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SF가 보여주는 여성의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도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1977)
글 입력 2020.08.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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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SF. SF를 즐겨 읽지 않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조합이다. SF는 그 범위가 넓어 명료하게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SF 작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짧은 정의에 따르면, SF는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SF가 미래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그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고민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상준 SF 평론가는 ‘SF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과학적 상상력이 아닌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상의 세계를 통해 현재의 질서와 편견에 질문을 던지는 SF는 페미니즘을 만나 기존의 가부장 질서가 변화한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성별의 구분이 없는 세계, 여성이 권력을 차지한 세계, 출산과 육아를 사회가 부담하는 세계 등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 글에서는 국가가 임신과 출산을 완전히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 『시녀 이야기』와, 반대로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역전되어 어쩌면 여성에게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린 『이갈리아의 딸들』을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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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의 한 장면

 

 

『시녀 이야기』는 영미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가 1985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시녀 이야기』는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출생률이 급감하고 인구가 격감하자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탄생한 ‘길리아드’라는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길리아드는 여성을 강제로 잡아들여 ‘아내’, ‘시녀’, ‘하녀’로 나누어 출산과 재생산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한다. 임신이 불가능한 여성은 아예 ‘비 여성’으로 분류되어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사형당한다.

 

‘시녀’는 가족과 이름을 모두 빼앗긴 채 고위직 남성에게 소속되었다는 의미의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아 그의 아이를 낳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에게 출산을 위한 일과 하녀의 심부름이 아닌 일은 허용되지 않으며, 사방의 감시 아래 사실상 감금되어 있다. 또 정해진 기간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사회에서 퇴출당한다. 주인공 ‘오브프레드(Of Fred)’역시 프레드 대령에 소속된 시녀이다. 『시녀 이야기』는 길리아드에서 시녀로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의 독백을 통해 절망과 체념에 잠식되어 가는 내면을 묘사한다.

 

시녀 외의 여성도 철저히 임신과 출산을 위해 남성과 국가에 소속된, 가정의 일부분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아내’는 고위직 남성의 공식적인 아내로, 시녀가 낳은 아이를 키우며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가꾸고, ‘하녀’는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갖가지 일들을 처리한다.

 

상상만으로도 힘든 섬뜩한 세계다. 여성이 인간이 아닌 자궁이라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모습이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눈에 선하게 남는다.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불과 몇 년 전에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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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행정자치부는 출산율과 출생아 수, 가임기 여성인구 수를 지역별로 집계하여 지도에 분홍색으로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 지도’ 사이트를 오픈해 큰 논란을 빚었다. 특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심각성을 알리고 지자체 간의 “자율 경쟁”을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20~44세 여성 인구를 집계한 ‘가임기 여성인구 수’는 지자체별로 순위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는 국가가 여성을 단지 임신 가능 여부로 대상화한 것은 물론, 저출산의 책임을 가임기 여성에게 돌리는 국가의 안일하고 얄팍한 태도를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시녀 이야기』가 상상하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시녀 이야기』는 성과 가부장제 권력의 어두운 면을 길리아드라는 세계로 빈틈없이 그려냈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독자들은 상상이 마냥 상상이 아님을 어느 때보다 서늘하고 생생하게 느낀다. 여성이 출산과 인구 정책의 도구인 세계로 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여성이 원하고 상상하는 새로운 세계는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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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은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소설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적 위치가 정반대인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갈리아에는 여성(woman)과 남성(man)이 아닌 움(wom)과 맨움(manwom)이 있다. 움은 생명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우위에 있으며, 그래서 ‘결국 이갈리아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은 맨움’의 몫이다. 움은 이갈리아를 유토피아라 여긴다. 이갈리아라는 나라 이름 역시 평등주의(egalitarian)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다.

 

소설은 맨움 청소년인 ‘페트로니우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페트로니우스는  뱃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런 바람은 움인 동생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다. 페트로니우스는 성기에 페호(peho)라는 불편한 옷을 착용해야 하고, 어두운 숲을 지날 땐 움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이 밖의 모든 성 역할은 현실의 남성-여성 관계를 정반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도 ‘만들어진 전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단순한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언어체계, 종교, 지식체계까지 성의 권력은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능하는 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단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

 

만일 맨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맨움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

 

- p.379



페트로니우스는 맨움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소설의 끝자락에서 페트로니우스는 맨움과 움의 관계를 역전시킨 소설 『민주주의의 아들』을 발표한다. 하지만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을 평론하는 사람은 역시 모두 움이었다.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인 루스 브램 장관 또한 맨움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것이라 말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아들』의 첫 페이지는 맨움과 움이라는 단어만 남자, 여자로 바뀌었을 뿐, 『이갈리아의 딸들』의 첫 페이지와 동일하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느끼는 바는 단순히 억압받는 남성의 모습이 고소하다거나, 이갈리아와 같은 여성의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쪽이 움이든, 맨움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황을 어떻게 뒤집어 보아도 억압받는 쪽은 명백히 부당한 고통과 차별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갈리아는 절대 유토피아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갈리아와 같은 상상을 통해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고민하고 꿈꿀 수 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지 않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는 길리아드도, 이갈리아도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 출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고, 누구도 부당하게 고통받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세상을 바란다. 페미니즘 SF가 보여주는 윤리적 상상력으로 우리는 더 좋은 세계를 상상하며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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