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실재는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이야기 -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전시]

르네 마그리트, 그의 신조가 전시를 통해 눈앞에 나타나다
글 입력 2020.05.26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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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그를 처음 접한 건 빳빳한 재질의 미술책 속에서였다.


초현실주의 작품 설명아래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 신선함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캔버스 위의 그림과 이어지는 창문 밖의 풍경은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생경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그림과 실재 간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던 것도 이 작품을 접하고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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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미술책에서 봤던 그의 작품을 전시회에서 접하게 되었을 때는 마치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신선했다. 멀티미디어를 통해 또다른 차원의 디스플레이에 놓인 그의 작품은 또다른 생경함을 내게 선사해줬다. 이번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이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었다. 그의 작품이 주는 신선함에 그치지 않고 이를 특별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극대화시켰다는 점이었다.


 

 

Part 1 입체 미래주의


 

르네 마그리트는 1915년 브뤼셀 예술아카데미에 진학하며 드로잉과 회화를 배웠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추상미술운동인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사물에 대한 다채로운 시각을 통해 기하하적인 구도에 기반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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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후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이 그의 기하학적 표현 감각을 입증해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작품을 보고서 군사 후퇴라는 제목을 유추해내기 어려울 만큼, 이 작품은 매우 해체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제목을 알고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겹겹이 이루어진 날카로운 느낌의 도형들에서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당시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느껴볼 수 있다.

 

 

 

Part 2 초기 초현실주의


 

1922년쯤 마그리트는 추상예술을 등지고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계기는 바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라는 작품의 복제화를 보게 된 것이었다.


마그리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고려 요인임을 깨닫고 추상예술에 빠져 이론적으로만 고민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보이는 일상생활 속 소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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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을 그리는 방향성에 대한 확신은 <길 잃은 기수>라는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그리며 ‘나의 길’을 비로소 찾았다고 설명했고, 스스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작품에는 채스의 말같기도 한 커다란 기둥의 모습을 한 나무 사이로 기수가 빠르게 말을 몰고 있다. 언뜻 보면, 어떤 것을 그린 것인지 쉽게 종잡을 수 없는 그림 속의 소품들은 우리가 얼마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사물들을 편협하게 범주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Part 3 암흑기


 

‘암흑기’라고 불리우는 시기에 마그리트는 오히려 가장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는 당대의 무거운 분위기를 재료 삼아 검은색, 갈색, 파란색 계열의 어두운 톤의 색상을 사용하고, 새, 손, 채스 등과 같은 평범한 대상을 소재로 삼았다.


그는 이 시기에 사물이 본래 지닌 고유한 틀에서 벗어나 재해석 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변신이라는 의미의 ‘메타모포시스’기법을 통해 사물이 다른 사물로 서서히 탈바꿈하는 것을 시도했다. 이는 그가 말하는 ‘거슬리는 시적인 효과’이다.

 

 

[크기변환]원대한 여정.png

 

 

이 ‘거슬리는 시적인 효과’는 <원대한 여정>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도 매우 기묘한 느낌이 든다. 마치 에베레스트와 같은 커다란 설산 위로 여성의 신체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하반신 부분에 이르러 적막한 설산의 모습과 대비되는 도시의 풍경으로 ‘변화’한다.


이는 마그리트가 처음으로 사물과 사물을 겹쳐 놓지 않고, ‘변화, 변형’이라고 정의되는 방식을 써 신체와 도시 풍경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혼합시켰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을 짚고 있다.

 

 

 

Part 4 파리에서


 

1927년 가을, 마그리트는 그의 아내 조르제트와 함께 파리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그는 초현실주의 작가 그룹들과 교류하면서 일상의 환경들에 영감을 얻어 그린 100여점의 작품을 제작한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소품들은 그의 손을 통해 불편하고 낯선 환경 속에 놓인다.

 

 

[크기변환]이미지의 배반.png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이미지의 배반>이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활자를 새겨 놓은 그림. 이 작품은 실제 사물과 언어 간의 관계성이 얼마나 허술하고 느슨한지 알려준다.


가끔 어떤 사물의 이름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책을 보면서 이것을 왜 하필 ‘책’이라고 부를까? 하는 고민을 다들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언어가 가지는 임의성은 언어가 사물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언어라는 틀을 눈에 가져다댄 체로 사물을 보는 것 같다. 마그리트는 그러한 풍조를 이 작품을 통해 비판한다.

 

 

[크기변환]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jpg

 

 

여기, 우리를 당황시키는 또다른 작품이 있다. 작품 제목인 <불가능에 대한 시도>처럼, 작품 속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허공에 대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한 장면과 같이, 허공에 3차원의 그림을 그린다는 불가능한 시도를 표현한 이 작품은 2차원의 평면적인 그림만을 그림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해온 나의 사고를 뒤흔들었다.

 

 

 

Part 5 친화력


 

1930년 경제 악화로 브뤼셀로 복귀한 마그리트는 생계 유지를 위해 남동생의 도움으로 창립한 광고 대행사를 운영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일상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개념으로 <친화력>을 발표했다. 이는 외부적 요소와 상관 없이 그 사물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저로서, 마그리트는 이를 통해 사물들의 존재 이유를 강조한다.

 


[크기변환]선택적 친화력.jpg

 

 

어느날 아침 마그리트는 새장 안에서 자고 있는 새를 순간 알로 착시한다. 그는 새를 가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 새장과 알 사이에 일어나는 모호한 시적인 관계에 흥미를 느끼고 이와 비슷한 결합을 다른 일상 사물에서도 찾아가며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를 통해 우리는 그저 생각 없이 지나쳤던 사물들이 지니는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크기변환]우연의 빛.png

 

 

이 작품은 빛과 사물 간의 오묘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나는 이 작품을 보기 이전에 사물은 빛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는 암흑 속에서는 빛나는 다이아몬드도 그저 ‘보이지 않는 무언가’일 뿐이니까.


하지만,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통해서 빛 또한 사물이 없으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사물과 빛은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상생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Part 6 햇빛 아래 초현실주의


 

제 2차 세계대전은 마그리트의 작품 활동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침울한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전쟁, 슬픔,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 스타일이 1943년 급진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마그리트는 특유의 부드러운 채색기법과 생생하고 현실적인 표현기법을 포기하고 인상파의 강한 스타일과 밝은 컬러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햇빛 아래 초현실주의’ 또는 ‘르누아르 시기’로 불리며, 침울하고 우울한 느낌의 그림을 활기차고 즐거운 이미지들로 대체하는 스타일이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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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의 원리>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한 여인이 벽에 비친 새의 모습을 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와중에 한줄기의 희망을 품고 있는 그의 내면이 비친 것일까, 그녀의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햇살 아래 초현실주의라는 당대 시대 회화 분위기처럼, 햇살처럼 강렬하고 따스한 색감을 통해 표현되어 그 시대 분위기와 더욱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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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혐오>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 속에는 잿빛의 커튼 들만이 그려져 있고, 아무도 없다. 어쩌면, 전쟁으로 인해 삭막해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염증을 느끼고 모두 커튼 속으로 숨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커튼들 만이 우뚝 우뚝 솟아있는 이 그림은 진한 색채와는 대비되게 어쩐지 황막한 느낌마저 든다.

 

 

 

Part 7 바슈 시대


 

1980년 마침내 마그리트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마그리트는 이전에 파리에서 전시 출품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기도 한만큼 50세의 중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기회가 온 것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결국 주요 작품들을 전시 목록에서 빼버리고 파리지앵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그들의 속물적인 내면을 조롱하는 30여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 시기는 ‘암소’라는 뜻의 ‘야수’라는 단어를 패러디한 ‘바슈 시대’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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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원>이라는 작품 속의 초록색 인간은 괴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입은 총구로 표현되어 있으며, 눈이 달려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인형 눈 같은 가짜 눈이 달려 있다. 진정한 눈은 모자 속에 숨겨둔 체,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하는 가짜 눈을 달고는, 총구와 같은 입으로 그의 내면과는 달리 고상한 척 비판을 해대는 파리지앵들을 조롱한 것만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art 8 마그리트의 헌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그리트는 다시 예전의 회화 스타일로 돌아왔다. 재정적으로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생계유지를 위해 하던 광고 일을 모두 그만두고 오로지 미술 작업에만 몰두 했다.


남은 20년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은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 상황을 뒤엎고 고정관념을 깨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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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렇다. 와인병과 당근이 한쪽에는 멀쩡히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상부에는 당근이었던 것이 와인병의 형태로 둔갑한다. 이러한 변모하는 사물의 모습에서 어쩐지 ‘탄피’라는 제3의 새로운 사물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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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렇게 일상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의외의 크기로, 이상한 곳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도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는 크기의 사물들은 일상에서의 모습을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전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각 사물들이 속박되어 있던 관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그림속에서 만큼은 자유로움을 주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침대보다도 더 큰 빗을 하프처럼 튕길 수도 있고, 옷장 크기 만해진 화장 브러쉬로 마당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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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만 감추어진 것, 그리고 확연히 보이는 것에 대한 개념을 탐구해왔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그의 고민이 반영되어 남자의 얼굴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앞쪽에 사과를 배치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대상이 항상 어떤 것의 뒤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그리트는 이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없다 해도 사과 뒤에는 남자의 얼굴이 있음을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뒤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서술하고자 했다.

 

우리의 눈은 실제로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언뜻 보고 사람인줄 알았던 것이 인형이었거나 하는 착시 현상은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들은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Part 9 빛의 제국


 

<빛의 제국> 시리즈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대조적인 낮과 밤이 동시에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


그림 위쪽 부분은 뭉게구름이 자옥한 맑은 낮의 하늘이며, 아래는 밤의 어둠에 잠긴 집이 숲에 둘러싸여 있다. 불이 켜진 몇 개의 창문들이 밤의 풍경임을 알려준다. 아침과 밤과 낮이 함께 공존하는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경이롭고 매혹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크기변환]빛의 제국.png

 

 

이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듯, 낮과 밤이 공존하는 이 독특한 풍경은 정말 알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며 우리를 끌어들인다. 낮과 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해가 뜬 낮에는 빛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밤에는 빛이 없다는 것? 빛 아래에서의 사물과 어둠에 잠긴 사물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게 다른 모습을 한 것들의 대조는 마그리트가 여태까지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다루어 왔던 것이었다. 그 대조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볼 수 있을까? 우리의 눈이 얼마나 적은 것을 보아 왔는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전시 구성


 

이번 전시는 마그리트가 작품을 그리며 의도했던 ‘익숙한 소품의 불편하고 낯선 모습’을 재현할 수 있도록 정말 다양한 디스플레이와 미디어 매체가 동원되어 더욱 실감적인 관람이 가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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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관객이 그의 작품 중 하나인 <행복한 가부자>의 실루엣이 직접 되볼 수 있는가 하면,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마그리트의 대표작인 <세헤라자데>라는 작품 속의 이목구비가 되어 볼 수 도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 직접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더욱 생생한 관람을 넘어 체험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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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렇게 넓은 공간의 벽면, 바닥까지 두른 마그리트의 작품을 눈으로 귀로 감상하며 마치 그의 작품 속 한 장면의 한가운데 앉아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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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쨍한 노란 색 불빛이 온통 뿜어져 나오는 공간에서는 마치 햇빛 아래의 초현실주의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듯한 경험이 가능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오랫동안 쨍한 불빛 속에 있다 보면 눈이 피로하거나 전등 불빛을 바라보고 벽을 보면 생기는 흰색 무늬들이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또 한번 나의 눈이 얼마나 실재와 다른 것들을 보는가에 대해 느껴볼 수 있었다.

 

이번 마그리트 특별전은 이렇듯 마그리트가 생전에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했던 사물과 언어 간의 모호한 관계, 우리의 눈이 가지는 한계, 이를 통해 실재와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큰 괴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을 현대의 다양한 디스플레이 기술을 통해 생생하게 관객들의 눈앞에 들이밀며 마그리트의 작품이 주는 생경함과 다른 또다른 신선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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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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