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티끌 같은 나, 평범한 사람, 그러니까 우리들의 이야기 - 도서 '티끌 같은 나'

티끌같은 존재인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글 입력 2020.04.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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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 책의 90 퍼센트 이상이 문학을 차지할 정도로 문학 편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것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거나, 꽤나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다.


여러 유명한 고전들은 어린 시절에 이미 많이 읽은 탓에 손이 안 가는 것도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낯선 나라의 낯선 시간대의 이야기보다는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러시아 문학은 다른 어떤 나라의 문학보다 더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여러 매체의 영향으로 영미권 문화들은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오히려 가까운 나라인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추운 나라. 시베리아 횡단 열차. 넓은 땅. 소련. 사회주의. 딱딱한 분위기. 이런 식의 단편적인 이미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문학이라니. 어린 시절 읽은 톨스토이 전집이나, 초등학생에게는 너무 어려웠던 <죄와 벌>이 러시아 문학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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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들 때문에, 러시아 여성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중단편집 <티끌 같은 나>의 책장을 넘기는 것은 완전히 낯선 나라로 아무것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딱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이 책의 작가인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라는 평을 받는 러시아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는 것. 둘째는, 책의 제목인 <티끌 같은 나>에 마음이 끌렸다는 것.

 

책은 책의 제목인 <티끌 같은 나>로 시작해 <이유>, <첫 번째 시도>,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느 한가한 저녁>까지, 총 다섯 편의 중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들을 읽어 나가며 이 중단편집의 제목을 <티끌 같은 나>로 정한 것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서로 다른 다섯 편의 이야기이지만, 모든 이야기의 기저에 ‘티끌 같은 나’라는 자기 인식과 그것에서 기이한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깔려 있음을, 결국엔 ‘티끌 같은 나’라는 것이 바로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굵직한 정서라는 것이 느껴졌다.


21세기 한국을 살고 있는 20대 여성인 내가 20세기 초-중반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모두 평범한 사람이라서 일 것이다. 너무 평범한 나머지 분명히 서로 다른 소설 다섯 편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인물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에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요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


그런 불안한 질문들과

두려움이 가여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이랑 - <평범한 사람> 가사 中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특별히 잘나지도, 특별히 못나지도 않은 그들, 아니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아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5막 구조에 익숙해진 나에게 토카레바식의 전개 방식은 새롭게 느껴졌다. 소설에는 이렇다 할 중심 사건이 없다. 물론 인물의 삶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들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굵직한 축이 되지는 않는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이야기에는 '사람들'만이 존재했다. 여러 티끌 같은 사람들이 만나고 부대끼고 헤어지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인물의 삶을 좋은 방향 혹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왜 다른 이들은 사람답게 사는데 그녀의 자식들만 그 모양일까? 도대체 그녀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일까? 그녀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러시아 지식인들이 자주 하는 질문인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못한 사람이 있고,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이유> 中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가 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어쩌면 저기 하늘나라의 컴퓨터가 망가져 버려 땅에서 보내는 신호를 감지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유> 中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데에는 합리적이거나 인과적인 이유나 과정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건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짜 이유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일상이라는 이름의 비극 속에서 무너져버릴 것 같기 때문에.

 

꿈 앞에서 좌절당하고, 직장을 잃고, 애인에게 버림 받고, 가족에게 외면 당해도 삶은 게속 이어진다. 티끌 같은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젊은이들은 높은 지대에 펼쳐진 바닷가에 모여들었고, 바다는 늘 똑같은데 사람들은 매번 바뀌었다.

 

<티끌 같은 나> 中

 


신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주려고 하면, 그 사람은 그동안 있던 곳의 문을 닫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과거와 연결된 문은 세게 닫혔다.

 

<이유>


 

시간의 형태가 선형적인지 혹은 원형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한없이 작은 존재인 개인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삶은 직선의 도로 위에서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현재는 순식간에 과거가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는 어느새 현재가 되어있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는 우리 삶에 계속해서 잔상처럼 남아있다.



나는 계속해서 내 삶을 살아가지만, 늘 뒤를 돌아봐서 마치 목을 뒤로 꺾은 채 앞을 향해 걷는 기분이 든다.

 

<첫 번째 이유> 中


 

어떤 일이 생겨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토카 레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것이 사랑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상이 배우자이든, 애인이든, 가족이든, 혹은 꿈이든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형태와 온도가 어떻든 그들은 사랑에서 동력을 얻는다.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는 자신의 꿈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삶의 순간순간 자신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잊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표현은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빌려온 듯하다.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시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19,710피트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응가에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서쪽 봉우리 가까운 곳에 얼어서 말라붙은 표범 사체가 있다. 이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 높은 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中



티끌 같은 존재인 우리는 우리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그것을 아는 데에 실패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 속에서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채 나와 같은 수많은 티끌 같은 타인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감정을 나누며 말이다.


 

티끌같은나_표지+띠지_앞_도서출판잔.jpg

 

 


 

티끌 같은 나
- One of many -


지은이
빅토리아 토카레바
(Виктория С. Токарева)
 
옮긴이 : 승주연

출판사 : 도서출판 잔

분야
러시아 소설

규격
130×195(mm) / 페이퍼백

쪽 수 : 432쪽

발행일
2020년 03월 30일

정가 : 14,500원

ISBN
979-11-90234-05-4 (03890)





저역자 소개


빅토리아 토카레바
 
193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63년 단편 <거짓 없는 하루>를 발표했다. 주로 대도시 여성의 심리, 일과 사생활, 여성의 꿈과 연약함을 이야기하는데, 수많은 단편과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1990년대에는 '토카레바 붐'이 일어나 대부분의 작품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재출간될 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 덴마크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되는 등 전 세계에서 주목받았으며, 작품의 페미니즘 성향이 인기의 비결로 꼽힌다.
 
1987년 소련 시기 문학 부문에서 공로가 인정되어 존경징표훈장을 받았고, 1997년에는 러시아-이탈리아 국제 문학상인 모스크바펜네상을 수상했다. 2000년 제53회 칸영화제에서는 문학과 영화 공로상을 받았다.
 
《운 좋은 신사들》(1971), 《용기를 위한 100그램》(1976), 《미미노》(1977), 《개가 피아노 위를 걸었다》(1978), 《탈리스만》(1983), 《없었던 것에 대해》(1986), 《누가 마지막 열차에 타는가》(1986), 《시국》(1987), 《나 대신》(2000), 《눈사태》(2001) 등을 출간했다.
 
 
승주연
 
안양대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에서 러시아어 언어학을 전공하고 2005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한국어 번역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제15회 한국문학번역상을 받았고, 국립오페라단에서 공연한 《보리스 고두노프》의 시나리오를 번역하는 등 다양한 문학 행사를 기획했다.
 
《봉순이 언니》 《고령화 가족》 《달콤한 나의 도시》 《불의 강》 《침이 고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두근두근 내 인생》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하고, 러시아 소설 《상처받은 영혼들》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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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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