은 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였다. 본인은 e북 플랫폼에서 자유롭게 내려받아서 읽었는데, 플랫폼엔 ‘책이 왜 열 페이지밖에 안 되나, 황당하다’, ‘이렇게 짧은 글은 블로그에나 끄적여라’, ‘짧아서 시시하다.’ 등 단편소설 형식에 대한 안 좋은 평가들이 난무했다.

 

‘짧은 것’, ‘속도감 있는 것’, ‘빠른 것’에 열광하는 현대 한국인들이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만큼은 왜 이리 박한지 궁금해지고 말았다. 짧은 영상과 빠른 데이터가 난무하는 시대에, 빨리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은 대세가 될 수 없을까. 짧은 이야기 뒤의 무한한 세계를 직접 이어서 상상해 보는 것이 그리도 불쾌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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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루키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로 대표되는 제목 길게 짓기 트렌드가 겹쳐 보여, 오래된 책임에도 꽤나 트렌디 해 보였다.

 

이 책에는 하루키의 단편이 무려 18편이나 실렸다. 그러나 소설 하나하나가 남다르고, 색달랐다. 분명 전반적으로 그의 향기를 담고 있는데, 다채로웠다. 하루키라는 유명 디자이너의 오 년 치 패션쇼 컬렉션을 이어 보는 느낌이었다. 어떤 것은 실험적이어서 감탄을 내지르게 만들었고, 어떤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따뜻해서 내 마음에 욱여넣고 싶었다.


단편소설은 덜 얽매였다. 소설이라면 으레 등장해야 할 죽음이나 사랑, 혹은 이별이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내 인생이 극적인 날보다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날이 더 많은 것처럼 단편소설도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면서도 권태를 종종 불러오는 내 일상성의 문제점을 단편소설의 재치 있는 일상은 해결해주었다.


단편소설을 읽고 나면 신기하게도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나도 이런 짧은 이야기 한번 써보고 싶다.’ 일상과 상상을 혼합해서 쭉쭉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된다고 해도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다. ‘단편소설이니까.’ 그 생각만으로 낯빛에 활기가 돈다.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단편소설들을 읽고 싶다. 단편소설집 한 권을 읽는 진도는 제법 빠르지만, 한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리는 것은 왠지 아깝다. 각양각색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앉은 자리에서 죄다 먹어버린 듯한 찜찜한 기분이다. 매일 쪼르르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처럼 잘근잘근 읽어 내리는 편이 더 낫다. (내가 단편소설을 주제로 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 뒤, 정말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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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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