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림은 그냥 그림이죠 - 로즈 와일리展

"그림은 대단한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글 입력 2020.12.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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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다 사람 내음 가득한 그림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싶었다. 천진난만함을 가득 머금은 웃음을 띠고 있는 거대한 그림들. 그녀의 그림들이 마음을 동하게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그림에 묻어난 에너지에 있을 것이다.


아무런 꾸밈없이, 아무런 화려함이나 고상함 없이 그저 그림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로즈 와일리Rose Wylie의 전시회 《Hullo Hullo, Following on》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어느 하나 쉽지 않았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던 시간들로 차가워진 마음에 포근하고 활기차기 그지없는 바람을 소복이 불어 넣어준 전시회였다.


 

Joe McGorty 2013 Rose Wylie 1.jpg

 


미술대학에 다니던 21세, 결혼과 함께 화가의 꿈을 포기해야 한 로즈 와일리. 세 명의 자녀들을 돌보며 집안일에 전념하던 그녀는, 45세가 되던 해 영국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졸업 후에도 아티스트로서 조명받지 못했지만 매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 2013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서펜타인 샐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영국 현대회화 작가에게 주는 상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존무어 페인팅 상’을 수상합니다. 이어 76세에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핫한 신예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면서 국제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서문)

 


로즈 와일리의 그림들은 캔버스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런 고민스러움 없이 작품 앞에 선 사람에게 고스란히 이야기한다. “Hullo!”라고 인사를 건네며 먼저 들려오는 이야기에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추고 시선이 가는 작품들. 거대한 크기, 그런 크기가 끌어안고 있는 꾸밈없는 천진난만함, 자유분방한 손길의 흔적들이 가득한 작품이 건네는 인사는 다른 곳에선 쉬이 듣지 못했던 발랄한 “Hullo!”였다.

 

 

Six Hullo Girls, 2017, Rose Wylie.jpg

ⓒSix Hullo Girls 2017 / Rose Wylie

 

 

문장만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그림을 그저 그림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그녀의 철학을 전시회에서 직접 작품을 마주하며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그러한 태도로 로즈 와일리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림 앞에서 ‘그림 이상의 무엇인가를 복잡하게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나’는 로즈 와일리 그림의 해맑은 미소 앞에서 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무런 꾸밈, 상징, 비유, 가식 없이 그저 그리고자 한 것이 그려진 로즈 와일리의 그림은 오히려 그러했기에 내 마음을 동하게 했다. 덕지덕지 올려진 두터운 안료와 캔버스 천 조각들, 물감이 번진 흔적과 붓질의 결이 솔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며 그려진 것은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의 순간들이었다.

 

일상적인 장면을 자유분방한 손길로 경쾌한 반란을 일으키며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 넣은 로즈 와일리의 그림 앞에서 “무엇을 그린 걸까?”라는 고민은 너무도 무용했다. 마치 그림책을 읽듯이, 많은 말 필요 없이 그녀의 작품은 그려진 그림 자체로 내 마음을 이끌고 있었다.


 

Cuban Scene, Smoke, 2016, Rose Wylie (Photo by Soon-Hak Kwon).jpg

ⓒCuban Scene, Smoke 2016 / Rose Wylie

Photo by Soon-Hak Kwon

 

 

로즈 와일리의 그림 앞에서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면 눈앞에 놓인 장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었는지 자유롭게 상상해보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저런 상상을 펼쳐내는 문장 역시 고상하고 구태여 논리적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날 있던 일을 크레파스로 그려 넣고 네모난 칸 하나하나에 서툰 글씨로 몇 문장의 일기를 써냈던 어린 시절의 그림일기처럼, 그저 그림을 그림으로만 읽어내고 말로 표현하던 마음으로 마음껏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로즈 와일리 예술에 대한 가장 좋은 응답이 되지 않을까.


로즈 와일리의 작품은 여러 의미로 그 자체로 그림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 아래에 쓰인 문장이나 인물 사이사이를 배회하는 글씨들을 보며 떠올린 단어였으나, 가만히 작품을 보다 보니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그림 자체가 작품에 남겨진 예술가의 일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1.jpg

Julieta(Film Notes) 2016 / Rose Wylie

 

 

깨끗하게 지우고, 수정하고 다듬어 최종적으로 선택된 부분들만 보여야 한다는 고정관념 없이, 로즈 와일리는 모든 과정을 작품의 일부로서 품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캔버스 곳곳에 쓰인 연한 글씨들, 덧붙여진 캔버스 천 조각들, 그림의 일부인지 로즈 와일리의 흔적인지(결국 둘 모두겠지만) 똑떨어진 듯 오뚝하게 솟아오른 안료들까지. 감추는 것 없이 모두 자신의 작품이자 예술로 오롯이 함께 두는 캔버스 위 향연을 보며 나도 모르게 사람 내음이 듬뿍 묻어난 그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하나 예술가의 손길과 움직임이 상상되는, 그야말로 누가 봐도 사람이 그렸고 사람이 잔뜩 만진 그림들이었다. 그러한 꾸밈없는 흔적들은 서툰 어색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캔버스 위에 담긴 이야기를 더 천진난만한 리듬으로 띄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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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와일리 그림의 천진난만함은 어른이 그렸다고는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림체만을 보면 그저 서툰 것 같고,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거칠고 호방한 것 같다. 한편, 그려진 장면은 그저 해맑고 천진난만하고 보이지 않던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누구나 목격할 수 있도록 듬뿍 담아낸 듯하다.

 

로즈 와일리의 그림은 평소의 삶 속에서, 어쩌면 다른 동시대 미술을 보면서는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많은 수식어와 단어를 마구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손길로 그러한 에너지를 오롯이 그려내는 그녀의 그림들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도 어색하게 겉돌지 않는다는 건 곱씹을수록 신기한 일이다.

 

 

Joe McGorty 2017 Rose Wylie 10 TIFF.jpg

 

“그림은 대단한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림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그림은 그냥 그림이죠.”


 

로즈 와일리는 한 인터뷰에서 작은 것 하나를 그리기 위해 다섯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림 속 소소한 대상은 결코 소소하게만 그려진 것이 아닌 것이다. 로즈 와일리의 말은 그녀의 그림이 단지 대충 그려진 것이 아닌 그림이 그림이기에 품을 수 있는 기쁨과 에너지를 담아내기 위한 열정과 노력이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었던 순간과 감정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언어와 자유로운 자신만의 표현으로 물 흐르듯 유쾌한 리듬으로 담아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과 열정의 결과는 늘 심오한 시선으로 미술을 바라보려는 나의 습관적인 시선에 잠시 STOP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림만으로 바라보며 감상하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한편 리뷰를 쓰는 내내 고민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로즈 와일리의 그림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었다. 물론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글을 쓸 때마다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글에 불쑥 드러내는 것은 꽤나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끝자락에서 이런 마음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만큼 그저 해맑고 즐거움에 가득 찬, 그림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그림에 대한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회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미술 작품을 보며 내게 일어난 여러 생각과 질문을 문장으로 정리하고 일종의 결론에 도달해보려 고민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내게 로즈 와일리의 그림처럼 눈웃음 지으며, 그것도 거대한 크기로 내게 먼저 다가와 자신에 대한 모든 걸 먼저 이야기하는 그림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새삼스러워서 더 고민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언제 또 다른 글에서 ‘천진난만한’. ‘해맑은’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쁨과 즐거움의 한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많은 전시회가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해외로의 이동은 더욱이나 어려운 코로나 시국 속에서 열린 로즈 와일리展은 그렇게 내게 위로가 되었다. 어느 곳 쉽게 갈 수 없어 굳어버린 감정을, 현실 앞에서 차가워져 버린 모든 감각을 해맑은 미소로 다시금 일으켜주는 그림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다른 복잡한 표현 없이 그저 좋았고 따스한 전시였다.


 

포스터.jpg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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