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딴짓의 중요성 – 제발 놀게 해주세요 [사람]

글 입력 2020.08.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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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반복되는 일에 무지하게 약하다는 점을.

 

수험생 시절에도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내신 챙기기에 몰입하던 시절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매일 어제와는 다른 수업을 듣고 새로운 걸 배워나가는 일은 아주 재미있지는 않아도 견딜만 했다.

 

하지만 내신 성적만 믿고 수능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고3이 되면서부터 수능 준비에 돌입했는데, 그것이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었다. 매일 아침 동일한 시간에 타이머를 맞춰 두고 시간과의 싸움을 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훈련’을 하는 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반복을 싫어하고 숨쉬듯이 ‘현타’를 맞던 학생은 자라서 광고기획을 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성실함보다는 유연성을 필요로 하고, 정답보다는 현답을 제시해야 하는 길이다. 수많은 단점(워라밸이라든지, 워라밸이라든지…)을 감수하고서라도 굳이 이 바닥에서 일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오직 그거다. 별로 성실하지 않아도 되고 기꺼이 딴짓을 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나는 혼나지 않는 딴짓,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딴짓을 실컷 하고 싶은 사람이다.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 보면 금방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하는 생각에 갇혀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나지만 그래도 시작한 일을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툭하면 딴짓을 통해 정신을 잠시 해방시키곤 한다.

 

즉 성실하게 일을 다 끝마치고 놀기보다는 중간 중간 쓸데없는 걸 하면서 HP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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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딴짓이 뭐냐 하면 거창한 표현으로 ‘콘텐츠 소비’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일들이다. 책,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팟빵까지. 나는 매체적 특성을 가리지 않고 재밌는 걸 찾아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재밌게도 이처럼 방대한 콘텐츠 소비는 기획을 위한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데 의외로 큰 도움이 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심심해서 본 한 편의 좀비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너무나 재밌었다고 하자. 보통은 ‘아 좋았네’ 하고 영화를 끈 뒤 금세 일상을 영위한다. 하지만 간혹 그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를 찾아보고, 메이킹 필름을 찾아보고, 위키에서 해당 작품을 검색하며 이 영화가 어느 선대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좀비물의 기원과 다양한 파생장르에 대해서도 순식간에 파헤쳐버리는 인간들이 있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이건 일종의 습관이다. A를 좋아하게 되면 A-1, A-2…는 물론이고 B, C, D 전부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론 그렇게 알아낸 모든 콘텐츠를 정당한 시간을 투자해 전부 감상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한 편당 2시간이 넘는 경우가 다반사고, 드라마 한 시즌을 끝내려면 며칠 밤은 꼬박 필요로 하는데 그걸 언제 다 소비하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수박 겉 제대로 핥기’라는 스킬을 익힌다. 영화의 제목과 스토리라인, 감독, 배우, 평론 몇 개만 읽고도 아는 척 하는 이런 깊이 없는 겉핥기식 소비는 비판받아 마땅할지 모르지만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보고 싶은 건 많고 떠들고 싶은 것도 많은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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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 듣고 즐겨 보는 <듣똑라>에서 김효은 기자는 “넷플릭스, 왓챠에서 어떤 걸 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목차 보기)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라면 평소 넷플릭스 등에 어떤 콘텐츠가 있었는지 머릿속에 DB화를 해놨다가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그걸 선택해서 보는 식”이라는 그의 말에 무릎을 탁 쳤다. ‘훑어 보기’와 ‘깊이 보기’를 같이 하는 것. 볼게 너무나 많은 2020년의 콘텐츠 소비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영감을 얻고 싶은 순간에는 과감히 일을 놓아버리고 딴짓을 한다. 그렇게 쌓아둔 콘텐츠 관련 정보들, 댓글과 SNS 버즈 같은 소비자들의 ‘반응’들을 그때그때 적립해 둔 사람은 브레인스토밍도 잘 한다. 어떤 테마가 주어지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올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 결국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서 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좀만 더 참을성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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