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로운 시선의 영화 [영화]

글 입력 2020.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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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퀴즈 온 더 블록이란 프로그램에 한국 영화, 드라마 OTT 서비스를 운영하는 왓챠의 CEO가 출현했다. 그는 소수자의 이야기는 다른 작품보다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고 한다고 밝혔다. 여성 이야기, LGBTQ 이야기 등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이유까지 설명해줬다. 영화는 역사를 반영한다. 시대를 반영하며 당대의 사유 체계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왓챠 CEO의 말을 인용하여 지금은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는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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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요즘은 그런 소수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대가 원하는 작품이며, 그런 시대를 향한 영화계의 응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난 2020년 6월 5일에 진행한 백상 예술 대상에서도 영화 ‘벌새’, 연극 ‘로테르담’, ‘와이프’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다시금 주목받으며 수상의 영광까지 거두었다.

 

최근 영화계는 계속해서 관객과 시대에 응답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지 않는 한 시대에 억눌려있는 작품이 아니다. 오늘 당장도 2000년대 초반 작품을 아니면 1950년대 작품까지도 손쉽게 사유할 수 있는 시대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과거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사유할 것인가. 문제가 있더라도 예술이란 장르의 자유성에 사유하기를 그만둘 것인가.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 외쳐야 하는가.

 

그 이전 작품을 선별적으로 보기 어려우며 적어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봐야 한다. 끝까지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고, 영화학적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작품의 윤리성부터 사유해야 한다. 그 이후에 작품의 미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그리 늦지 않다.

 

요즘 흑인 인권 운동이 다시 진행되고 있다.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차별과 편견의 역사를 이제는 끊어보겠다는 운동이다. 그전에도 진행되어야 했던 운동이다. 그러면서 영화계도 이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해외 영화 OTT 서비스 ‘HBO 맥스’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인종 차별 영화라면서 해당 영화를 더 이상 상영하지 않고 있다.

 

영화적 예술성과 사회적 윤리성 중에서 결국 윤리성이 승리한 사회다.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면서 미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소비할 수 있다. 그것은 소비자의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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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는 어쩌면 이런 윤리성을 가장 잘 이용해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퀴어 아이’ ‘러브 사이먼’ 등 지속적으로 퀴어 서사를 만들고 있으며 ‘필 굿’, ‘페미니즘 다큐’ 등 여성 서사도 빠짐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2020년에 개봉한 ‘반쪽의 이야기’는 넷플릭스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 같다. 작품의 이야기는 한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던 엘리에게 운동선수인 폴이 편지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엘리도 그녀를 향한 편지를 쓰면서 애스터에게 마음이 향하게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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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를 설명한 것을 가지고 와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원래 인간은 남성 – 남성, 여성 – 여성, 남성 – 여성 총 3가지의 종이 있었으나 어느 순간 신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신이 이들을 떨어트려 놓았다고 한다. 이에 플라톤은 사랑은 성에 구애받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신적으로 맞는 사람이 진정한 에로스라고 설명한다.

 

작품은 그동안 퀴어 서사가 범했던 오류를 만들어내지 않고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란 작품이 등장했을 때 다소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의 과정에서 여성을 너무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며 비판받았다. 작품은 미학적이지만, 옳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성 퀴어 서사 임에도 결코 누군가를 이용하여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사람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 과정에 폴은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또 다른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

 

‘러브, 사이먼’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웃팅 당하는 이야기 혹은 ‘수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이제는 진정한 퀴어 서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애자 담론에 속해있는 관객들은 LGBTQ 서사는 어딘가 특별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듯하다. 어딘가 모르게 더 애틋하고, 더 강렬한 느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저 그들은 사랑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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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이 영화는 아시아계 여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퀴어 서사를 다룬다고 해도 우선적으로 제작되는 것은 백인 남성이고, 그 이후는 백인 여성, 다음은 흑인 남성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소수의 목소리에서 그 안의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미국에서 다양성의 범주에 아시안은 늘 철저하게 배제되어있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넷플릭스가 그 다양성의 범주에 아시안이 있다고 다시 한번 외치는 계기로서 자리 잡은 것이라 간주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교회에서 한 남성이 에스터에게 고백하면서 결혼해달라고 하자 에스터가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와 결혼하려고 한다. 그것을 알고 엘 리가 이를 막아낸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감정은 감히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해당 대화가 오가는 공간도 교회라는 점이에서 인상 깊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것이 제1원칙이라고 말하던 교회가 어떤 식으로 이질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속에서 왜 철저하게 LGBTQ는 제외되는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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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육체적 사랑을 떠나서 정신적 사랑을 보여준다. 떠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만두를 빚는 것도, 잡을 수 없는 전차를 따라가는 것도 사랑이며 꿈을 응원하는 것, 삶의 윤곽선을 보여주는 것도 사랑이다. 남자와 여성이 하는 육체적 사랑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질문한다.

 

어느 날에 내가 영화관에 가면 더 이상 퀴어라는 서사가 없길 바란다. 퀴어 담론은 다시 그들을 한 범주로 범주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을 카테고리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반쪽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여성 서사, 퀴어 서사, 청소년 서사, 인종 서사 등을 바라보게 된다. 보통인 인간은 없다. 모두들 소수인 분야가 있다. 소수인 우리가 연대해야 변화할 수 있다.

 

 



[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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