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이 '맛있는 고기'로 태어난다면? [도서]

한승태 노동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와 영화 <템플 그랜딘>
글 입력 2020.07.21 15:1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31.jpg


 

 

바로 눈앞에서 닭, 돼지, 개의 삶을 만나다, 생생한 '르포 에세이'


 

알고 있기는 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닭들이, 돼지들이, 소들이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다가 괴로운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책은 '대충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줬다.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이 버무려진 르포 (신문, 방송, 잡지 등에서, 현지로부터의 보고 기사(報告記事))형식은 마치 내가 그곳에서 같이 노동 하고 같이 미쳐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맛있는 고기(동물)뿐만 아니라 힘쓰는 고기(인간)들에 대한 삶도 곁들여 모든 고기들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인 삶의 현장을 직접 겪고 온 기분이었다.

 

 

 
맛있는 고기의 경우

 

작가는 식용 닭, 돼지, 개들이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직접 일을 하며 맛있는 고기들의 끔찍한 삶을 기록한다. 작가의 땀과 눈물이 스민 현장의 보고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사유를 주었다.

 

 
닭의 경우
 
몇 해 전, 복날을 앞두고 인가, 아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괴물을 본 적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케르베로스가 개 세 마리의 머리를 달고 있는 괴물이라면 내가 본 괴물은 천 마리쯤 되는 닭의 머리를 달고 도로를 쌩쌩 달리는 모습의 괴물이었다. 수천 개의 빨간 눈들이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은 오랜 시간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책에선 내가 본 복날의 수천 마리 닭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욕심으로 최대 3마리 정도 들어가는 케이지에 5마리의 닭을 꾸겨 넣고, 생산력이 없다는 이유로 수평아리들을 산채로 갈아서 비료로 만들고 잘 크지 않는 닭들은 사료를 축낸다는 이유로 목을 비틀고…. 복날 전에 봤던 그 머리가 수천 개인 닭괴물의 눈동자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악몽처럼 날 따라다녔는지 알 법도 했다.
 
특히나 수많은 해외 국가들은 닭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방식인 '산란계 배터리 케이지' 사육을 금지 했으나 국내에는 그러한 제재가 없었다. 그나마 내가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2012년부터 시작된 '산란계 동물복지 축산 인증제'의 인증을 받은 계란을 사는 정도였다.
 
 
돼지의 경우
 
사실 돼지들은 개만큼이나 똑똑하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에 대한 의존도 정도…. 그런데 우리는 자주 돼지보다는 인간과 친한 개나 고양이의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우리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이렇게 지능이 높은 동물인 돼지들에게 비(非)돼지적인 사육환경은 배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마취도 없이 단지 편의나 맛을 위해 행해지는 끔찍한 조치(이빨 뽑기, 꼬리 자르기 등)들을 눈앞에서 본다면, 아 안 먹어요. 소리가 절로 날 것 같았다.
 
다른 국가들에는 이렇게 지능이 높은 돼지들의 고통 경감을 위해 꽤 세심한 법률들이 존재했다. 유럽 연합의 법률엔 돼지들에게 의무적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것이 있었고, 덴마크의 경우엔 돼지들의 목욕을 위한 진흙 수렁 제공에 관한 법률, 또 여러 유럽 국가들에선 돼지 스톨을 금지하는 법안 등 본받을 만한 법률이 꽤 많았다.
 
우리나라도 동물보호법 제 9조에 전기 충격으로 돼지를 이동시키는 정도의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동물복지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개의 경우
 

크기변환_8dcd0e6d95780.jpg

사진 출처_동물해방물결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하고 친근해 그 정도가 덜할 것으로 생각했던 개의 경우가 오히려 가장 충격적이었다. 식용개는 사실상 불법으로, 법이 없으니 따라야 할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차라리 식용개를 합법화해서 제대로 된 제도라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까지 했다. 법망에 구애받지 않고 구매하고 사육할 수 있기 때문에 식용개를 키우는 이들 중 일부는 돈이 더 들 것을 우려해 아예 식용개를 합법화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개의 경우는 닭이나 돼지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고 끔찍한 환경에서 사육당하고 있었다. 동시에 모든 맛있는 고기 중 가장 사람을 잘 따르는 동물이기도 했다. 아이러니였다. 이전에 나는 유기견보호센터로 봉사활동을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왜 어떤 강아지들은 한없이 사랑받는데 어떤 개들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다 세상의 부조리가 환멸 나서 울고 싶어지곤 했다.
 
아마 내가 식용개 사육장에 갔으면 기절했을 것이다. 책 속의 생생한 묘사가 너무도 끔찍해서 차마 지면에 실을 수 없을 정도다. 개 사육장에서 주인공의 심리변화도 흥미로웠다. 정 주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는 농장주인의 말을 어긴 죄로 그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개의 경우에는 적당한 사료 기준이 없어서 주로 음식물 쓰레기들을 먹여서 키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때문에 식용개들은 죽을 때까지 맑은 물을 마셔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그 부분이 무척 마음 아팠으나 일부 개농장 주인들은 본인들이 개를 이용해 국가의 골칫거리인 '짬' 처리까지 한다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심지어 암묵적으로 국가 역시 그들의 짬처리를 감사라도 하는 듯 관련된 어떠한 규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개의 경우엔 식용하는 국가가 거의 없다 보니 관련된 해외 법률도 없어 그 사각지대를 조명할 마땅한 참고자료조차 없었다.
 
 
 
힘쓰는 고기의 경우

 

힘쓰는 고기 중 약한 고기와 강한 고기의 차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묘사는 수준급 비꼬기였다. 특히 같은 힘쓰는 고기의 입장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세세하게 다룬다.

 

사업주들이 법망을 피해 얼마나 교묘하게 그들을 차별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에서 묘사한 법은 늘 약자를 피해 간다. 온전히 강자의 편이다. 근로기준법은 농축산업 종사자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힘쓰는 고기들을 피부색 별로 나눠놓고 서로 다르게 대우하는 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간혹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차별적으로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공평한(?) 농장도 있었지만, 작가의 눈에는 이미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평균임금이 바닥을 치는 농축산업계에선 그러한 공평함조차도 그저 '생색내기용'으로 우습게만 보인다.

 

 
이렇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임금 차이는 없지 않냐고. 그런 지적도 물론 타당하지만 내 해석은 이렇다. 이제 한국인들은 이런 지방의 외딴 농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중략) 나 같은 30에 한국인이 이런 농장에서 일하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따라서 이 경우는 태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월급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태국인과 같은 월급을 받았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주로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책에서 여성의 처지를 비유한 -아주 짧게 스쳐 가는- 대목에서 나는 작가가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컨트리클럽이었다. (중략) 골프장에선 풍채 좋은 중년 남자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코스 위를 거닐고 있었다. 그들 뒤를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여자들이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다녔다. 남녀 간의 가사 분담 비율을 표현한 병적인 행위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고기의 경우

 

공장식 농장 속 동물의 생활과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을 읽고 있다 보면 이 모든 고기들이 하나의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상품 가치가 없는 맛있는 고기들은 가차 없이 목이 비틀리거나 맞아서 죽음을 맞이했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피부색이 달라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힘쓰는 고기들은 다른 고기들에 비해 돈을 적게 받았다. 쓸모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모습은 맛있는 고기든 힘쓰는 고기든 모두 같았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선언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쓸모보다 존재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힘쓰는 고기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나는 모든 고기들에 그 적용 범위를 넓혀 생각하겠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가 살아있는 존재에까지 적용되는 게 당연히 여겨지는 오늘날에, 사르트르의 그 발언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사랑의 유사어, 차별

 

그렇다고 닭, 돼지, 개를 사육하고 유통하고 또 이방 나라에서 온 힘쓰는 고기를 차별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인 악(惡)인가 하면 그렇게 보기도 애매하다. 책에는 내 머리를 세게 때린 구절이 하나 있었다.

 

 
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중략)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중략)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는 딴소리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악해 보였던 농장 사장이 돈 때문이라도 오히려 돼지를 때리지 않고, 사람 좋고 정과 의리가 넘치는 사장이 인간들의 힘듦을 덜어주기 위해서 돼지를 때리는 아이러니를 보며 과연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이 외에도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입체적일 수 있나? 싶은 대목들이 자주 등장한다. 젊을 땐 민주투사였던 인물이 어른이 되어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된 개장수 노릇도 ‘마다하지 않고 하는 성실한’ (개들에게는 아마 악마나 다름없을) 모습이나 처음에는 개들에게 정을 주고 후에는 혐오하게 되었던 주인공의 모습들이 그렇다.
 
그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그들을 무작정 비난하기에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군가에겐 '괴물'이 되어버린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삶에 의심이 필요한 이유

 

그 이유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나름의 결론을 짓는다.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중략)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성찰과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이처럼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의심하지 않는 인간은 괴물일 뿐이다. 단지 작가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의심은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그런 자본주의식 합리적 의심이 아니라 무엇이 선(善)인지 무엇이 자연의 섭리에서 합리적인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을 의심해야 하나, 생각해보자면 과연 힘쓰는 고기가 현재의 맛있는 고기의 처지가 되었을 때도 이것이 최선(最善)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윤리적인 사육방식의 시도를 담은 영화 <템플 그랜딘>

 

크기변환_unnamed.jpg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영화 <템플 그랜딘>에서 다룬 윤리적인 사육방식의 시도가 이러한 의심과 성찰, 고민 끝에 나온 바람직하고 건강한 방향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소의 입장이 되어 더 나은 방향의 사육을 고민하고 도축되는 순간까지의 삶을 보듬어주는 가축 시설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 단순한 영화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실화'이다. 이 감동적인 실화는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고 고민하게 된 '동물과 공존하는 비폭력적인 삶'에 대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준다.
 
희망적인 사실은, 우리들은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힘쓰는 고기인 동시에 사유하고 성찰하는 고기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의심하고 최선의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고기가 조금은 더 행복해지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동물복지 인증 달걀 사러 가야지.
 
 
 

KakaoTalk_20200713_104132648.jpg

 

 

[이강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12.0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