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만주에서 글을 쓴 여성이 있다고? - '신작로에 선 조선 여성'

글 입력 2020.03.2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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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동어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정말 고전문학은 남성 작가의 소유였을까?

일제강점기에 여성들은 어떤 글을 썼을까?


‘신작로에 선 조선 여성’은 근대문학에 비추어진 19, 20세기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학자들의 논문으로 구성된 학술지 느낌이 강한 만큼, 한 편 한 편 모두 알찬 지식과 담론을 담고 있다.


가사문학이나 시조, 고전소설은 현대에까지 대중적으로 향유되지는 않는 편이다. ‘춘향전’이나 ‘심청전’, ‘구운몽’과 같은 정전은 동화책으로나마 필독서 반열에 올라 있지만, ‘방한림전’을 밤새 읽거나 허난설헌의 ‘규원가’를 읊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고전소설은 현대어로 깔끔하게 번역된 번역본이 아니면 독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과거 독자들이 공유하던 감정을 현대 독자들이 고스란히 전달 받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보통 수능에서 졸업하면 고전문학과도 영영 안녕을 고하는 독자가 많다.


나 역시 고전문학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고등학생 때는 문학을 즐기기보다 문제를 맞히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고전문학의 주제는 보통 권선징악, 충, 효, 열이라는 사실만 달달 암기했었다. 도통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모든 작품이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괜히 더 어려워보였던 것 같다.


오히려 입시를 마친 후에야 고전의 힘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고전은 그 시대의 삶, 그 시대의 사람, 그 시대의 생활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서사문학이 급격하게 성장한 근대 시기 문학에는 한국사의 흐름도 담겨있는 듯해, 이전 시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는 것도 새로웠다.


그 과정에서 주로 ‘작자 미상’으로 표기된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궁금했다.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은 여성 문학들도 궁금했다. ‘신작로에 선 조선 여성’은 그러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적격인 책이다. 여성 작가, 여성 독자뿐 아니라 신여성과 구여성의 현실까지 자세하게 파헤치며 문학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낸다.

 


그런데 강릉김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제약 많은 여자로 호명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제약을 넘어서는, 혹은 넘어서려고 하는 존재로 자신을 재현하고 있다. 여자 몸이 되어 구경을 쉽게 못 했지만 지금은 하고 있고, 여자의 몸이지만 일본에 분노하고, 여편네 되어 서울 구경 어려운 일을 한, 즉 제약을 넘어선 여자로 재현하는 것이다. (119쪽)



‘20세기 초 강릉김씨 부인의 여행기, 『경성유록』’은 20세기의 여성관과 여성에 주목한다. 시대적 특성상 여성이 지방에서 서울로 유람을 가는 일은 흔치 않았는데, 강릉김씨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문득 서울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 『경성유록』이다.


강릉김씨는 여행을 떠나기 전과 떠난 후, 자신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달라진다. 쉽게 말해 ‘여자이기 때문에 못한다’에서 ‘여자지만 해냈다’로 변한 것이다. 20세기 여성관이 어떻게 진보했는가를 한 인물의 여행기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의가 있다.


20세기 신여성에 모든 조명과 불빛이 주목되는 동안, 구여성들은 그다지 많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신작로에 선 조선 여성’은 20세기 신여성보다 구여성의 삶에 더욱 집중한다. 그 점에서 상당히 신선했고 생각할 점이 많았다. 『경성유록』의 강릉김씨 역시 학교를 다니고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아니라 조선의 전형적인 구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의 편견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았고, 그것을 기록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만주로 망명한 여성, 가사문학 「위모사」를 쓰다’였다. 「위모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품이었는데, 그동안 연구가 깊게 진행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위모사」는 일제강점기 만주로 망명을 떠났던 여성 이호성이 쓴 269구의 가사문학으로, 조선후기의 남녀평등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다음 슌풍부러 환고국 하올적애

그리든 부모동생 악슈샹환 할거시이

이밧게 다못할말 원근간 붕우님내

내입만 처다보소 독닙연회 게설하고

일쟝연셜 하오리라 끗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순풍 불어(독립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립던 부모님과 동생을 모두 만날 것이라는 다짐도 마음이 아렸지만, 이 밖에(이 가사에) 다 쓰지 못한 말은 자신이 직접 독립 연회를 열어 일장연설을 할 테니 모두들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는 리더십에 감탄을 했다.


조선후기의 남녀평등사상, 페미니즘은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엔 걸리는 것들이 있다. 여성 ‘해방’보다,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애국 계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와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이를 ‘장밋빛 환상’이라고 표현했다. 삶의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여성이 진정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기는 그보다 몇 십 년이나 지난 후에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 독립운동가가 가시화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셈이다. 남성 독립운동가보다 활동할 수 있는 폭이 좁았고, 이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할 책임이 있다. 「위모사」 같은 작품을 더욱 공을 들여 발굴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기리는 것. 책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후대인의 몫이다.


이처럼 ‘신작로에 선 조선 여성’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 여성의 삶을 문학을 통해 조명한다. 문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책이고, 문학과 친하지 않은 독자라 하여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고전문학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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