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일상에게 [도서]

희곡집 우리읍내, 우리네 인생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7.0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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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추천받다.


 

고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수험생 시절일 때 추천받은 책이 하나 있다. 당시 나는 대입 면접을 앞두고 면접 학원을 잠깐 다니고 있었다. 다른 학원처럼 꾸준히 다닌 게 아니고 단발적으로 며칠 다니고 마는 그런 속성 강의였다. 모의 면접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들어보니까 너는 일상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책 한 번 읽어봐. 우리 읍내라는 희곡집, 연극 각본이야. 죽으면 딱 한 번 자신이 살아온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데 …. (소리 점점 작아짐)”

 

내가 무슨 말을 했고, 어쩌다가 책까지 추천을 받았으며 선생님이 말을 어떻게 마치셨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위에 적은 선생님의 말씀 또한 저렇게 그대로 말씀하셨는지 확실한 것도 아니다. 맥락과 키워드를 살려 재구성한 문장. 그러나 우리 읍내our town이라는 책이 뇌리에 탁하고 팍 박혀버렸다.

 

그 이후 나는 그 책을 사서 읽었고, 아직도 그 책은 내 책장에 있다. 문득 생각이 나는 책이고 책에 관한 내용도 흐릿해지는 것 같아 며칠 전 이 책을 다시 꺼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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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읍내라는 책


 
희곡집이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희곡집. 작가는 주로 보편적인 진리를 다룬다는 손톤 와일더. 희곡집 형식에 익숙지 않아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땐 더듬거리며 읽었다. 오래간만에 다시 읽은 책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잘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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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톤 와일더. 1938년 우리읍내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책은 1901년부터 1913년을 배경으로 한다. 시간 흐름 순으로 총 세 막으로 구성된다. 한마을에 사는 두 가정집을 주로 보여주는데 1막에서는 아이들이 한창 자라는 10대 때의 일상생활 모습이 펼쳐진다.
 
일을 다녀온 아빠, 아이들을 깨우는 엄마, 공부를 잘하는 옆집 에밀리에게 공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조오지. 3년 뒤 2막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조오지와 에밀리의 결혼 장면이 나온다.
 
 
웹 (에밀리의 부, 조오지의 장인)
결혼 전날 우리 아버지 말씀이, “처음부터 콱 잡아라. 제일 좋은 건 명령하는 거야. 무조건 복종을 시켜. 그리고 바가질 긁거나, 어쨌든 화가 나면,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려. 그럼 정신차린다. 또 절대로, 죽어도, 너한테 돈이 얼마 있는지 가르쳐주지 마라.” 이러셨거든.
 
조오지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래 난 그 정반대로 했지. 그랬더니 아직까지 이렇게 편안하단다. 명심해라. 이런 일에 남의 충고는 소용없다는 걸.
 
- 책 72p, 인상깊은 대화라서 발췌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장면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고 막이 내렸다. 막이 다시 오른다. 이제 3막이다. 무대의 오른쪽에 객석을 향해 놓여있는 의자 열 개에 배우들이 들어와 앉는다. 공동묘지의 무덤들이다.
 
에밀리는 출산 중에 죽게 되고, 공동묘지의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들과 대화하다가 에밀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저 없이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간다. 사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다른 이들의 만류로 평범했던 날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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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어바웃 타임>

시간, 순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우리읍내와 비슷한 메시지를 던진다.


 
에밀리
행복했던 날 하루로 고를게요.
 
깁스 부인
정 그럼 평범한 날을 골라라. 그래도 충분하다.
 
 
때는 에밀리의 열두 번째 생일 날. 생일 축하를 전하고, 식탁에 놓인 선물들을 하나씩 설명해주는 엄마, ‘우리 예쁜 딸’을 부르며 에밀리를 찾는 아빠. 지난날의 평화롭고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절을 지나고 죽음 끝에 되돌아온 사람이 보기엔 평범한 일상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흐르는 시간이 너무 빨라 아쉽고, 그 찰나가 모두 소중할 뿐.
 
에밀리는 엄마에게 죽은 후에 겨우 찾아왔다고 이렇게 모인 이 시간을 소중히 하며 서로 바라보고 있자며 애달프게 얘기하지만, 그 말은 엄마에게 닿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왔기에 그 일분일초가 아까운 에밀리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좌절하고야 만다.

 
에밀리
도저히. 더는 도저히. 너무 빨라요. 서로 쳐다볼 시간도 없이요.
(울음이 터진다)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평범한 일상이 평범해질 수 있기까지

 
누군가 나에게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집 강아지와 엄마와 함께 산책 하러가는 시간이라고 답했다. 주로 오후 4~6시쯤 산책하러 나가는데, 그때쯤이면 해가 기울고 아주 진한 노랑과 주황이 섞인 햇빛이 쏟아진다. 잔디 위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모두가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 사이에서 나와 우리 집 개와 엄마는 ‘아빠를 다이어트 시켜야겠다.’, ‘동생이 컴퓨터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 ‘집 가면 저녁 찬을 무어로 할까?’ 등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저 산책 시간을 함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사실 까다로운 조건이 많다. 내가 바쁜 일이 없고, 약속이 없어 저녁에 집에 있어야 하고. 엄마가 아픈 데가 없어 집 밖에 나와 40여 분 정도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하고. 비도 오지 않아야 하고. 아, 우리 강아지도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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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러 가는 길

 

 
평범한, 보통의 나날이 그만큼 값지다는 것은 어지간해서 깨닫기 힘들다. 에밀리는 무대감독에게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느냐고 묻지만 무대감독은 겨우 성인과 시인만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답하니까. 에밀리는 죽은 후에야 그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알게 된다.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시간도 평범하기에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에 대한 여러 글을 읽었는데, 대다수 글에서 이 책의 주 메시지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정리하고 있었다. 죽인 시인의 사회가 큰 울림을 준 이후로 이 문장을 잊은 적이 없지만, 이 책에서도 이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재에 충실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여러 번 곱씹어 보니 이 말만큼 이 책이 주는 교훈을 잘 설명할 다른 말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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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 Diem!

 
잠깐 생각해보자. 내가 살면서 놓치고 있는 게 없나. 오늘 집을 나설 때 배웅을 나온 엄마와 강아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긴 했나.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동생에게 친절한 답변을 들려주긴 했나.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지만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도록.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허투루 시간을 날리지않기를. 당연하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않게.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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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우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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