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왕의 변신 끝에 마주한 '나'의 동화 [도서]

피에레트 플뢰티오 <여왕의 변신>
글 입력 2020.11.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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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렸던 동화의 잔상들을 꺼내어 떠올려보자. 아마 많은 사람들이 동화를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귀결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혹은 순화된 동화책)을 통해 접했을 거다. 월트 디즈니가 "나는 아이들의 마음은 마치 백지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처음 몇 년 동안에 많은 것들이 백지 위에 기록될 것이다. 기록될 내용의 질적 측면은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라고 말했듯, 어린 시절에 만난 ‘동화’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아이의 머릿속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라왔는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대표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프랑스의 샤를 페로(1628-1703), 독일의 그림 형제(1785-1863&1786-1859), 덴마크의 한스 안데르센(1805-1875)을 들 수 있다. 그중 가장 앞선 시기의 작가였던 페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구전되던 민담을 1697년 텍스트로 출간한다. 페로의 <교훈을 곁들인 옛이야기>에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빨간 모자, 푸른 수염,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엄지 동자, 당나귀 가죽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페로는 책에 수록된 각각의 이야기 말미에 ‘교훈’이라는 부가적인 글을 첨부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동화가 그렇듯 가부장적 시각이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페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공간화된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미녀’는 남편이 될 남자를 기다리기 위해 100년 동안 잠을 자고, ‘아내’가 되기 위해 결혼을 기다리고, 식인마인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면서도 전쟁에 나간 남편이 돌아와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모범적’인 여성이다. 반면, 빨간 모자의 주인공이 가진 성적 호기심은 처벌의 대상이다. 늑대의 유혹에 넘어간 주인공은 결국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는다. 여성의 순종과 (성적) 신중함이다.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다시 쓰기’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중 피에레트 플뢰티오는 페로의 동화를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기 한 <여왕의 변신(Métamorphoses de la reine)>을 1985년 발표했다. <식인귀의 아내>, <신데렐로>, <도대체 사랑은 언제 하나>, <빨간 바지, 푸른 수염, 그리고 주석> <일곱 여자 거인> <잠자는 숲 속의 왕비> <여왕의 궁궐>로 구성된 이 단편집은, 페로의 ‘엄지 동자’,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빨간 두건’, ‘푸른 수염’ 그리고 그림형제의 ‘백설공주’를 해체하고 그 잔여물들을 재료 삼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여왕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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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작품 <식인귀의 아내>는 페로의 ‘엄지 동자’를 식인귀 아내의 시선에서 풀어낸다. ‘엄지 동자’의 모험에서 식인귀의 아내는 스쳐 지나가는 대상이다. 피에레트 플뢰티오는 이 미약한 존재감의 소유자에게 말을 건다. 여기서 식인귀의 아내는 식인귀를 위해 살코기를 요리하지만, 정작 자신은 살코기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던 식인귀의 아내는 어느 날 엄지 동자와 마주친다. 엄지 동자와 그 형제들의 방문으로 인해 식인귀와 그 딸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온 집 안이 식인귀 아내의 차지가 된다. 억압되어 있던 식인귀의 아내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그는 식인귀의 지배 아래 머물던 공간(집)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간다.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신데렐라’를 성별 반전한 <신데렐로>다. 성별만 반전했다면 신데렐로는 공주에게 간택받아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갈 터. 하지만 제목이 괜히 ‘여왕’의 변신이겠는가? 신데렐로는 여왕(중년 여성)의 젊은 남자 애인이 된다. 공주는 신데렐로의 두 이복형을 모두 부마로 삼는다. 신데렐로는 이에 대해 “한 사람이 공주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여분으로 갖게 될 테니 쓰라린 후회가 공주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흐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유쾌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추후, 두 형제 중 왕이 되는 건 누구인가. 작가는 말한다. 민주주의가 결정할 것이라고. 동화가 동화로 존재하기 위해 지지하고 구축했던 모든 가치들이 새로 창조된 동화 속에서 무너진다.

 

<도대체 사랑은 언제 하나>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왕과 왕비의 의무를 다하느라 정작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 왕과 왕비의 이야기에 이어 원작의 스토리가 잠깐 등장하는 듯하다가, 왕비의 강력한 선언이 원작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깨어난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벗어던지고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사랑을 하러 떠난다.

 

<빨간 바지, 푸른 수염, 그리고 주석>에는 ‘빨간 두건’과 ‘푸른 수염’의 이야기가 동시에 살아 숨 쉰다. 빨간 두건은 빨간 바지로 재탄생했고, 연쇄살인마 푸른 수염은 저주받아 불행해진 이로 그려진다. 빨간 바지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힘세고 용감한 아이로 자란다. 만능 풀과 채찍, 불쏘시개로 무장한 빨간 바지는 늑대 등에 올라타 종횡무진한다. 긍정적인 의미의 시건방짐을 소유한 빨간 바지와 나쁜 마법에 걸린 푸른 수염이 만나 결혼하게 되고, 끝에서는 빨간 바지가 푸른 수염의 저주를 푼다. 지하 벽장에 가둬져 있던 푸른 수염의 형제와 전 부인들이 구출되고, 밖으로 나온 전 부인들은 저마다 ‘할 말’을 다한다. 여기에서 정말 멋진 대사가 나오는데,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세계에서 그 쾌감을 직접 맛보길 바란다.

 

‘백설 공주’에서 재탄생한 <일곱 여자 거인>에서는 기존의 여성상과 다른 새 왕비가 등장한다. 시동처럼 짧은 머리에, 기사 복장을 하고, 고무 반장화를 신은 새 왕비는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궁궐 안에서 조깅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궁궐 안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일곱 개의 마술 거울은 새 왕비가 사회가 바라는 여성이 되도록 세뇌한다. 쉽게 말하면, 가스 라이팅 하며 코르셋을 조인다. 새 왕비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궁궐에서 쫓겨난다. 그는 숲 속에서 여섯 명의 여자 거인들과 만난다. 여자 거인들은 거울이 요구했던 여성상과 정 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왕비는 이들과 함께 지내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결말의 통쾌함은 덤이다.

 

<잠자는 숲 속의 왕비>는 식인귀로 몰려 궁궐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왕비에 대한 이야기다. 글에서 목격한 왕비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낯선 언어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소리친다. “저들의 말을 들으세요. 저들의 말을 들으세요!” 하지만 왕비는 이 사회에서 철저히 미움받는 대상이다. 작가는 한 여성을 둘러싼 소문과 두려움이 어떻게 돌고 돌아 커지는지 동화를 통해 보여준다. 결국 왕비는 ‘잠자는 숲’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글은 그가 숲 안에서 겪는 모험을 따라간다.

 

마지막 작품 <여왕의 궁궐>은 어느 동화에도 등장한 적 없는 여왕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은 밤마다 음침한 궁궐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돈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힘들게 떠돌던 여왕은 마지막에서야 평범한 여성의 모습으로 선다. 보통 사람이 된 여자는 속으로 외친다. “분명해, 이게 내 삶이야.”

 

 

 

여정의 끝에 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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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여왕의 변신>은 출간일로부터 35년이 흐른 2020년에, 비로소 한국에 소개되었다. 프랑스 소설만을 전문적으로 번역 출간하고 있는 레모 출판사의 네 번째 책이다. “여성, 빼앗긴 동화를 되찾다.”라는 문구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생각했던 글과는 조금 달랐다. 이야기를 완벽하게 내 품에 그러쥘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건만, 피에레트 플뢰퇴오가 풀어놓은 문장들은 당황스럽고 색다른 방식으로 내 손 밖으로 미끄러졌다. 글이 나에게 포섭되지 않고 마구마구 탈주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글을 읽어가면서도 한 치 앞을 못 보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문학과 친하지 않은 나에게, 이 작품들을 소화해나가는 과정은 험난했다. 섬뜩하고 적나라한 묘사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다소 불편한 묘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보편적인 글과는 사뭇 다른 글쓰기에 ‘내가 이해한 게 맞나?’라는 의심을 가지고 한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나가기도 했다.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서술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혼란을 겪었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작가의 자의식('나'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이 몰입을 방해했다.

 

마지막 두 작품은 읽어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맨 뒤에 수록된 작품 해설을 읽고, 다시 헷갈렸던 부분을 읽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보편’이라 일컬어지는 남성적 글쓰기와 읽기에 너무나 찌들어버린 사람의 당연한 괴로움인 것 같다.) 읽기의 어려움은 둘째 치고, 이야기의 면면이 완전히 만족스럽게 다가왔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왕의 변신>을 끝까지 다 읽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나에게 와 닿아서다.

 

어린 시절 내가 동화를 소화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어린 나에게 동화는 유기적이고 매끄러운 서사로 다가오지 않았다. 동화는 나에게 장면 장면으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 환호를 지르고 싶은 장면,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 부끄러운 장면 등. 그렇기에 나는 <여왕의 변신>을 보듬는 과정에서, 이 글을 완벽하고 깔끔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조금은 편협한 방식으로 글에 다가가 보려 한다. 어린 시절에 동화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문장 밑에 줄을 긋고, 읊조리고, 머금어보려 한다. 이 언어의 조각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물음이 생긴다. '이거 옛날이야기 아니었어?' 아니다. 피에레트 플뢰티오가 새로 써 내려간 동화는 옛날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담대하게 선언한다. “당신의 예언은 옛날 거예요. 내가 백 년 동안 잤으니 그걸로 됐어요. 가세요, 당신 하고는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새로운 목소리가 덧입혀진 과거의 이야기는 지금의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맞다, 우리는 몇 백 년 전의 이야기와 더 이상 볼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동화에서 ‘나’를 찾으려고 한다. 작품에 간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녹아있는 현대의 파편은 이 점을 상기시킨다. 작가가 탄생시킨 '왕비'는 아주 멀리서 오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작품의 끝에서 펼쳐진 고백에 깨닫고야 만다. 여왕의 ‘변신’을 둘러싼 여정 끝에는 ‘나’가 있다.

 

 

 

새로운 변신과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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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변신>은 과거의 동화를 향유해왔던 어른들을 위한 현재의 동화다. 과거의 동화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피에레트 플뢰퇴오가 숨결을 불어넣은 세상에서 '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기쁜 일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현재의 아이들을 위한 ‘다시 쓰기’다. 지금의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변신과 여정이다.

 

오늘날 동화는 광범위한 콘텐츠 속에 살아 숨 쉰다. 동화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발맞추어 ‘동화’가 다시 써지기도 했고, 새로이 읽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완전한 변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구시대적 가치를 답습하는 동화가 살아 숨 쉰다. (새롭게 다시 쓰는 동화에 병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과거의 유물인 동화를 살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서사가 자연화되는 방식에 대해 묻자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저 없이 다시 써야 한다. 동화 속의 다양한 ‘나’를 상상하고 그리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동화 속 세상에 뛰어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은 아이들이지만, 그 세상을 기획하고 구성해내는 건 어른들이다. 한때는 아이의 시선을 가지고 살았던 어른으로서, 지금의 아이들에게 우리 때보다 더 나은 동화를 선물해주고 싶다. '나'를 위로하고 인도해주는, '나'에게 환대의 손짓을 건네는 동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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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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