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투명한 그러나 단단한 : 야구소녀 [영화]

글 입력 2020.06.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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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최고구속 134km, 볼 회전력의 강점으로 ‘천재 야구소녀’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목받았던 ‘주수인’(이주영). 고교 졸업 후 오로지 프로팀에 입단해 계속해서 야구를 하는 것이 꿈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도 기회도 잡지 못한다. 엄마, 친구, 감독까지 모두가 꿈을 포기하라고 할 때, 야구부에 새로운 코치 ‘진태’(이준혁)가 부임하고 수인에게도 큰 변화가 찾아오는데…

 

 

상영관에 발을 내딛기까지 오랜만에 독립영화를 본다는 생각에 설렘이 가시지를 않았다. 게다가 그 영화의 주제 또한 흥미로웠으며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다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영화관 입장 전에는 발열 체크를 했으며 관람객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말하자면 (그 구분이 모호하긴 하다만) 영화 '야구소녀'는 독립영화보다는 대중영화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주제 또한 기대와는 달리 여성 인권보다는 꿈에 대한 희망과 지지 중심이었다. 실제 감독도 초기 여성 인권을 주제로 구상한 각본을 탈고 과정을 거치며 주제를 확장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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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아직도 다 크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내 머리는 잘못 보면 아무렇게 잘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울프컷이었고 나는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베이지색의 카고 바지를 좋아했다. 남자아이들과 축구하는 걸 좋아했고 가끔 이상하게 보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배드민턴을 좋아했다. 체육시간에 열심히 함은 물론이고 학교가 끝난 후 강당으로 달려가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배드민턴을 쳤다. 그렇게 실력이 늘고 어느 날 체육 선생님이 운동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 물었고, 당연히 배드민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키가 작아서 안 된다는 선생님의 그 한 마디에 나는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배드민턴을 칠 때마다 내 키가 신경 쓰였다. 내가 너무 작아서 남들 보다 멀리 있는 공을 빨리 못 쳐내는 것 같고 더 높이 뛰어야 하는 것 같았다. 키는 어느 순간부터 콤플렉스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너무 일찍 알아버린 듯했다. 이후 어설프게 사격을 하다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다양한 사정으로 배드민턴을 못 치게 되었지만 이상하고 슬프게도 아쉬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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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수인처럼 시속 130km로 볼을 던지는 여자 선수는 실제로 없다고 한다. 한국 프로 야구 선수 중에서도 여자 선수는 없다. 궁금한 마음에 초록창에 검색 후 질문들을 죽 보다가는 힘이 빠져 버렸다. 몇 없는 질문은  '저는 여자인데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을까요?'였고, 대부분의 답은 '성별 규칙은 없지만 여자는 프로 선수가 되기 힘듭니다' 혹은 단호히 '실력이 있어도 될 수 없습니다' 따위의 것들이었다.

 

 

"이제는 제가 야구선수로 보이시나봐요"

 

 

내가 본 영화는 사실 장르가 판타지였던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야구소녀'를 보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 수인 같은 누군가가 내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 덕분이었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당당히 말하며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실력을 폄하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수인은 자기 할 말을 다 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인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수인의 엄마가 수인에게 지하철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아이를 바라보던 이야기를 해준 장면과 매니큐어를 바르는 이유를 묻는 동생에게 단단해진다고 답해주었던 장면이었다. 물론 트라이아웃에서 볼을 던지는 수인의 모습은 거의 공식적인 명장면이었다. 조금 오글거릴 때도 있었지만 수인의 시속 130km 강속구처럼 마음에 빠르고 강하게 꽂히는 대사가 많았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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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후에는 보통 특정 등장인물이 기억에 남기 마련인데 이번 영화는 모든 등장인물이 기억에 남는다. 우선 주인공 주수인 역을 맡은 배우 이주영. '이주영을 위한 주수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주영은 수인 그 자체였다. 실제로 이주영은 영화 촬영을 위해 프로 선수를 준비하는 남자 선수들과 한 달 가까이 함께 훈련을 받았고 그 덕에 수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수인의 어머니 역을 맡은 염혜란 배우는 시사회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야구소녀가 되고 싶었지만"이라는 말을 앞에 붙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말이 기억에 남고, 그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염혜란 배우가 그려낸 수인 어머니의 감정선은 매우 섬세했다. 이를 통해 (다수가 말하기를)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꿈을 꾸는 이들의 가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외 코치 역을 맡은 이준혁 배우, 종호 역을 맡은 곽동연 배우, 수인 친구 역의 주해은 배우, 수인 아버지 역의 송영규 배우까지 각자 맡은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들끼리의 케미 또한 좋았다.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개성 있고 또 의미 있는 캐릭터들이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되고 이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등 아주 원초적인 질문들까지 던지게 된다. 가능성에 대한 질문보다는 내가 가진 것을 떠올리게 하고 이어 희망을 그리게 만든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무모하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무채색과 같은 불확실의 연속인 나날들 속에서 불투명한 그러나 단단한 꿈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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