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지만 도저히 떠나올 수 없는 매력 -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글 입력 2020.05.1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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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음울한 천재 작가'인가?

A: 뭐?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1962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8년 46세에 사망한 미국 소설가다.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졸업논문으로 쓴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그 후 1996년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형식 과잉의 두 번째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 Infinite Jest》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무한한 재미》는 20세기 말 미국 문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으로, 《타임》은 이 소설을 `20세기 100대 걸작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 후 2011년 출간된 세 번째 소설 《창백한 왕 The Pale King》은 월리스가 죽기 전까지 십여 년간 집필한 미완성 유작이다. 그는 죽기 마지막 날까지 원고를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본 도서는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이후 번역된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에세이집이다.

 

그가 그 스스로 본 도서의 첫 번째 에세이에서 밝혔듯이, 월리스는 차멀미, 비행기 머리, 고소공포 멀미와 같은 `인생멀미`를 달고 산 인물이었다. 십 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고, 스무 살 무렵 첫 자살 충동을 겪은 후 평생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을 땐 전기충격요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기억력 상실 등의 후유증을 겪다가 회복되고는 했다. 자살 충동을 동반한 우울증 외에도 술, 마리화나, 텔레비전, 섹스, 설탕 중독으로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으며, 병균이나 물, 비행기 등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2007년 오랫동안 복용해온 항우울제 나르딜의 극심한 부작용으로 약을 잠시 끊지만, 곧 우울증 삽화가 재발했다. 새로 처방받은 약은 더는 효과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책의 날개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먼저 사과드리지만, 내 머리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생각은 "아 씨, 또 야?"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독자는 `중독과 불안에 물든 비운의 천재 예술가`를 어필하는 듯한 소개에 반사적으로 입이 삐죽 나왔다. 이런 나의 무례한 선입견은 너무 많이 고기와 종소리를 연결한 개의 침 같은 거였다. 내가 그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기엔, 옹졸한 문화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예술가라는 이름의 나르시시스트들이 눈에 눈물 대신 자아도취를 잔뜩 매다는 것을 (조금 짜증 섞인 상태로) 구경했다.

 

이는 내가 기본적으로 사회가 은근히 구성하는 `예술가` 이미지를 형성해나가는 자극적 마케팅에 완전히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 정신병이 고급 액세서리 상표였는지 묻고 싶다. 정신병리는 철학적 문제가 될 수 있고, 어느 한 편에서 무한히 가벼워질 수 는있지만,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으로 남발될 정도로 가볍지 않다.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지,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윤리적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얼마 전 고야는 정신병이 있었으면 고흐에 버금가는 대중 속 슈퍼아티스트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온한 상상을 했다.

 

마찬가지로 옹졸하기 짝이 없는 독자로서 괜한 흠잡기일 수 있지만, 책의 쓸데없이 긴 제목도 불만이었다. 외우기도 어렵고, 문장도 직관적인 글을 왜 제목으로 삼은 걸까? 제목의 긴 글자로 디자인적 요소로 삼고 싶었던 건가? 그는 사실 일본 라노벨 작가가 아닐까? 물론 책을 덮으면서, 이야말로 `월리스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괜히 에세이에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월리스의 눈을 노려보면서, 이 책의 흠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읽었다.

 

 

 

불만을 품고 책을 읽던 내가 자의식 과잉의 월리스씨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조금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위트를 끊임없이 구가하는 월리스씨가 사실 엄청난 작가라고?!~



우선 라노벨식 부제목에 사과드린다. 이 작가의 리뷰를 쓰게 된다면, 그가 그러하듯이 쓸데없는 주석(1.쓸데없는 주석이라기보다는, 일견 사족처럼 보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게 읽히는 그의 확장적 사고를 쓰고 싶었다. 2. 왜 아트인사이트에는 각주 달기가 없을까?)을 달고, 뭔가 사족 같으면서도 몰입감 있게 내용을 전개하는 듯한 그의 스타일을 한 번쯤은 따라 해보고 싶었다(물론 작가도 아닌 평범한 씹덕인 내가 쓰고나서 읽어보니 나무위키의 역사부터 문제점과 논의를 차례대로 읇는 TMI에 지나지 않는다. 고로 여기까지 글을 읽는 당신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낸다.)

 

좌우간 책을 덮고 내가 윌리스라는 작가에 도달한 결론은 아래와 같다. 나의 무례한 예상대로, 월리스는 나르시시스트가 맞다.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에세이에서 윌리스는 온 세상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며, 나만을 위해 특별히 모습을 드러낸 어린 시절의 환상이 깨졌다고 선언했으나, 그의 글을 보면 어떤 것을 보고 글로 옮기건 그 중간에는 반드시 데이비드 윌리스 포스터가 우뚝 서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나온 에세이로 말하자면,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축제를 바라보는 데이비드 윌리스 포스터고,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는 데이비드의 초현실주의적 표현력에 감탄하는 데이비드 윌리스 포스터(사실, 나로서는 그의 찬가가 어쩐지 윌리스 자신의 작품에게도 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다. 심지어 후반에는 윌리스가 써내려가는 글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무엇의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은 일종의 자아비판으로까지 읽혔다.

 

그래, 사실 점점 그가 써내려가는 대상을 잊고 온통 작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는 독자의 태도는 (이는 예술 향유의 자유기도 하지만, 최소한 허접스러운 평가 요소가 포함된 감상문을 쓴다는 입장에서 말이다) 굉장히 바보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무언가 소재가 있는 글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작가와 연결하게 할 정도로, 월리스가 써내려가는 글은 정말 몰입감이 대단하다. 그의 자기중심적 글쓰기는, 어느 순간 독자들을 같은 위치에 서게 한다. 사실, 그가 써내려가는 글의 소재들은 내가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다. 미국 중서부의 일리노이 축제, 영화전공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 구글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존 업다이크의 작품, 미국 최고의 에세이 보고서, 사실, 관심도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을 읽는다 해서 관심이 생길 일도 없다. 하지만 이 작가가 써내려가는 글에서 소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의 언어 안에서 이들은 새로운 생명과 독보적인 재미를 부여받는다. 심지어 내가 월리스라는 인물 자체를 이 에세이로 처음 만난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소재에 관한 관심과 지식과 상관없이 글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가의 역량이 드러난다. 그는 데이비드 린치에 대하여 "자신에게 그 놀이와 그 놀이의 규칙과 부수적인 내용에 대한 창의적 지배력이 전적으로 주어진 경우에만 친구들을 놀이에 참여시키는 아이 같았다"라고 기술하였는데, 역자가 언급했듯이 이 문구만큼 월리스의 글의 특성과 매력을 설명하는 문장은 없다. 월리스는 적극적으로 `데이비드 월리스`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조금은 정신없이 흘러가는 문장에 몸을 맡기면, 월리스의 글은 `무한한 재미`를 선사한다. 여기까지 내 리뷰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정말로 그의 글의 매력에 중독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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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뻘건 미국인 관광객의 '떠나올 수 없는' 매력



그의 글이 온전히 자기중심적으로 기술된다 해서,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오만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너무나 공감했던 역자의 말을 빌려오고 싶다. 책의 역자인 이다희는 먼저 `월리스의 글이 때로 여성으로서 소외감을 느끼게`한다고 기술한다. 실제로 그의 글에는 여성 독자로서 무언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나의 경우 여배우와의 정사를 생각하는 것이 다소 무례하게 느껴졌다). 역자는 이어 번역가 김명남의 말을 빌려, `월리스가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현자이기는커녕, 그는 자의식이 강한 작가 중에서도 심한 자기중심주의자`였으며, ` 월리스가 글 뒤에서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라고 표현한다. 실로 공감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월리스는 `지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약간 우울함에 젖은 미국 동부의 작가`라기보다 `심약하고 예민하고, 주저 없이 정서를 표현하는 미국인`의 모습에 가깝다. 포인트는 그가 `지적인 작가`라기보다는 `민감한 미국인`에 가깝다는 데 있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어렵지 않고(역자가 적절히 번역한 결과일 수 있다. 특히 데이비드 린치의 아티클 중 문제의 `꿀차` 번역에는 역자의 능력과 감각에 정말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현대인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공감이 가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상황을 기술한다.

 

글을 쓰기 위해 월리스의 전작들을 찾아보니, 월리스는 그 자신을 스스로 `미국인 관광객`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심지어 자발적으로 돈을 받고서 7박 8일의 크루즈 여행에서 선배 작가의 예술인 척하는 광고에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자신에 대해 거의 자학에 가까운 글을 썼다.“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 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 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통렬한 자기풍자처럼 그는 실제로 `미국인 관광객`스럽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첫 번째 에세이에서 그랬다. 월리스는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우리`와 `이방인`으로서 비교하고, 더이상 `나만을 위해 구성된 축제`가 아닌 곳에서 가축처럼 묶인 동부 출신의 여피가 번지점프 기구에서 소 같은 소리를 내며 대롱거리는 것을 본다. 마지막 장면은 오락을 위한 기구에 탄 유쾌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쓰고 깊다. 그의 글이 이토록 자극적이고 재밌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이 과장된 선전과 광고의 시대에 서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월리스가 그 자신만의 세계를 글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현대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미국인 관광객`이다. 우리가 그러하듯, 그는 인생으로부터 `멀미`를 경험하고, 아이러니에 익숙한 동부인이다.

 


 

비로소 월리스의 책에서 떠나오며



글을 모두 쓰고 나니, 월리스 작가에 관한 내용만 주구장창 썼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만큼 월리스는 개성이 강한 작가였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글의 형식으로서 충격받은 부분과 그의 과감함에 놀랐던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무분별하게 남발되는 각주도 그렇지만, 그는 `배우 앨런시크가 장난감을 뽑기 위해서 사격을 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써놓고, 그 후에는 `자세히 보니까 앨런시크는 아니다`라고 쓰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는 겁도 없이 타란티노 감독이 데이비드 린치보다 못한 작가로 두고, 맥락상 그래도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생각되는 업 다이크를 신랄하게 까는 부분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 선배 작가도 대차게 비판하는 그이기에 이 정도 표현은 약과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나는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쓰고 공개하진 못할 것 같다. 이런 부분 외에도 그는 온갖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생생하게 기술한다. 이런 것들이 맞물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완성한다. 온갖 글쓰기 방법이 연구된 오늘날, 나는 어리석게도 어떤 `개성`을 발견하길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월리스는 그런 생각을 가볍게 깨부순 작가다. 그는 자기의 예민한 감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의 개성을 조각해냈다.

 

리뷰를 끝내려고 하니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아마 내 평가로 인해 월리스가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줄까 봐 그렇기 때문이다. 월리스는 기본적으로 작가로서의 역량과 문화예술가로서의 이상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일단 축제를 방문하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써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소재를 이토록 재밌게 쓰는 실력에 감탄했다. 이렇게 글이 잘 읽히는 이유는 그가 관찰하고 본 것들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술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월리스는 컬리후라이를 `음모처럼 생겼고, 손가락이 햇볕에 빛나게 만든다`라고 묘사하며, 돌아가는 원반으로 된 놀이기구를 `갸우뚱거리며 핑그르르 돌지만 좀처럼 멈출지 못하는 것이 꼭 동전 같다`라고 묘사한다. 물론 내가 가져온 예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이 묘사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에세이집의 마지막 섹션인 `결정자가 된다는 것`에서는 월리스의 이상과 지성이 돋보인다. 그는 미국의 `최고 에세이`를 결정권자로서,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를 선정하였다고 선언한다. 이 짧은 글에서 월리스는 극단적이고 겁을 먹은 지식적/정서적 의존과 성숙하지 못한 도덕적 명확성 속으로 후퇴하는 시대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시대의 반사적인 도그마를 약화시키는, 성실하고 전폭적으로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하는 작품들을 `최고`로 선정하였다. 그의 이런 선언은,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을 향한 것이고,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2020년인 지금을 꿰뚫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가볍기 짝이 없는 과장과 선전의 시대에서 귀를 틀어막고, 시대와 사상이 만들어낸 거푸집 안에서 자신의 형태를 녹여낸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월리스는 그 예민한 감각을 통해 시대적 비극을 인식하고 통렬한 언어로 글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그를, 어떤 현대인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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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 David Foster Wallace Essays -


지은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옮긴이 : 이다희

출판사 : 바다출판사

분야
문학>에세이

규격
138*214mm

쪽 수 : 288쪽

발행일
2020년 04월 17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89932-53-4 (03840)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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