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he shape of water, love, human' [영화]

글 입력 2020.06.2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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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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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카, 소련과 미국, 비밀 연구소, 시네마, 흑인 인권 운동, 우주로 가는 인간 등의 소재들로 인해 영화의 배경이 1960년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은 혼란과 동요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국제적으론 소련의 우주 개발 전쟁이 한창이었고 국가적으론 비주류에 대한 무시와 폭력이 난무했다. 영화는 이러한 혼돈 속, 미국의 항공우주 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자의 다소 따분하리만큼 단조로운 일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녀는 극장 옥상에서 혼자 살며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혼자만의 쾌락을 즐기기도 하며 달걀을 삶고 구두를 닦은 뒤 일터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출근하여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가장 가까운 동료인 흑인 여자 젤다의 이런저런 불평도 줄곧 들어주곤 한다. 퇴근 후엔 옆집의 가난한 동성애자 예술가 친구 자일스의 집에서 수다를 떨기도 하는데, 남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한 가지 특이점은 말하지 못하는 농아라는 것이다.

 

탈 없이,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의 일상이 완전히 다이나믹 해진 건 어느 날 연구실에 괴생명체 하나가 잡혀 오면서부터다. ‘그것’은 어류와 파충류를 합친 듯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는데 청소 중 우연히 ‘그것’과 마주한 엘라이자는 소외와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로 ‘그것’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게 되고 계란 한 알을 계기로 그녀와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하기 시작한다. 둘의 언어 능력 부재로 언어로 소통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비언어적 표현인 수화와 몸짓 표정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여느 영화와 다를 것 없이 그들의 사랑에 훼방꾼이 등장한다. 연구실 보안 책임자인 스트릭랜드는 ‘그것’을 고문하고 죽이려 한다. 호프스테틀러 박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부하라는 상급자의 지시가 떨어지고 ‘그것’은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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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판타지 영화에는 영 흥미를 못 느끼는 편이다. 어릴 적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 소설을 극성맞게 좋아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나만의 무한한 상상들이 좋아했던 편이라 상상의 것들을 이미지로 구현해놓은 영화는 괜스레 이질감이 느껴져 굳이 찾아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이러한 까닭과 몇 가지 연유로 <셰이프 오브 워터>의 첫인상이 그다지 호감이진 않았다.

 

솔직히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그 유명한 판타지 <판의 미로>라는 작품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등장하는 괴물의 비주얼에 충격받아 초반부에 꺼버려,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라이프 오브 파이>와 같은 명작을 워스트 오브 워스트로 꼽을 만큼 심해 공포증이 심한 내게 (심해+괴생명체)의 포스터라니. 믿고 거르는 영화와도 같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다름 아닌 학교 과제였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재생한 영화가 아니었다 보니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의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는데 그래서였을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인물도 자막도 아닌 유독 선명한 색감이었다.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 자체가 녹색이었고 곳곳에서 녹색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색이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변화를 겪을 때, 혹은 영화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관객이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돕는 장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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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영화 제목이 water인 것처럼 물의 색인 green이 주를 이룬다. 주인공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착용하고 있는 직장 유니폼 역시 녹색이다. 나는 이를 보고 미래를 이끌어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녹색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해석했다. 주인공은 때때로 빨간색 머리띠와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사랑에 빠진 여자를 상징하는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색은 계층의 위계를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하층민과 약자들은 녹색으로, 스트릭랜드와 같은 고위 관직의 인물들은 흰색과 검은색 조합의 정장으로 표현해 계급 사회를 보여주었다.

 

스트릭랜드는 단순히 고위 관직자가 아니라 유일한 악역으로 등장하기에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는 ‘완전’해 보인다. 통상의 ‘완전’과는 거리가 먼 장애인 엘라이자, 성 소수자 자일스, 흑인 여성 젤다, 괴생명체 그것과는 대비될 만큼 완전해 보이는 인간이다. 백인 남성이라는 당시 시대상 최고 우등한 위치, 총 책임자라는 지위, 처자식에게 사랑받는 가장이라니, 완벽한 삶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 비치는 것과 달리 철저히 고립된 ‘불완전’한 인간이다. 자신을 성경 속 신에 비유해가며 권력을 행사하지만 결국 그의 잘린 두 손가락이 암시하듯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완전’과는 거리가 멀어, ‘불완전’해 보였던 이들의 실상은 어땠을까? 엘라이자, 젤다, 자일스는 서로의 고난과 비극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보듬었고 위기가 닥칠수록 함께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사회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은 불완전해 보였을지언정 그들은 가장 인간적이었고 배려와 믿음, 우정과 사랑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핸디캡은 어떠한 문제조차 되지 못했다.

 

이는 엘라이자와 ‘그것’의 사랑에도 적용되었다. 엘라이자가 “날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내가 어디가 모자란지 어떻게 불완전한지 모르는 눈빛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요.”라고 말하듯 ‘그것’은 그녀가 인간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인지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을뿐더러 자신을 고문한 인간들과 같은 종족임에도 개의치 않고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만을 신뢰한다.

 

엘라이자 역시 ‘그것’의 외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와 나누었던 감정을 신뢰하고 그 자체를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사랑한다니. 이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부끄럽게도 확신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생명이든,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완전해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우리 각자의 형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영화의 제목이 존재하지 않는 물의 형태를 말하듯 사랑의 형태와 생명의 형태 또한 정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담기는 곳에 따라 가변적인 모양이 아닌 불변의 본질이니 말이다.

 

비호감이었던 첫인상과 달리 꽤 긴 여운이 남았다. 선입견과 달리 괴생명체는 인간보다 인간적이었고 다양한 인간 군상과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모양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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