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가능한 연극적 재현 속에서 피어오른 쓰고 깊은 웃음 - 연극 웃기는 어둠

글 입력 2020.10.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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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어둠 이미지3.JPG

 

 

 

혼합현실 속 연극


 

매체의 발달은 인류의 사고 범위를 증폭시켰다. 증강현실로 대표되는 뉴미디어는 실재 환경과 가상 환경이 중층적으로 결합한 삶의 비전을 제시했다. 가상과 중첩된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스타워즈의 정교한 홀로그램 같은 복잡한 상상을 할 필요조차 없다. 익명 투표로 의사결정을 하고, 잡다한 친목의 용도로 매일 여는 카카오톡, 그 삶의 공간 자체가 일상화된 사이버 스페이스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연스럽고 빠르게 가상과 실재가 뒤 엮인 혼합현실에 적응했다. 가상공간의 콘텐츠는 전례 없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쥐라는 단어에 미키마우스를 떠올리고, 북극곰이라는 단어에 콜라병을 함께 떠올린다. 너무 고전적인 비유라면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우리는 참치라는 단어에 싱싱한 물고기를 떠올리는 대신 참치통조림을 떠올린다.

 

참치를 파는 회사에서 싱싱한 참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좀 달랐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것이 펭수인걸 보면 생생하고 거대한 참치 이미지가 그리 강렬하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좌우간 최소한 한국에서 먹고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참치의 연상단어로 다랑어보다는 마요네즈를 더 많이 꼽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가장 익숙하고 상품화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나아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트릭스가 유행하던 시절 일부 기술비관론자가 혼종화된 세계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인간은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가상과 실재가 혼종화된 현실은 다양한 오락과 체험으로 이어졌다. 유튜브 문화와 게임은 오늘날의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현대인들은 가상과 실재를 오가는 일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즐기고 갈망한다.

 

연극에 대한 리뷰를 보기 위해 이 글을 클릭했다면, 갑자기 이어지는 기술변화에 대한 단상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연극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받은 인상을 가상과 실재가 혼재된 현실에 대한 설명 없이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연극 <웃기는 어둠>은 가상과 현실을 엄밀히 구분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작가의 치열한 예술적, 사회적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다를 보았어요. 그곳에는 물이 없었어요.


 

다소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극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작품은 소말리아 해적의 변론으로 시작된다. 그는 한국의 배심원들에게 자신이 해적이 된 경위에 관해 이야기하며 선처를 호소한다. 해적은 어릴 적부터 사랑하는 친구와 어부가 되고 싶었다. 따라서 그와 그의 친구는 돈을 끌어모아 배 '희망'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나라의 불법조업으로 물고기의 씨앗이 말라버린 것을 알고 큰 절망에 빠진다.

 

이에 친구는 동네 크레페 가게에서 일하게 되고, 해적은 국가와 학교의 지원금을 받아 '해적학'을 무사히 수료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친구에게 돌아가 자신이 배운 것을 이야기하고, 다시 배 희망을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친구는 매우 감격하며 함께 해적질하게 되었지만, 정확히 기술되지 않은 예기치 않은 사고에 휘말려 친구는 바다에 떠내려가게 되고, 해적만이 살아남아 한국법정으로 구속된다.

 

장면전환이 이루어진다. 특수전사사령부 소속의 상사가 자신의 비밀 임무를 관객들에게 설명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밀림 속에서 임무수행을 하다가 정신이상을 보이고 자신의 동료 두 명을 살해한 중령의 위치를 확보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에게는 탈북민 출신 하사가 배정되었으나, 임무의 내용을 하사에게 말하진 않는다. 정글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힌두쿠시의 길을 따라 정글로 가는 마지막 항구에 도착한다.

 

일본인 장교가 그들을 맞아주었는데, 그는 '미개한' 원주민들을 통해 콜탄을 채집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는 몹시 원주민들을 더럽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하지만, 그 자신이야 가장 야만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그는 불쾌할 정도로 큰 소리로 음식을 먹으며, 강에다 쓰레기를 버리게 하고, 비탈길에 앉아서 식사한다. 일본인 장교는 한국의 무전병 하나가 저 정글 안에서 미쳐버렸다고 이야기하면서, 정글의 무시무시함을 이야기한다.

 

강을 타고 선박은 정글의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간다. 하사는 상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만, 상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적극 응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방문판매상이 등장한다. 방문판매상은 오랜 시절 폭탄의 불씨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을 잃은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불이 옮겨붙은 차양을 자신이 설치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가족들을 죽였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사는 그를 위로하고 물건을 사려고 하지만, 상사는 구매를 거부한다.

 

다음에 군인이 다다른 곳은 문명사회였다. 그곳의 교주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벌거벗고 있었다. 교주는 처음에 두 군인에게 관대한 모습으로 환영하고, 무신론자인 하사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는 본토에 있던 이슬람교를 물러나게 하고, 무신론자를 아무런 가치 없는 돌멩이에 비유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혼자 옷을 입은 그는 사랑이 순수해야 함을 주제로 설교하면서, 외로움과 돈을 지급함으로써 얻은 육체적 접촉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남자와 그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존한 여자의 이야기를 추잡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비논리적이고 변태적인 설교에 하사는 무언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강가를 바라본다.

 

다음 장면에서 하사는 갑자기 자신의 손에 떨어진 과육을 발견한다. 과육의 한쪽 면에는 하사가 살았던 작은 집이, 다른 한쪽 면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장이 있다. 하사는 울적함을 느껴 과육을 먹고 싶지 않아 하지만, 상사는 무심하게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한다. 하사는 과육의 반쪽을 상사에게 건네지만, 상사는 거부한다. 하사는 외롭게 과육을 혼자 씹는다. 선박은 점점 더 어두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정글의 어둠 속에 상사는 일종의 광증을 느낀다. 그는 그 자신조차 모를 이유로 하사를 죽이고 싶어하는 충동에 휩싸이면서 앞에 앉은 하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까 말까를 고민한다. 하사는 방아쇠를 당기기는 쉽지만,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 않다고 독백한다.

 

이때 다시 한번 장면이 전환된다. 2020년 지금 여기, 매일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진자가 발표되는 세상, 작가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극은 그가 핸드폰으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연출한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예를 들어 그가 지금 쓰는 작품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이야기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고민하고, 문화예술이 취해야 하는 역할을 고민한다. 그는 문화예술이 어떤 종류의 낯섦을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글을 쓰는 것을 잠깐 멈추고 아버지와 채소를 통해 운송수단을 만들며 노는 와중, 무대의 어두운 면에서 살려달라는 하사의 애원이 계속해서 들린다.

 

다시 장면이 돌아온다. 상사는 방금 죽이려고 했던 하사를 애타게 찾는다. 하사는 화장실을 가려고 했던 탓에 자리를 비웠다고 이야기하지만, 상사는 믿지 않는다. 상사는 하사의 몸을 더듬거리듯 안고, 그날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상사는 하사의 다리가 오짜라서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두 군인은 중령을 만난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중령은 이들에게 자신이 어느 날 자신이 꾸었던 악몽에 관해 이야기한다. 꿈에서 그는 카누를 타고 어두운 어둠 속을 가르며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외로웠지만 아무도 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문득 이 어두운 길이 자신의 똥구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상사와 하사는 그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중령에게 왜 동료를 죽였는지를 묻는다. 중령은 자신이 군인이 된 이유가 더 적은 사람을 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의 본래 임무는 자신의 동료인 두 명과 24명의 적군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법으로 3명이 24명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이 군인이 된 이유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산에 맞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을 죽이고 그 자신도 죽으려고 한다. 아군과 적군, 많고 적은 죽음의 비논리적이고 치열한 계산 끝에 그는 죽지 못한다. 하사는 그의 곁에 있고, 상사는 혼자서 돌아간다. 이 지점에서 중령은 작가가 되어 이 작품의 결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사는 자신의 배역에서 나와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작품의 결말을 고민하고, 하사는 자신이 처음에는 없는 배역이었음을 밝힌다.

 

상사는 점차 어둠을 친숙하게 느끼고, 나아가 웃기게 느끼게 된다. 그는 마침내 어둠 속에서 배를 다시 발견한다. 그곳에서는 소말리아의 해적이 자신의 친구를 찾기 위해 서성이고 있었다. 상사는 그에게 이 연극에 그가 이야기할 자리는 없다고 소리치고 사라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해적은 기어코 무대에 나와 자신의 개인적 과거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펼치기 시작한다. 상사는 이번에는 쉽게 방아쇠를 당기고, 해적은 말을 잃는다. 상사는 바닥에 범죄현장의 시체에 표시하는 라인처럼 분필로 그림을 완성한다. 그 행동을 마지막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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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정신병원의 마당(1794)

 

 

 

웃기는 어둠


 

이 작품에는 수많은 키워드가 있다. 인간의 무의식, 문화예술의 역할, 세상의 부조리함, 예술의 형식, 소통, 등 나열하려면 많은 단어가 있지만, 본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리뷰를 기술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웃기는 어둠>이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에 대한 해석이다. 두 번째는 연극에서 배분한 '불가능한 연극'으로서의 해석이다. 내가 읽은 연극을 전달하기 위해선 두 가지 모두를 설명하여야 한다.

 

본 작품에서 반복되는 '어둠'의 정체는 극 후반에 가서야 밝혀진다. 저급한 화장실 농담 같지만, 어둠의 정체는 똥구멍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어한 배설도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똥구멍은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통로다. 입에서 똥구멍으로 향하는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 심장을 만나게 된다.

 

문명사회에서 어둠은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통제를 잃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기 까지 하다.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의 중심에는 우리의 똥구멍에서 흘러나온 부끄러운 감정들이 섞여 있다. 거대하고 끔찍한 폭력이 사실은 우리의 똥구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어둠은 우스울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웃음의 형태는 깊은 슬픔을 동반한 것이다.

 

어둠을 우리의 가치 중립적인 본성으로 이해하자면, 어둠의 핵심에 존재하는 중령을 찾아 떠나는 두 군인의 이야기는 내면의 깊은 곳까지 항해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이상자로 표현된 중령은 우리의 심장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곳을 향하면서 만나는 일본인, 방문판매원, 선교사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한 인간의 무의식을 탐험하는 것처럼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인물 안에는 현실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다국적 기업, 전쟁 난민, 종교분쟁, 테러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다. 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두 군인은 문명과 점점 멀어져 가장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내면과 타자에 대한 시선,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우리 각자의 선택에 대한 질문, 즉 어둠을 마주하게 된다.

 

여행에 참가하는 대조적인 두 인물의 형태가 흥미롭다. 상사는 냉소적이고 소통을 거부하는 인물이고, 하사는 감성적이고 소통하기 위해 다가가는 존재다. 상사는 나이가 좀 있고 단단하고 짧은 체격의 남성 배우가 연기했고, 하사는 사내아이 같고 키가 큰 젊은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하사가 정말 여성 캐릭터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초고에는 없었던 이 인물은 '남성들만 나오는 작품'에 대한 반성으로 추가된 캐릭터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비유를 제거하더라도, 두 인물은 동전의 양면이다. 상사는 타인을 밀어내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사는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상사다. 반대로 그는 현대인의 표상이다. 냉소적이고 임무 지향적인 그는 개인적인 친목을 쌓으려는 자신의 아픔을 나누려는 하사를 외면하는 냉정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외로워하고 연약한 인물이다. 그는 하사에게 의존하며, 그가 없을 때에는 공황에 빠진다. '시간을 보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대체된 시간에서 그는 하사에게 소통과 관계의 욕구를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와중에도 하사의 못난 다리를 생각하는 졸렬함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둠을 더욱 고통스럽게 여긴다.

 

하사가 중령과 함께하기를 선택하고, 상사는 임무 완수를 위해 길을 돌아간 선택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정신병자로 표현되길 기대한 중령은 지금까지 군인들이 만나 온 사람들보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는 자신이 동료를 죽인 이유를 자신의 신념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 자신이 가진 진실한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다. 다른 인물과 다르게 군인이 된 이유를 고민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본질적인 감정에 대해 성찰한 인물이다.

 

하사는 어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아픈 삶을 타인과 소통하려는 인물이다. 따라서 하사는 심장부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통을 거부한 상사는 다시 똥구멍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연극이 겨냥하고 있는 '어둠의 공포'는 사회의 모순, 그러한 사회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이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와 섞여 있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똥구멍 안에 있는 친숙하고 부끄러운, '웃기는 어둠'인 것이다.

 

 

 

불가능한 연극의 이해


 

처음에 극장을 나오면서는 이 연극을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생각했다. 정확한 정의가 들어맞는지 모르겠지만, 극의 전개, 각 인물의 설정, 대사와 행동 자체가 아귀에 잘 맞지 않았고, 하나의 소통 도구로써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연극에는 그러한 방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인간 삶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예를들어 소말리아 해적을 중심으로 한 오프닝에서 해적은 바다에 물고기도, 물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절망해 자신이 해적학과를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아 수료했다고 말한다. 또 극에서 해적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해적이 되는 것도 과장될 정도로 낭만적인 재기처럼 표현한다.

 

우리는 분명 소말리아의 대학이 해적을 양성할 리도 없고, 지원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바다가 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있을 뿐만 아미라, 어부의 꿈을 포기하고 해적이 된다는 것은 윤리성을 떠나 비극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연극의 표현은 부조리하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해적학과는 존재하지 않지만, 내전과 다국적 기업의 횡포 때문에 많은 소말리아인이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해적을 양성하는 환경은 분명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물은 생명력의 상징이다. 바다에 물이 없다는 것은, 생명력을 갈취당한 현실을 저격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정말로 바다에 나갈 수 있는 것은 비극적이게도 해적이 되는 길뿐이다. 이와 같은 코드가 다른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부조리와 허구가 섞여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현실의 파편이다. <웃기는 어둠>은 부조리한 방식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연극의 장면은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각 인물과 배경의 설정은 비논리적이며, 명확한 메시지를 예상한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해주지 않는다.

 

 

 

혼합현실의 불가능한 연극


 

하지만 이 작품의 정체성은 결코 '부조리극'에서 고정되지 않는다. 팜플렛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불가능한 연극'을 표방한다. 팜플렛에 따르면, 연극이란 허구와 현실이 실제로 충돌하는 곳으로, 현실의 제약, 구속, 갈등을 다룸으로써 불가능을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불가능한 연극 텍스트란 단순히 무대화되어서는 안 되고, 부족함으로 느껴질 수 있어 무대에서 갈망이 보여야 한다.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극의 내용을 변형함한다는 점은 부조리극의 지향과 일치하지만, 불가능한 연극은 현실과의 충돌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부조리한 표현이 앞서 기술한 부분에서 드러난다면, 현실과의 충돌은 작가의 노골적인 출현과 엔딩에서 두드러진다. 우선 연극은 2020년, 관객에게 연극을 보여주는 그 시점에 글을 쓰는 작가를 숨김없이 그대로 출연시킴으로써, 이 작품이 가상과 실재 사이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작가는 문화예술이 '낯섬'을 지향해야 한다는-일반적으로는 도슨트에서 들을 수 있는-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후반에 등장인물인 하사는 노골적으로 그 자신이 없었던 인물임을 밝히기도 한다.

 

작가의 노골적인 출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본 글에서는 앞서 '명확한 메시지를 기대한 관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상상 속 공간에서 다시 풀어보길 바라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인지체계는 낯선 정보를 환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연극에 어떤 뚜렷한 기대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경우, 소말리아 해적의 현실과 폭력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기대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작품은 그러한 기대를 과감하게 부순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사는 해적을 죽인다. 온전한 '가상'의 인물이 '현실'과 가까운 인물을 살해하는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허구가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불가능한 연극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나가며


 

<웃기는 어둠>은 좋게 말하려 해도 결코 많은 사람의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작품은 난해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기대를 깨는 일종의 불쾌감까지 안겨준다. 혼란스러운 극의 구조는 작품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웃기는 어둠>이 지향하는 메시지와 '불가능한 연극'은 오늘날을 정확히 저격한 작품이다. 가상과 실재가 혼동된 오늘날, 가상이 실재를 이끄는 작품의 메시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극단은 낯선 장막을 들추는 문화예술가로서의 고민의 결과로 이 작품을 관객들에게 공개했다. 이 난해한 작품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려워져 가는 문화예술의 역할과 혼재된 현실에서 눈먼 황소처럼 내달리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을 동시에 지적한다. 작품에 드러났듯 그 자신에게도 어려운 작업이었겠지만, 예술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 글이 그 작품의 의도를 얼마나 발견했는지 모르지만,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자로서 그러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극단이 보여준 용기와 메시지는 내 마음에 작은 비석으로 세워두고 싶다.

 

 

포스터_웃기는 어둠.jpg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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