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라질까 두려운 여성들에게 [사람]

나에게 쓰는 편지.
글 입력 2020.09.0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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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블렛츨리 서클>, “절대 평범해지지 마!”

 


“울퉁불퉁하고 기묘한 여자들이 사라지거나 죽지 않고 결국 그들 자리에 남을 수 있도록.”


소설집 <사라지는 건 여자들 뿐이거든요> 발문 중 나희영 편집장의 문장이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극단적인 제목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여덟 명의 여성 소설가가 참여한 고딕 스릴러 모음집. 이 책은 허구의 스릴러만은 아니었다. 강력히 은유된 현실이고, 나와 친구들, 언니, 동생의 이야기였다. 울퉁불퉁하고 기묘한 여자들.


예술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서울대는 쓰지 마. 시집 못 가 여자는.”이라고 말했고, 다른 어른은 “이대 여자들은 기가 세서 별로야.“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여자는 예쁜 게 최고야”라는 말은 이제는 고리타분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어릴 적 운동장을 누비며 체육인을 꿈꿨지만 여자아이에게는 미술이 더 적합했으니 미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유를 찾아 나선 대학 자퇴와 자취의 길은 스릴러보다 더 스릴 넘치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자유보다는 무서운 세상을 알게 된 경험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위협이고 질투의 대상이고, 'no' 가 no가 아니라 'yes'로 받아들여지는, 발언권이 없는 스무살의 여성이었다.


이후 다섯 해를 보내오며 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런 내면의 허깨비- 거울을 보며 드는 생각들, 과한 자기검열, 사랑받지 못할 거란 불안감, 미디어에서 주장하는 이상적인 여성성, 아득한 미래- 와 끊임없이 싸운다. 종종 지쳐서 싸움을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싸움을 멈춘다면 당장에 편할지 몰라도, 미래의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나의 인생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의 공간, 가치관, 경제력- 이 역시 여성의 영역은, 사회의 평가는 여전히 편향적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행복감을 주는 재미난 일들이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 불안감은 나를 잠식시킨다.


성적 주체성을 잃었던 기억, 폭력과 감시, 외모로 인한 양날의 검, 폭식증과 거식증, 결혼을 하지 않는 관계, 결혼을 한다면 주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할 경제력, 그러기 위해 조급해지는 마음, 그런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이 악몽으로 이끈다. 무엇이든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는 이런 생각을 다시 자책하는, 분열에 이르는 밤이 찾아온다.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서 가부장제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내 마음이 떳떳해야 했다. 물론 시가에서돈을 주는 건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신들의 아들을 지원해 주는 것이니, 혼수를 더 많이 해준다고 해서 내가떳떳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해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으면 빚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약자는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살아가기가 힘든 법이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시가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고민했다. 나에게는 결혼으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권력의 문제였고, 자유의 문제였고, 나의 존엄의 문제였다.


서늘한 여름밤,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p130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겪어온 일들이 미래의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랑을 바란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가 행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끝나버린 사랑의 경험들로 또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나에게 뿌리내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매일 요가를 하고 달리기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나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나아간다. 시간을 흠뻑 채울 수 있는 취미나 취향을 찾는다. 그렇게 심신을 단련한다. 나를 지키며 사랑을 줄 수 있는 상태를 위해, 누군가 나를 흔들 때 조금만 흔들릴 수 있도록.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한 신념을 새롭게 세우고, 유연한 태도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막막하지만 나아가게 하는 힘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는 단단하고 연약한 여성들의 ‘연대’에서 느낀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의 울퉁불퉁한 내면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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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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