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자란 어른들에게 건넵니다 - 우리들 / 우리집 [영화]

글 입력 2020.07.1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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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춘기’, ‘비행 청소년’, ‘미숙한 문화인’, ‘미성년’, ‘질풍노도의 시기’

 

어른들의 세계엔 청소년이 한 명의 독립적인 개체로서 불릴 수 있는 이름이 몇 없다. 수동적인 뉘앙스의 이름들은 그들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이는 곧 성인이라는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한 ‘미(未)’성년이라는 반쯤 모자란 이름에 그치고 만다. 덜 자란 미숙한 인간.

 

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청소년이 그려지는 방식을 통해 더욱 명확히 ‘혐오’로 진단된다. 미디어 속 청소년 인물들은 부모로부터 다음과 같은 핀잔을 듣곤 한다. “게임 좀 그만해라!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아이돌 쫓아다니면 걔네가 밥 먹여주니?”

 

나아가 청소년의 연령층이 주된 향유집단인 문화의 경우엔 그 문화 또한 함께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완전한 문화로 존중받지 못하고 철없고 미숙한 이들의 향유문화 정도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현실을 반영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모자란 어른들이 많다. 무조건적인 부정의 언어들, “어린 게 뭘 안다고” “대들지 마”와 같은 문장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한 개체의 가치를 폄하하며, “가만히 있으라”라는 문장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것도 어언 6년이다.

 

청소년을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의 분위기는, 그들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다. 고립시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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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소개할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더욱 반갑다. 윤가은 감독의 작품은 ‘아이들’이라는 키워드를 관통한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대개 어른이 아닌 아이였다. 아빠와 바람난 불륜녀의 집에 들이닥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손님>, 할아버지의 제삿날, 엄마를 대신해 콩나물을 사오려는 7살 보리의 여행을 담은 영화 <콩나물>, 그리고 오늘 소개할 두 장편 영화 2016년의 <우리들>과 2019년의 <우리집>까지.

 

이처럼 어린 배우들과 함께하는 윤가은 감독에겐 특별하고 뜻깊은 철학이 있다. 그는 “어린이 배우들은 성인 배우보다 속도가 느리기 마련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맞춰야 한다. 어린이 배우들을 소외하지 않고 영화 중심에 두고 촬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신념을 토대로 한, <우리집> 현장의 여덟 가지 촬영 수칙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1. <우리집> 현장은 어린이와 성인이 서로를 믿고, 존중하고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을 제 1원칙으로 합니다. 어린이 배우들을 프로 배우로서 존중하여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이자 삶의 주체로서 바라봐주세요. 항상 어린이 배우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동료이자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세요.

 

8. 어린이들은 항상 성인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매 순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멋진 거울이 되어주세요. 존중하고 믿을 수 있는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세요.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윤가은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인 <우리들>과 가장 최근의 영화인 <우리집>을 엮어 윤가은 감독이 영화 밖이 아닌 영화 자체를 통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위하여 힘써왔는지 영화의 결말을 통해 분석해보려 한다.

 

 

 

기억폭행 당해서 전치 4주 나왔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따뜻함’이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그의 영화를 ‘따뜻한 영화’로 소개하는 데까지는 한 템포 정도의 망설임이 놓여있다. 내가 그의 영화로부터 따뜻한 감각들을 떠올린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어린아이들만의 따뜻한 상상과 순수한 유대의 행위들을 영화 속 인물들로부터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른인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초반부터 그들과의 내적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물론 ‘어린 시절 = 순수함, 따뜻함, 행복’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영화에 대한 기대 지평으로 소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 지평은 영화를 재생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배반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에 대한 코멘트 중 기억에 남는 코멘트 한 줄로 요약을 대신한다. ‘기억폭행 당해서 전치 4주 나옴’

 

이 글에서 다룰 두 영화 <우리들>과 <우리집>을 따뜻하지 않은, 나아가 조금은 서늘하기까지 한 영화로 정정하여 소개한 데는 영화의 ‘불편할 정도의 지나친 현실성’에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은 영화의 결말이다.

 

<우리들>과 <우리집> 결말의 공통적인 지점은 앞선 ‘따뜻한데 따뜻하지 않은 영화’라는 소개와도 상통한다. 두 영화의 결말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 ‘해피엔딩인데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 먼저 두 영화의 엔딩 장면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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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 속 갈등 키워드는 ‘친구’로, 두 주인공인 선과 지아의 관계 회복을 완벽한 해피엔딩을 완성하는 핵심적인 열쇠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 시퀀스는 ‘피구’ 시퀀스로 직전의 장면에서 큰 갈등을 겪은 선과 지아였지만, 피구 경기 중 경기장의 라인을 밟았다고 의심을 받는 지아를 유일하게 선이 옹호함으로써 갈등 해결로 가는 긍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결말이다.

 

그러나 ‘피구 경기장의 중앙선의 양쪽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선과 지아’라는 가장 마지막의 씬을 적극적인 화해씬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결말을 완전히 닫힌 해피엔딩으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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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갈등 키워드가 ‘친구’라면 <우리집>의 갈등 키워드는 ‘가족’이다. 따라서, 이혼을 결정한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 하나의 가정이 안정을 찾고 부모님과 하나가 소통으로써 갈등을 해소하는 엔딩을 가장 이상적인 해피엔딩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결말은 다음과 같았다. 집을 떠난 하나가 다음날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식탁에 밥을 차리고, 하나를 찾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과 하나의 오빠가 하나를 다그치자 하나는 그저 “우리 밥 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 준비하자”라고 말하며 가족들을 한 데 식탁에 앉힌다. 그리고 침묵 속에 가족들은 하나가 차린 밥을 먹는 것이 마지막 씬.

 

두 영화의 결말은 갈등의 완벽한 해소로 보기엔 어딘가 모자란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영화 이후의 시간을 상상해보도록 한다. 즉 주인공들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결말로 단정 짓지 않도록 그리고 영화 이후의 시간에서 갈등은 해소될 것인지 의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론은,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어쩌면 애초에 ‘마음 따뜻한’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따뜻한 색감, 아이들의 순수한 몸짓, 어른들의 추억을 불러오는 기분 좋은 장면들에 미소 짓다가도 금세 지나치게 현실적인 서사에 ‘기억 폭행’을 당하며 고통스러워지는 아이러니함을 두 영화를 통해 경험했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를 ‘따뜻한’ 영화로 소개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말뿐 아니라 영화 속 입체적인 인물들과 서사는 모두 지극히 불편한 ‘현실’을 보여주는 맥락으로서 상통한다.

 

 

 

“애들이 힘들 게 뭐가 있어. 그냥 학교 가고 공부하고 노는 게 다지”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거는 기대란 동화같이 따뜻하고 훈훈한 서사일 테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그 기대를 서늘한 방식으로 무너뜨린다. 대신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뭉뚱그린 방식의 장막을 걷어낸 뒤의 공백에 진짜 현실의 폭력적인 기억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가 지니는 의의는 현재의 어른들보다도 아이들에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두 영화로 하여금 어른들은 잊고 있던 지극히 특수하고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감각을 다시금 수면 위로 꺼내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둔감한 어른이란 특수하고 개인적인 기억을 무디게 감각함으로써 현재의 어린이들 개개인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감정과 서사를 존중하지 않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며, 끝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그동안 다수의 어른들이 뭉뚱그린 기억과 감각으로 아이들이 써가는 독립적인 서사에 폭력을 가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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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 속 선의 아빠는 선에게 “애들이 힘들 게 뭐가 있어. 그냥 학교 가고 공부하고 노는 게 다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많은 독자들은, 그 말을 듣는 선의 심정을 상상하며 함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선이 영화 내내 겪은 고통과 선이 현재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독자들도 함께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부끄럽게도, 나는 선의 아빠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자란 어른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선과 지아, 하나와 유미, 심지어 따돌림을 방관했던 교실 속 인물이기도 했던 시절을 겪어왔으면서, 그러한 기억들은 쉽게 흘려보내고서 친구나 가족과의 일종의 인간관계로부터 겪는 문제들보다 더 중대하고 심각한 일들이 있다고 단정 짓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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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우리집>의 아이들은 공통의 목표를 지녔지만 서로 다른 결핍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속 선과 지아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훗날 바다에 함께 가고자 했던 것은 같지만, 이혼 가정의 지아와 지아와는 다른 방식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는 선이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었던 것처럼, <우리집> 속 하나와 유미가 각자의 집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같지만, ‘집’이라는 공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타인의 결핍엔 서투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른들도 결국 지금의 아이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 속 아이들이 공동의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리하여 성장해갔던 것처럼 어른들도 그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윤가은 감독이 자꾸만 말하는 것 같다. 어린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세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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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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