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에디터의 일기 [사람]

내 이렇듯 오래도록 쓰려 하는 까닭이다.
글 입력 2020.10.3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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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0월 29일, 2020년

 

일기를 써야겠다. 오늘은 일기를 써야겠다. 하루를 되짚자니, 일어나 유튜브를 보다가 내게 주어진 일을 껄쩍이곤 운동을 하고 지쳐 들어와 눕는 내 요즘에 사유가 없다. 영원할 듯 웅웅거리며, 내게서 쏘아나오려던 의견들에 부신 가뭄이 내리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써낸 것일까. 그러나 다 쓰인 글은 좀체 돌아보게 되질 않아, 나는 내게서 무엇이 쏘아져 나갔던지, 빠져나갔던지도 다 몰랐다. 오늘 일기는 맑음. 금주는 근래 가장 바쁜 한 주가 될 예정이지만, 일감이 손에 쥐이질 않아 빠져나가려고만 하는 지친 오늘에 나는 드디어 내 쓴 글을 다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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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길게도 적었다.

 

굳이 그래야 할 까닭일랑 없었지만, 이제 글마다 1만 자를 넘기는 것이란 마치 의무인양 거기 빼곡하다. 맞춤법 검사를 하려고 복사한 글을 붙여넣으면, 이 녹슨 컴퓨터는 잠깐 멈추어 삐걱대더라. 글을 잘 못 쓰니 양量 치기를 하려 들지, 쯧쯧… 가장 첫 소감이란 이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짧게 잘 쓰는 법’이라는 책이 아트인사이트에 소개되던데, 내 그것부터 읽어볼 걸 그랬다.


이상하지. 나는 참으로 이상스런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견주는 치기 어린 짓. 나는 모든 어제의 글들과 오래달리기를 한다. 지난번 쓴 글로부터 조금은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그러나 늘어난 것은 언제나 양量 뿐이다. 그러는 중에 한 편의 글은 7천 자에서 9천 자로, 1만 천자로, 이제는 1만 3천 자에까지 닿는다. 그러나 과연, 이리 긴 글은 누가 읽을 것이냐. 나라면 아니 읽을 듯하다.


내 쓰는 것들이란 그리 대단한 의미를 배태하고 나지는 못하였지마는, 내게는 그리도 어여쁜 것들. 그러나 다음의 쓸 때가 오면, 그것들은 나를 응시한다. 그러면 아무도 보지 않는 와중에 나 혼자 조급증을 느끼며, 달아나려 그런다. 글은 7천 자에서 1만 3천 자에까지, 사실 달아난 것이다. 그때그때마다의 기旣 적힌 글들로부터.


그래서, 레이스를 멈추고자 일기를 쓴다. 이거, 이리 길게 써두면 과연 누가 와서 읽을 것이냐. 나는 어쩌면, 나와의 경쟁으로서 글을 써내는 것이 아니인가. 글의 본질은 읽히기 위함인데 말이다. 내 그리 대단한 것을 드릴 수는 없겠지마는, 아 글쎄, 일단 읽을 만 할 정도로 짧고 나서야 읽어주실 일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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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리뷰는 15,700자.

점점 겉잡을 수 없이 길어지고만 있다.

 

 

또 한편으로 내 과거의 기록들로부터는, 아아, 글의 사이사이 배어있는 분명한 나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움처럼. 그러나 이 감정이 실로 진득한 그리움, 그러니까 참으로 애틋하여 돌아가고만 싶은, 그러나 돌아가질 못해 처절히 불가한 손을 뻗는, 그런 애절한 감각은 아니일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로. 내 느끼는 그리움의 실상이란, 다만 계절만큼 길고 질긴 번민을 허적이던 지난 겨울이다. 그 안에서 선보일 만한 그나마의 사유가 영글고 그것이 비로소 게시되면, 잠깐의 족함을 느끼곤 이내, 보라, 나를 몰아대지 않는가.


그러니까 내 느낀 그리움이란, 손에 쥐인 자그마한 구절들과 그 안에 서린 영감들이고, 그것의 실상이란 번민이었다면, 내 그 실상을 진실로 기억하는 한 이를 진실한 그리움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리도 나를 찔러대나니……


그러나 이런 가짜 그리움을 맡고 난 뒤에 서서히 밝아오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으니, 아하, 내 지금에 있어 번민은 그 어디로들 다 가버렸는가 하는 그것이다. 어디로 갔는가. 번민의 부재가 행복에 직결되는 것은 추호 아니이나, 번민 없음이란 어땠든 고통스럽지 아니하다는 것일 터인데, 언제 어디로들 흩어 갔던가.

 

*


잘 모르겠다.

 

태생이 지독한 나로서는, 어땠든 번민의 부재가 행복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이라, 거기 시나브로 괴로움이 잊혀졌던들 잘 느껴오지 아니하였던가. 감각은 대개 둔감하야, 이 안을 웅웅거리는 분명한 것, 예컨대는 고통이나 슬픔이나 행복이나 뭐 그런 따위의 노골적인 것들만을 즉각 느끼고, 또 느낄 수 있던데마는……. 말인즉, 부재는 잘 느껴지지 아니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 무엇이 있음을 감각하지, 있던 무엇이 사라지는 일에 대해서는 영 둔감한 것일지. 사유하지 않는 동안 슬며시 흩어진 번민을 지금에 추적하자니 참 어렵다.


느껴지는 것만을 느끼는 일이란, 이렇듯 곤란한 때가 있다. 거기 자생적으로 느껴지던 것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번민처럼, 그 속을 끈질기게 오래도록 구르다가 구르다가 보면, 마침내 의식 전면에 그것이 감지되어 갈무리되는 것이 수순이었던 듯. 달리 말해, 그 안을 오래도록 궁글다가 못내 감각되는 것이 곧 심상이라면, 지금 느껴지지 않는 중에 그를 그려보기란 어려운 일이리라는 말이다. 그때는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겨울 같은 것들이 봄 오듯 사라지니, 곧 잊혀지는 이 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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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란 고로, 내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이다. 하루와 어제들을 추적하며, 이 안에서 즉각 혹은 자생적으로 느껴지지 아니하는 것들을 주목하는 일. 그 과정에서 슬며시 잊힐 것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건져내면, 갈무리되는 것이란 자연한 수순일 것이다. 글머리가 없는 내겐, 그것이 글이고 영감이다.


사유엔 얼마간의 고통이 필요조건이고, 고독이라는 제반환경이 요구되다. 나아가 꽤 기인, 빈 시간마저 필요하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사유는 고통 있을 제, 고독과 빈 시간마저 나를 점유하면, 자연히 떠오르는 자구책이었음이다. 옆에 아무도 없고, 종종 있는들 내 그와 어울려 새처럼 뛰놀지 못할 값이라면 그것도 고독일 터인데, 더하여 주어진 할 일일랑 없거나 손에 잡히지 아니하여 시간이 지루하게 늘어져 있다면, 그때 사유가 이 초조한 공백을 메꾸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 이 세 조건이 전부 사라져 있음을, 드디어 목도한다. 고독도, 빈 시간도, 심지어는 고통마저도 사라졌다. 그러나 행복한가.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역으로 다시 멀게나마 불행함을 표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감정의 회색지대라 불러도 좋겠지마는, 그것이 강박적으로 행복을 좇게 하거나, 불행으로 회귀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참 가을 같다. 몸에 열이 많은 나로서는 여름이 하루빨리 꺼져버리길 빌곤 하얐는데, 막상 추위가 찾으면 그때 소원은 까마득히 잊히곤 아아 겨울이 오려나부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막상 패딩의 두터운 품을 찾아 잊지도 사르지도 못하는 추위 속에 처해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으 쌀쌀하고만, 하고 마는 것이다. 별 감흥이 없다는 뜻이다. 감흥이 없으니 말도 글도 아니 나오지.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그렇다 하여 무더위와 강추위로 접어들어 가고 싶은 것도 아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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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통으로 글을 밀고 나가는 것도 이제는 어려울 일일 값이라면, 새 술 담을 새 부대를 찾아야 할 때이다. 책을 읽고 써나려가는 것도 몇 해보았지만, 이거 원 책 읽을 시간이 그리 없다. 빌려 놓은 것만 쌓일 따름이라, 책들이 거기 한데 모여 나를 응시한다. 나는 약간의 부끄럼과 조급증을 느끼지만, 딱 그뿐이다. 어쩌랴, 내 지금 시간이 모자란데, 너희가 어쩔 것이냐.


그렇다고 환희 혹은 연민으로 글을 지어 먹는 일도 내겐 아득한 일이다. 만약에 한들, 그것은 온통 거짓일 터. 태생이 지독한 내게는 이상한 고집마저 잔뜩 있어, 그런 글을 쓰는 것이 되지 않는 이 일보다 못할 일이다. 차라리 긴 글을 뽑아내지. 그래서 내 글이 점차로 길어졌나 보다.


글은 언제나 의견인데, 내 요즈음에 의견이 없다. 아니 글 될 의견이 적다. 의견을 글로 화해보자니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리 아름답지도 못한 듯하다. 보라, 글 하나 써내리는데 필요한 것이 참 많다. 다른 것은 일단 다 치워버려 두고서라도, 무언가 아름다워야만 하는 것. 글의 미학이 어디서 오는지 쥐뿔도 모르지만, 일단 쓰는 나라도 그리 느껴야 될 일이다. 그렇기에 고전을 읽고 감상평을 적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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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어둔 책들이 뚱허니 나를 응시한다. 

 


아름다움.

결국엔 또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

영원히 알지도, 고로 소유하지는 더 못할 아름다움이라…


이 또한 강박일거이니. 보는 눈 없는 여기서 나 혼자 이러고 있음이란… 이래가지곤 글 쓰는 손이 멈추어버릴까 왈칵, 이제는 참말로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고통으로도, 강박과 자기 소진의 방식으로도 글은 오래지 못할 값이라면, 새 술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나는 계속 쓰고자 하는 까닭에.


이상,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 그야말로 이쁜 구석이 없는 글이라 중간중간 구겨버릴까 했지만, 그리 큰 의미도 없는 글이라 자꾸만 지워버릴까도 했지만, 새 부대를 찾아야 하는 일이라, 강박 같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환으로써 이 글의 끝까지 밀고 나와 본다.


마지막으로 지난 글의 등허리를 쓰윽 훑었다. 거기엔 성숙하진 못할지언정, 퍽 기특한 것들이 맺혀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자꾸만 응시하고, 찔러대지마는 어떠랴. 나는 그와 꼭 같은 것을 쓰지 못하더라도 어땠든 자꾸만 쓰고자 하는 까닭이다. 무엇을 위하여, 묻노라면 글쎄. 시절에 꽃갈피를 끼워두는 것일까. 애틋하기만 한, 나의 청춘은 고요했고 또 고요한지라. 무엇이 그 어땠든 내가, 이렇듯 오래도록 쓰려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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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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