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5. 삶과 예술은 어떻게 함께하는 걸까?

삶과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경계’에 대한 자유로운 고민
글 입력 2020.11.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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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미술은 함께 할 수 있을까?

삶과 미술은 어떻게 함께하는 걸까?

삶과 미술이 함께한다는 건 대체 뭘까?

지금 함께하고는 있는 걸까?

삶은 무엇이고 미술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거지?


엄, 그러게 말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정답 없는 질문은 아무리 바람을 불어 넣어도 터지지 않는 풍선 같은 거라서,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모양새를 찾아야 한다. 미술을 마주하는 태도는 늘 이런 모습이 된다.


‘삶과 미술’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뻔한 단어들의 짝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막연한 것도 사실이다. 작품을 창작하는 미술가라면 모를까, 미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이라면 모를까, 미술과의 관계가 거의 없을 수 있는 더 많은 누군가들에게 삶과 미술의 관계란 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별 필요가 없는 고민이라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질문 속 ‘미술’을 ‘예술’이라 고쳐 쓴다. 미술을 얘기할 때 ‘미술’이란 말만을 써서 말하기가 어렵다. ‘미술’이란 단어가 왠지 모르게 미술 자체를 온전히 끌어안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예술’이 ‘미술’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더 넓으니까 안심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술을 ‘언제든지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겐 이 과정이 필연적이다.

 

 

*

 

“삶과 예술은 어떻게 함께하는 걸까?”

 

 

자아 1: 그거 알아? 성냥갑으로 된 작품이 있었어.


자아 2: 뭐? 성냥갑?

 

 

그게 왜 작품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난해한 현대미술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가능한 거지? 어쨌든. 매번 느끼지만 미술은 질문하지 않으면 정말 꿈쩍도 안 한다. 그래서 조금은 (때론 많이) 불친절한 형태로 느껴지는 현대미술이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문을 누군가 노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질문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왜 성냥갑이야? 그게 왜 미술이야? 굳이? 그럼 왜 그 사람은 예술가라 할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질문도 마구 꺼낸다. 생각보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야말로 미술이 비로소 다루고 싶어 하는 주제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이게 왜 미술이야?”같은 질문 말이다. 난 적어도 이런 질문 없이 현대미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미술이 다채로워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는 미술에 있어 무지한 질문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다시 성냥갑으로 돌아오자.

 

 

자아 1: 작품 정보를 읊어볼까. 작가는 벤 보티에Ben Vautier. 제목은 Total Art Match-Box. 1963년. 그리고 엄청난 문장이 쓰여있지. “모든 미술을 파괴하기 위해 이 성냥을 사용해라!”


자아 2: 오... 지금 그러고도 스스로 미술 작품이라 자처하는 거야? 아니면... 나중에 사람들이 그 성냥갑을 작품이라 부르기로 한 건가. 하여튼. 방금 고고한 미술관의 벽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회화 앞에 그 성냥이 놓여있는 상상을 했는데... (미소를 짓더니) 진짜 재미있는 장면인 것 같아.


자아 1: 그 성냥갑은 미술을 이루는 웬만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읊고 마지막에 성냥 하나는 남기라고 해.


자아 2: 왜?


자아 1: 남긴 성냥 한 개비로 마지막에 자신도 태우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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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보티에, Total Art Matchbox, 1963

(© 2020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자아 2: 적어도 아주 아이러니하지는 않군. 근데 뭐랄까 엄청 파괴적이야. 다 태워버리라고 하네.


자아 1: 물론 진짜로 다 태워버리거나 그런 해프닝은 없었지만, 작품 메시지가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꽤 명료한 편이지. 그리고 아마 그들은 은유적으로라도 정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을지도 모르겠어. 아니, 그것이 그 예술가들의 일종의 목적이었다고나 할까?


자아 2: 그들? 그럼 혼자가 아니란 말이네?

 


그렇다. 이런 강렬한 움직임에 함께한 예술가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에는 더욱이나) “이게 예술이야?” 싶은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펼쳐냈다. 성냥으로 미술관에 있는 미술 작품을 다 태워버리진 않았지만, 적어도 삶과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하는 전통적인 미술의 경계를 적극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파괴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늘날 “이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질문하게 하는, 참으로 다양한 오늘날의 미술을 존재하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미술의 표현과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어마 무시하게 펼쳐놓았다고나 할까.


그들은 단단하게 결속되기보다는, 전 세계에 걸쳐 뜻을 같이 하는 데 목적을 둔 느슨한 네트워크를 추구했다.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다름 아닌 “삶과 예술의 조화”였다. ‘전통적인 미술과 미술가’를 반대했고, 시각 중심적으로 ‘보기만’해야 했던 미술을 거부했다. 그들 자신이 ‘이벤트’라 부르는 퍼포먼스로 시작해서,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 집으로 배송하는 우편 판매를 하는가 하면, 일상적인 행동을 자신들의 작품으로서 새롭게 구성하여 선보이기도 했다. 가령 서로의 손을 잡고 눈밭을 뛰어다닌다거나, 랜덤으로 통조림을 뜯어서 먹는 기이한 식사를 한다거나, 냄새로 체스를 둔다거나, 그런 것이다. 아, 백남준도 이들의 여정에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누구나 감상할 수 없다는 듯, 우월한 예술처럼 존재하던 미술의 경계를 파괴하고 삶과의 조화를 추구하던 움직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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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코, Smell Chess, 1965

(© 2020 Takako Saito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체스 말 대신 32개의 유리병으로 구성된 Smell Chess는 병에 담긴 냄새만으로 말을 구분해서 게임을 해야 하는 체스 세트다.



자아 2: 그러면 대체 누군데 그 사람들이?


자아 1: 플럭서스!

 

 

[플럭서스FLUXUS]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부터 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이다. 공식적인 역사는 1961년 리투아니아 출신의 예술가 조지 마치우나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플럭서스는 ‘삶과 예술의 조화’를 목표로 하였으며, 전통적인 미술과 미술가의 역할을 비판하고 이를 와해함으로써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시각 중심의 미술에 반대하여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플럭서스 운동은 이후 베를린, 뒤셀도르프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뉴욕, 파리, 런던, 스톡홀름, 프라하, 일본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질문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잠시 말하고 싶다. 시작은 다름 아닌 코로나였다. 우리가 삶에서 당연하게 느끼고 경험하던 일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제한되고 어려워졌다. 당연했던 호흡, 일상, 감각, 감정, 경험, 소통, 만남이 순식간에 제한된 상황 속에서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신조어로 등장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우울감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과 감정의 순간, 무미건조한 일상과는 다른 결의 선명한 경험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예술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을 견뎌내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이 주었던 것과 같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공감이 수면 위로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예술은 새로운 한계 앞에서 예술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와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 삶에는 예술이 필요하다.” 나는 자연스레 이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삶과 예술이 함께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른 것이 말 그대로 “삶과 예술의 조화”를 목적으로 하던 플럭서스였다.

 

 

자아 1: 물론 1960년대 전후에 등장한 플럭서스의 “삶과 예술의 조화”라는 맥락과 오늘날에 회자되는 “삶과 예술의 조화”의 맥락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 미술사적으로 이리저리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자아 2: 그렇겠지, 시대는 늘 변하고 미술은 늘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고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거니까.


자아 1: 맞아. 그래서 나는 예술을 삶에, 아 잠깐만 ‘삶’이라는 말은 거창하니까 이렇게 바꿔볼까. 그러니까 고고하고 우아한 미술관에만 존재했던 미술을 우리 ‘일상’에 데려오려 했던 그들의 시도에 더 집중해보고 싶어. 그것이 내가 던진 “삶과 예술은 어떻게 함께하는 걸까”라는 질문 앞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


자아 2: 음... 사실 나는 그것부터 생각해보고 싶어. 예술은 무엇이고 미술은 무엇일까? 뭐랄까, 여전히 미술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란 말이지. 그리고 아까, 예를 들어 랜덤으로 통조림 캔을 따 식사하는 퍼포먼스를 작품이라고 했잖아, “그것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에 대한 것도 궁금한 것 같아. 그래야 삶과 예술이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 건지 보다 쉽게 공감하며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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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보티에, Flux Mystery Food, 1963

: “상표가 없는 캔에 담긴 알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이를 닦는다”라는 지시문을 수행한 이벤트 퍼포먼스. 상표가 떨어진 통조림들을 내용물을 모른 체 랜덤으로 따서 먹는 ‘독창적인 순서의 식사’를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어려운 질문들에 잠시 대화가 멈췄다. 순간 내가 괜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건가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자아 1: 질문을 바꿔보는 건 어때? “이것은 왜 예술이, 미술이 될 수 없는 걸까?”


자아 2: 음...


자아 1: 미술은 왜 늘 미술관에서만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작품은 왜 항상 말없이 보이는 상태로만 침묵해야 하는 걸까? 모든 미술이 그래야 하는 걸까? 그러지 못하면 미술이 아닌 걸까? 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지식 유무에 상관없이 예술을 향유하고 경험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오랫동안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일종의 우월한 영역으로 존재했던 미술을 향해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당대에 하려던 질문과 ‘파괴의 목표물’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자아 2: 침착해봐, 질문을 하나씩 해보는 건 어때?


자아 1: 너도 방금 질문 3개씩 던졌잖아.


자아 2: 하여간 우선 내 생각을 말하자면, 모든 미술! 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오늘날의 미술은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해. “이런 미술도 있고 저런 미술도 있다”라고나 할까. 사실 이제 ‘모두’라는 수식어는 미술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깊이로, 주제와 담론의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미술이잖아. 물론 여전히 질문은 던져지고, 던질 수 있겠지. “이것은 미술인가?”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 역시 절대적이지 못할 거야. ‘모든 미술’이란 것이 단번에 정의될 수 없듯이. 네가 늘 말했잖아. 미술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정의되기에, 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완전한 확답을 할 수 없다고.


자아 1: 맞아. 플럭서스처럼 우리가 고정관념적으로 생각해온 ‘미술’과는 결이 다른 예술을 마주할 때마다, ‘미술의 경계 없음’은 그것이 모호한 것이라기보다는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하나의 선명한 정체성인 것 같아.


자아 2: 하지만 그래도 궁금해. 플럭서스의 그런 작품들을 미술의 영역에서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무엇이 깊이 있는 주제를 진지한 담론으로서 다루는 미술과, 플럭서스와 같이 정말 일상적이고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미술을, 같은 미술로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걸까?

 

 

역시 어려운 질문. 잠시 고민했다. 적절한 표현을 최대한 찾아내보고 싶어서.

 

 

자아 1: 지금으로서 나는 ‘미술을 통해 일어나는 경험’이라 생각해.


자아 2: 경험?

 

 

미술을 경험하는 순간. 미술 작품이 주는 경험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작품 앞에 선 내가 하는 경험이라 해야 할까. 아마 모두 맞을 것이다. 지금 나는 이 둘의 만남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 맞물림 사이 일어나는 감각, 감정, 연상, 생각, 질문, 때론 작품에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까지 등등. 나는 이 모든 것을 묶어서 ‘경험’이라 표현해보았다.

 

 

자아 1: 하나의 작품으로 나타난 미술과의 경험. 너는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해?


자아 2: 어, 뭐랄까. 일상에서는 할 수 없는 것? 새로운 것? 때론 위압감이 들기도 하고,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엄청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해.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는 여러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고. 위로 같은 걸 얻기도 하고. 그냥 별 느낌이 안 들 때도 있고.


자아 1: 그런데 그 경험이 꼭 미술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자아 2: 그건 아니겠지...? 사실 꼭 미술이 아니더라도, 우린 다른 것을 통해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잖아. 예를 들자면... 너무도 멋지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 앞에서 분명히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이나 숭고함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하는 것처럼. 기쁨도, 벅찬 느낌도 그렇고.


자아 1: 그럼, 미술 작품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이 꼭 위압감이 들고 지식을 동원해야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자아 2: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어떤 행복감이나 기쁨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저 위로를 얻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분명히 그럴 수 있지. 많은 사람이 작품을 통해 감동을 받고 치유의 경험을 하기도 했잖아.


자아 1: 네가 말한 작품 앞에서 그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는 경험이, 우리가 삶과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각이나 감정과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자아 2: 그러진 않겠지. 아까 말했듯이 우연히 마주친 풍경 앞에서도, 그냥 일상을 지내면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라 생각해.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저 반복될 뿐인 ‘현대인으로서의 삶’에서는 그런 크고 작은 감정들을 일일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아니면 그런 감정을 느낄 기회가 많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아마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 그럴 틈도 없는. 아니면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걸 굳이 매번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자아 1: 맞아. 잘 생각해보면 사람으로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일상에서나 예술 앞에서나 완전히 경계를 두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일상적인 행동으로, 누구나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안겨주는 플럭서스 작가들의 예술은, 아마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 주는 경험이나 일상 속에서 하는 경험이 완전히 구분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게 아닐까? 아까처럼 하나씩 생각해볼수록 삶이나 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경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아. 오히려 삶과 미술은 결국 한 사람으로서 하게 되는 경험이라는 것으로 이미 깊이 연결되어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아 2: 맞는 말인 것 같아. ‘나’라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나 작품 앞에서나 늘 변함없잖아. 그러니까 삶에서의 경험과 미술 작품 앞에서의 경험은 결국 전혀 다른 것으로 경계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 보고 싶은데, 조금 다르게 말이야. 그렇게 삶과 예술이 이미 ‘나’를 통해 맞물려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예술과 함께해야 하는 걸까.


자아 1: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더 온전한 삶을 위해서... 가 아닐까? 갈수록 우리의 인식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사라져가는 감정들을 다시 데려와 느끼고 공유하고 함께하게 하는 역할을 결국 예술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모두에게는 살아가며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범위의 경험과 느낌을 만끽할 이유가 있다고. ‘나’라는 좁은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떨림이나 감동을 느끼고, 누군가의 세계를 살피며 이해와 사유의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나는 그것이 정말 삶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수백 년을 예술과 함께 해온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을 떨리게 했던,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주었던 작품들을 한 사람의 생애보다 더 길게 지금까지 데려온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삶과 예술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이미 그렇게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마 지금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이러한 것일지도 모르지. 살아가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감각을 느끼고 기쁘고, 슬퍼하고, 위로받고, 감동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고? 그건 결국 내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걸 알려주는 거니까. 내가 지금 이런 걸 느끼고 있구나, 이런 표현 앞에선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구나, 나는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구나,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떨림을 느낄 수 있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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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치우나스, Unlimited Marching Piece, Flux Snow Event, 1977

: 플럭서스 작가들이 손에 손잡고 눈이 덮인 들판을 걸은 이벤트


 

고개를 드니 아무도 없다. 그렇게 대화가 멈췄다. 이번엔 어려운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찾고 싶던, 내가 품을 수 있는 풍선의 모양새, 그것에 이르렀다는 어떤 실마리 앞에서의 멈춤이었다.


"이번 겨울은 어떨까." 새하얀 눈이 잔뜩 쌓인 들판을 향해 걸어가는 플럭서스 작가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예술이라기엔 얼마나 평범하고 특별할 게 없는 행동인가. 이벤트라고 하기에도 얼마나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한가. 하지만 얼마나 우리가 살아가며 자연스레 놓치고 있는, 그저 온 마음으로 즐겁게 만끽하는 순간인가. 새삼 이번 겨울은 나도 마음 놓고 눈밭이나 뛰어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그런 마음이 짧은 순간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릎을 잔뜩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힘차게 달려나가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분명 우울한 표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해맑게 웃고 있었을 것만 같다. 물론, 혹시 모른다. 어떤 예술가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아니면 신발에 눈이 잔뜩 들어가서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 무엇도 예술과 함께할 수 없음을 정의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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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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