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출렁이는 나의 윤곽을 진정시켜보려고 - 윤곽 [도서]

밀도 높은 문장으로 쏟아지는 '남'의 이야기를 만나다
글 입력 2020.09.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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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습이 희미해 보일 때가 있다.

 

마음이 기댈 곳이 없을 때, 흔들리는 감정을 붙잡아 둘 수가 없을 때. 그리고 그런 때는 나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들이닥치는 위기가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윤곽_입체.jpg

 

 

레이첼 커스크의 장편 소설 『윤곽』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듣기’로 만난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주인공의 수많은 만남은 독자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편소설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파편적으로 독자에게 던져지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의 문장은 하나하나 너무 밀도가 높아서 작가의 계산적이고 수준 높은 글쓰기에 놀라게 된다.


주인공은 글쓰기 강의를 위해 그리스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길과 머무는 길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소설은 내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어떤 인물과 그 인물이 겪은 이야기를 적당히 반응하며 들어주는 주인공. 독자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들은 왜 주인공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없이 털어놓는 걸까? 인생의 굵직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만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약간의 피로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한바탕 이야기를 쏟고 나면 인물은 다음 장에서 사라진다. 사라진 그 자리는 다른 인물이 대체한다.


대체되며 주인공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그들은 자신이 겪은 상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사랑과 열정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자는 그 이야기들을 말하는 이의 목소리로만 듣게 된다. 그들에게 상실을 선사한 ‘그 사람’의 입장은 전혀 듣지 못한 채로, 지금 주인공의 앞에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는 인물의 시선에만 의지한다.

 

 

나는 ‘진정한’ 자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 어떤 독립된, 주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자아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 126p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주인공은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여러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금은 의심하면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환경에 너무 쉽게 영향받는다. 조금 야속하고, 언짢을 정도로 환경에 취약한 우리는 자신의 일부분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내준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온전히 나이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가까이한 것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들으며, 옆자리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갑작스럽게 자신의 윤곽을 그려낸 것처럼. 소설의 제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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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라는 하나의 형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윤곽을 둘러싼 바깥의 세부적인 면들은 모두 채워졌는데, 정작 윤곽 자체는 텅 비어 있었다. 그 형태 덕분에, 비록 그 내용물은 알지 못했지만, 사고 이후 처음으로 그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 281p

 


어렴풋한 윤곽. 원래 무슨 일이든 형태를 잡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소설의 엔딩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주인공은 들춰진 형체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나를 재단하고 싶어 한다. 나는 자기소개서에 나에 대해 단명하게 설명하고 나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나를 주변은 쉽게 단정 지어 이야기하고, 어쩔 땐 나 역시 나를 단순하게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눠 보는 것이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사이에서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고. 왜 그럴까? 그 대답은 여전히 할 수 없다.


 

그런 순간들이 늘 위험하게 마련이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요. - 188p


종종, 인생이란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던 순간들에 대한 형벌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 113p

 

 

내가 희미해 보일 때면 내가 잡아서 모아두었던 것을 들춰본다. 나에게 그건 보통 일기장이다. 일기를 포함해 좋았던 소설의 문장, 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업무 관련 메모까지 나름의 규칙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있는 글들. 그 두께가 상당하지는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것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마음을 둘 곳이 없어 희미해졌던 과거의 나 역시 존재한다. 그때의 나는 놀랍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흔들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의 ‘나’라는 자아는 원래 불가해하다. 겹겹이 쌓인 것들을 해체하는 일은 쉽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으로 점철되어 있는 하루하루다. 하지만 가끔씩, 그 사이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면, 그리고 부유하는 그것들을 잡아채어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단단해지는 윤곽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윤곽

- 삶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이야기 -

 


지은이 : 레이첼 커스크

 

옮긴이 : 김현우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영미소설


규격

128*188


쪽 수 : 304쪽


발행일

2020년 08월 10일


정가 : 15,500원


ISBN

978-89-356-6854-0 (03840)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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