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MBP 01. 지금 B의 위치

나의 지리적, 물리적, 심리적 위치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4.30 12:08
댓글 4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TMBP[Too Much 'B'formation Project]

 

TMB프로젝트는 한국말로 구구절절이라는 뜻의 '투머치인포메이션'이라는 단어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젝트로, Inforamtion의 I 대신 제 이름 첫 글자이자 마지막 글자인 B를 넣었습니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에세이 프로젝트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지금 B의 위치>로 시작합니다.


***

 

제목에 떡하니 지금이란 단어를 붙여 놓고 조금 오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이란 말하는 바로 이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 문장조차도 지금이 아닌 흘러간 과거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금 나의 위치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나열해보고 싶다. 어제 문광훈의 예술과 나날의 마음에서 이런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삶을 그런대로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지금 자기 삶이 처한 곳과 앞으로 나아가게 될 방향을 가끔은 점검해보아야 한다.


- 문광훈, 예술과 나날의 마음 P.17


 


1. 나의 지리적 위치


 

지리적이란 [관형사·명사] 어떤 곳의 지형이나 길 따위의 형편에 관한. 또는 그런 것이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세 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나라)이라는 나라, 그중에서도 수원시 팔달구 교동 카페의 2층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사실 지금 막 앉은 건 아니고 아까 오후 1시부터 5시인 지금까지 앉아 있다. 이렇게 지금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아 요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요즘 나의 지리적 위치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내 GPS를 추적한다면 핸드폰이 꺼져 있는 것이 아닌가 크게 오해할 지도 모르겠다. 내 활동 반경은 내 원룸 크기인 가로 세로 곱해봤자 10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친구들과 애인이 꺼내주지 않는 이상 그러했다. 2개월 전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관둔 뒤 코로나(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전 세계로 확산된,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감염질환)라는 바이러스때문인지 일자리를 구하기 여간 쉽지 않았다. 즉 나는 백수, 좋게 말하면 취준생이고 더 포장한다면 졸업예정생의 길에 있다.


주로 카페에서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시험을 준비하거나 자소서를 쓰곤 하던 나는 지난 달 거주지를 약소하게 나마 확실히 옮긴 뒤 (전 글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나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 손의 움직임을 만보기 같은 것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만보쯤은 훌쩍 넘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오로지 내 취향이 담긴 그곳에서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9시에 일어나 출근하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갈 곳 없는 나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 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양치를 하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애호박을 굽고 카레를 끓이거나, 미역을 불리고 볶아 미역국을 끓이거나, 우유에 시리얼을 말거나 했고 맛있게 먹은 음식 뒤에 덩그러니 놓인 그릇 및 접시, 냄비 등을 곧바로 설거지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다시는 눕고 싶지 않게(곧잘 실패하곤 했지만)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나 대신 인형들을 베개에 나란히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어 자리를 뺏지 않으려 노력했다.


집안일로 손을 분주히 움직이는 것은 그렇다치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일에 몰두했다.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인 완벽주의 때문에 미뤄 놓은 졸업논문 계획서를 무려 11월, 1월, 2월, 3월, 4월… 5개월만에 완성시켜 교수님께 보냈다. 당시 졸업보다는 생계가 급했기에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우선순위를 아르바이트에 두었다. 그렇게 완벽하지 못할거면 시작도 하지 못한다는 나의 고질적인 병은 졸업을 미뤘다는 이유로 28만원을 희생시켰다.

 

어쨌든 논문을 작성해도 좋다는 오케이사인을 받은 뒤 나는 본격적으로 일본 민화와 한국 민화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그림에 대해 읽으니 자꾸만 그림이 그리고 싶어 중간 중간에 딴 길로 새는 일도 잊지 않는다. 그림 하나를 완성시키면 그에 맞는 굿즈제작 욕구가 생겼다. 충동적으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모작한 것이 꽤나 흡족해 엽서를 제작했다. 팔 만한 것인가 아닌가 친구들의 칭찬만으로는 의구심이 들어 판매로 이어지지 못한 20여장의 엽서는 집들이를 오는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이런가 하면 잡코리아, 사람인, 학교 홈페이지, 알바몬을 들락거리며 일자리에 지원했다. 아르바이트, 인턴, 정규직 등의 자리를 찾아 지원해 본다. 1명을 뽑는데 300여명이 지원한 것을 보고 없던 기도 다 죽어버린다. 면접 제안조차 오지 않는 것이 꼭 내 글쓰기 실력 반 자격증을 따놓지 않은 것 때문인 것 같아 속상해하며 이런 저런 자격증에 대해 알아본다. 토익사이트에 시험 자리가 났나 꼬박 들어가 보고 이미 백 번쯤 원망한 코로나를 백한 번 원망해본다.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는데도 지리적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크게 실망하며 아침과 마찬가지로 저녁을 해먹고 곧바로 치워버린 뒤 빨래를 하고 (집에만 있어도 돈이 새는 것처럼 빨래도 는다.)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한 뒤 침대에 누워 학교 도서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전자책을 보거나 생일선물로 받은 책을 읽다가 그제서야 손을 멈추고 잠든다.

 

 


2. 나의 심리적 위치


 

심리적이란 [관형사·명사] 마음의 작용과 의식 상태에 관한. 또는 그런 것이다. 심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을 말하기 더 어렵다. 그 이유를 친구가 지난 달 나의 생일 편지에 옮겨 적은 글로 대신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한곳에 잡아둘 수 있단 말인가? 애당초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몸속을 순서대로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은 대체 어디에 있지?“마음은 기억 속에 있어. 이미지를 먹으며 살아가는 거야.”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P.418

 

그렇다. 마음은 기억속에 있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처럼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마음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요즘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 아니라 한 시간마다 열두 번씩 바뀐다. 논문을 써야할 것 같다가, 일자리를 구하려면 자소서를 써야할 것 같다가 아니지, 아르바이트라도 아무거나 일단 해야지 하다가 그림이 무척 그리고 싶다가 시를 쓰고 싶다가 그래서 행동으로 옮기다가 앗차차 이럴 때가 아니지 한다.


지금 나의 심리적 위치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각 기업들의 인사담당자에게 좌우된다. 탈락의 고배가 이렇게나 쓴 지 몰랐다. 이 세상에서 나의 위치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음을 느끼게 해서 그것이 나는 괴롭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라는 것을 괜히 들었는지 아무데나 갔다가 나의 금같은 시간이 돌덩이 취급 당할까봐 두렵다.


이런가하면 갑자기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림 한 편을 완성하거나 잠자기 30분 전이나 밥먹으면서 읽던 책을 완독할 때이다. 엄청난 성취감을 주지만 돈은 안주는 이 행위들을 타인이 '쓸데 없는 것을 한다'라고 생각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이 글을 떠올린다.

 


나는 먼 훗날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다. 살아오는 동안에는 태어날 때 내몫으로 주어진 불행을 감당하고, 인내하고,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뒤에는 없어도 좋을 나쁜 일들이 나를 찾아왔다. 불행은 행복이 마련해 둔 빈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뿐이다.


- 유진목, 디스옥타비아 P.163


 

나는 먼 훗날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다. 아나운서가 하고 싶어 온 몸을 울리는 심장의 쿵쾅거림을 참고 방송반의 오디션을 보던 초등학교 5학년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미래의 나는 내 젊음과 용기와 전문성 없는 순수함을 그리워할 것이다.

 

이렇듯 세세하게 관찰해보니 나는 애매한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생계를 책임질 나와 스트레스를 책임질 나 둘 다를 걱정하며 어렵사리 수평을 유지하고 있구나. 지난 가을 보았던 떨어지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있던 나뭇잎을 생각하며 지금의 나의 위치에 대해 쓴다.

 

***


가을에 보았던 떨어지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있던 나뭇잎이 이제 봄바람을 타고 산들산들 춤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해도 매일 바람은 새롭게 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

 

TMB프로젝트는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4
  •  
  • pal
    • 돈도 안 되고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저라서 그런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이 와닿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 0
  •  
  • DINOSAUR
    • 글 잘 읽었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워 할 인생이라는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언급해주신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1 0
  •  
  • Zoo
    • 안녕하세요. 우연히 만난 글이 그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이렇게 댓글남겨요. 사무치게 그리워 할 인생의 한 가운데. 가끔은 막막하고 삶의 의미없음을 느낄 때 다시금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보실지 모르겠지만, 그냥 많이 응원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네요 :)
    • 1 0
  •  
  • Song
    • 좋은 글 감사해요!
      그때의 저를 그리워하는 제가 보이네요.
    • 1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