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밤의 미술관 [미술/전시]

일민미술관의 전시 '1920 기억극장 - 황금광시대'와 전시 연계프로그램 'IMA NIGHT - 2020 대경성박람회 투어
글 입력 2020.12.2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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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살아있다?


 

문 닫힌 고요한 미술관에서 유유히 전시를 관람하는 것, 미술관 덕후라면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을 테다. 얼마 전 자칭 미술관 덕후인 내게 실제로 밤의 미술관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밖은 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밤, 낯선 이들과 어색한 공기 속에서 전시를 관람하고 이야기를 나눈 두 시간이 왠지 마법처럼 느껴졌기에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이곳에 기록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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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미술관. 바삐 돌아가는 광화문과 이질적인 풍경이다.

 

 

시작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1920 기억극장 - 황금광시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일민미술관에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 당일 진행된 전시 연계프로그램 ‘IMA NIGHT - 2020 대경성박람회 투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불이 꺼진 미술관’, ‘경성’, ’구보’, ‘산책자’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이건 놓쳐선 안 될 기회야”라며 무작정 신청하고는 미리 전시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1920 기억극장 - 황금광시대


  

‘경성’으로 불렸던 일제 강점기 서울에는 세계 대공황과 더불어 전례 없던 금광 열풍이 불었다. 금광이라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향한 무한한 희망, 전쟁과 탄압의 역사적 상황이 혼재했던 경성에는 예술 · 패션 · 건축 ·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과도기적 양상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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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광시대'는 이 낭만과 우울의 시대, 낯선 도시 풍경과 삶의 양식을 5개의 씬으로 나누어 ‘기억극장’으로 구성하고, 희미하게 남은 도시의 흔적을 좇으며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의 경계를 모색하도록 이끈다.


1층에는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뮌(MIOON)이 ‘유토피아적 건축물’과 그곳에 거주했던 ‘신여성’ 윤성덕이라는 두 파편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구조화한 설치작업 ‘픽션 픽션 논픽션’


2층에는 안무가 이양희가 소리와 몸, 회화와 공간이 부딪히며 혼재하는 공간을 연출한 작업 ‘클럽 그로칼랭'


3층에는 신여성 운동에 앞장선 허정숙 · 주세죽 · 고명자와 이들의 관점에서 쓴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공간에 구현한 작업, 문학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내용과 당시 풍자적이었던 ‘만문 만화’의 그림을 모티프로 삼은 VR 작품 ‘구보, 경성 방랑', 마지막으로 일민미술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당시의 공예 · 미술품의 나들이를 위한 공간 '수장고의 기억’이 차례로 구성되어 있다.

 

 

 

알수록 보이는 전시


  

이번 전시는 기존 전시에 비교하자면 불친절한 편이다. 기존 전시가 꼼꼼한 인덱스와 리플릿 등을 활용해 자세한 안내를 해왔다면, 이번 전시는 관람자가 자신의 관찰력과 주관적 상상력에 기대어 전시를 주체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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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구조물이 놀이기구와 수장고를 직관적으로 구조화한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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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뒷문’이 있어 몰래 출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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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장실로 사용되었던 공간에 설치된 네온사인은 당시 신문사에서 많이 들렸던 소리를 가시화한 것이며, 컴퓨터 앞에 앉아 AI 구보씨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작업이 숨어 있다.

 

 

이외에도 알면 보는 재미가 배가 되나 알지 못하면 혼란스러운 디테일이 꽤 많이 심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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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경성 방랑'의 체험공간. 만문 만화의 등장 인물들을 그래픽으로 변환했으며 사용자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반응형 요소가 흥미롭다.

 

 

특히 권하윤 작가의 ‘구보, 경성 방랑’은 VR 작품 외에도 벽 뒤에 숨겨진 5점의 작품이 있으며 필자는 미리 전시를 관람했음에도 모른 채 지나쳤다는 사실을 이후 학예사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가려진 디테일이 다양했던 만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사적이고 (왠지) 은밀한 분위기로 진행된 대경성박람회 투어는 짜릿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시 기획자의 입을 통해 듣는 전시의 디테일과 일반 도슨트 프로그램에서는 다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 세밀한 요소까지 꽉꽉 채워진 시간이 그 공간에 있던 10명 남짓의 ‘산책자들’에게만 오롯이 허락된 한 편의 서사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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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는 학예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선과 몸은 자유롭게 공간을 돌아다니는 느슨한 분위기 속, 한 시간가량을 마치 경성 한가운데 떨어진 21세기의 도시 산책자가 된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전시장을 유영했다.

 

 

 

픽션 픽션 논픽션 - 감각과 정신의 향연


  

학예사와 함께한 투어가 끝난 후 30분 동안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1층의 ‘픽션 픽션 논픽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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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분가량 지속하는 작품은 윤성덕의 실제 인터뷰를 재현한 배우들의 음성, 이와 동조되는 빛, 그리고 얇은 철제 프레임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몸의 감각적 경험이 교차하고, 필자의 정신은 이 자극에 반응해 조선과 일본, 서양의 문화가 혼재된 가상의 ‘문화 주택’을 추측하며 더듬는 독특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시각적인 장치를 대부분 덜어낸 공간이었지만 마치 한 편의 연극을 아주 가까이서 관람하는 것처럼 감각적인 작업은 몇 번이고 더 보고 싶을 정도였다.

 

 

 

낯선 이와의 대화 ; 서로를 향한 편견 없는 시선이 든든히 지키고 있다는 감각


  

자유 관람 이후에는 일민미술관 6층에 모여 키워드를 활용한 대화를 진행했다. 일민미술관이 위치한 광화문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공유하고, 예술 · 문화 · 전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듯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다양한 분야의 가벼운 주제부터 깊고 진한 사유까지 전시를 매개로 각자의 서사에서 잊고 있었거나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편견 없는 시선이 든든히 지키고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 다양한 주제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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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과 함께 다양한 굿즈도 받아 풍성한 시간이었다.

 

 

필자는 예술이 한 시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채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성’의 역사적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할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경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의 모습을 엘리트주의적 관점으로 포장하지 않도록 유의한다면 예술이 지닌 다채로운 방법론을 통해 경성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과 그 속에 휩쓸린 수많은 이야기를 다시 조명하고, 유의미한 논의의 장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테다.


이러한 맥락에서, ‘1920 기억극장 - 황금광시대’ 전시와 연계 프로그램인 ‘IMA NIGHT - 2020 대경성박람회 투어’는 전시라는 매개를 통해 한 시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될 수 있는 장의 기능을 실험해보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전문가 집단이 아닌 시민이 모인 자리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으나, 함께 전시를 관람한 이후 각자의 기억 속 조각들을 꺼내며 공감과 공유의 지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자, 평범한 우리의 삶에 내재된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우리의 마당이 되고 개인의 기억이 모여 그 마당에서 뛰어놀며 하나의 풍경이 되는 신비한 장면을 목격했다.

 

 

 

미술관 ; 포용과 소통의 다채로운 마당


  

마법 같던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 문을 나설 때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비판적인 시선과 공감할 마음을 지닌 사람들임을 간과했다는 걸 정면으로 마주한 시간이어서 왠지 민망하지만 후련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두기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한순간 단절시켰다. 예술계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행사와 모임을 진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우리가 함께 모여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했던 시간이 그리울 따름이다.

 

일민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논하는 사람들의 교류가 회복되어 더욱 활발한 논의들이 생각지 못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공유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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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그로칼랭'의 작업 '언더그라운드'와 회화작품 전경. 벽과 공간에 다양하게 배치된 작업들이 프랑스의 살롱(salon)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미술관은, 그런 이들의 목소리를 포용하며 새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다채로운 방법과 비판적 시선으로 계속해서 확장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하며 너무도 짧게 느껴진 밤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까, 밤의 미술관으로의 비밀스러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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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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